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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플레이어 1권(17화)
Chapter 5. 미궁 속을 헤매다Ⅰ(3)


미궁에서 얻은 물건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건 한 자루의 칼.
얼핏 보기에 전체적인 생김새는 일본도와 비슷하게 생겼고, 가이드 포인터로 확인한 칼의 능력은 다음과 같다.

― 평범한 블레이드(Normal Blade).
― 칼을 사용 시 강화계 능력이 15퍼센트 상승합니다. 공격력이 10퍼센트 상승합니다. 힘이 +7 증가합니다.

결과적으로 공격력이 더 좋아졌고, 공격할 수 있는 범위와 거리가 대폭 늘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내가 칼 쓰는 법을 전혀 모른다는 것.
그래도 지금은 그냥 마구잡이로 휘둘러 베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강화계 능력으로 얻은 파괴력과 속도만으로도 웬만한 몬스터들은 무 자르듯 썩둑 베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슥. 슥.
나는 살점과 피가 엉겨 붙어 엉망이 된 칼날을 수건으로 정성스럽게 닦아 냈다.
숫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이물질을 제거하는 것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날이 날카롭지 않아도 충분히 적을 벨 수 있었다.
강화계 능력이 나에게 무식한 완력과 속도를 제공해 주니까.
쿠웅! 쿵!
뭔가 땅을 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난 하던 일을 멈추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녀석들이군!
반인반소. 미노타우로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미궁의 통로를 정기적으로 순찰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몬스터다.
흔하다고는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완력과 저돌성을 갖고 있는 몬스터였기에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었다.
“무우우우!”
나를 발견한 미노타우로스 무리들이 일제히 소 울음소리를 낸다.
칼 손잡이를 잡은 손에 적당히 힘을 주고 나는 그들을 향해 마주 돌진했다.
찌이잉―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진 기운이 나를 감싼다.
흥분으로 피가 끓어오르며, 주위가 느려지는 동시에 난 빨라졌다.
슈아아악―
칼날을 힘껏 휘두르자 단단한 뼈와 질긴 힘줄이 한 번에 베어졌다. 쩍 벌어진 상체에서 뜨끈한 내장이 핏물과 함께 바닥으로 쫘악 쏟아졌다.
단번에 거대한 몸집의 미노타우로스 한 놈을 베어 버린 것이다.
확실히 능력이 강해졌어!
며칠 동안 긴가민가해서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몬스터를 베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강화계 능력이 한층 더 강력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자신의 강함을 스스로 인지하는 순간, 혈관을 타고 알 수 없는 쾌감이 번져 나갔다.
“무우우우!”
미노타우로스들이 나를 향해 한꺼번에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그러나 난 여유 만만했다.
동시에 공격한다고 해도 미세한 공격 속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 미세한 차이는 모든 것이 느려진 내 시야를 통해 큰 간격으로 벌어졌다.
슈아아악―
그 순서에 맞춰 칼을 휘두른다.
서걱―
잘려 나간 괴수의 몸통에서 살과 피의 아찔한 향연이 벌어진다.
어느새 그 자리에 멀쩡히 서 있는 것은 나 하나뿐!
“후아.”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고 나자 공기 속에 섞인 혈향이 물씬 코를 찌른다.
비릿한 피 냄새가 후각신경을 자극하며 정신을 일깨웠다.
나, 성격이 좀 변한 건가?
생각해 보면 그럴 만했다.
나는 며칠인지 몇 달인지 모를 시간을 미궁 속에서 보냈다.
그동안 한 일이라고는 몬스터를 베고 또 베고, 지치면 무사하길 빌며 구석에서 선잠을 자는 것뿐이었다.
삭막한 생활 패턴의 반복은 나를 무디게 만들었다.
내가 만들어 낸 몬스터의 사체를 보고 구역질을 한 것도 몇 번뿐, 반복되는 자극에 무감각해졌다. 심지어는 배고픔을 못 이겨 몬스터의 사체를 생으로 뜯어 먹고 피를 마셔 갈증을 지워야 했다.
미궁을 헤매는 동안 별생각을 다 했다.
그중에 죽으면 미궁을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장 자주 했다.
현재 내가 소유한 라이프는 4포인트.
원래대로라면 살해당한 순간 포인트가 3으로 감소하며 부활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기억의 반지 효력으로 플레이어 윤설린 근처에 부활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만 결과를 장담할 수 없기에 그 방법은 최후로 미루었다.
미궁을 홀로 헤매는 동안 서서히 잠식해 오는 외로움.
그 외로움을 떨쳐 내는 유일한 방법은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뿐. 난 지칠 때까지 검을 휘두르며 몬스터를 사냥했다.
몸을 극한까지 혹사시켜야 외로움이 빚어낸 악몽을 꾸지 않으니까.
이러다 미쳐 버리는 거 아닐까?
플레이어가 죽어서 이플렌시아에 갇히면 헤매는 자가 된다.
난 죽지 않았지만 미궁에 갇힌 상태.
지금의 나는 이미 헤매는 자(Ghost)가 된 것이 아닐까?
그런 망상이 괴롭혔다. 난 머리를 흔들며 잡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애를 썼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잠재우는 것에는 몸이 바빠지는 것이 최고.
저벅. 저벅.
나는 피 웅덩이가 된 바닥을 구둣발로 밟으며 다음 통로를 향해 나아갔다.
쉬이이―
마치 아나콘다같이 생긴 초대형 뱀이 통로에 똬리를 틀고 있다가 혀를 날름거리며 나를 반겼다.
거대 뱀은 용수철처럼 몸체를 튕기며 쩍 벌이진 나를 삼키려 했다.
공격하는 데 걸린 시간은 0.5초도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무술의 고수라도 공격에 반응하는 속도는 최소한 0.7초. 보통의 사람이라면 절대 피해 낼 수 없는 공격이었다.
일단 물리면 치명적인 신경독이 퍼져 변변찮은 반격도 하지 못하고 먹잇감이 될 터.
그러나 녀석이 날 만난 것이 불운이었다. 느려진 시야에 녀석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는 나한테는 너무 느려!
스릉―
칼집에서 칼을 빼내며 강화계 능력을 최대로 뽑아내 가속했다.
서걱!
놈의 머리통이 깨끗하게 잘려 나가며 바닥에 쿵 떨어졌다.
거대한 몸집에 비해 싱거운 최후였다. 그런데 몸에 긴장을 풀며 칼집에 칼을 집어넣는 순간.
우우우웅―
주위의 공기가 울리며 갑자기 기압이 상승했다.
대기압이 상승하며 압력이 허파를 쥐어짰다.
“허억.”
호흡이 곤란해지며 온몸의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혹시 다른 플레이어인가?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숨어 있는 녀석을 끌어들이기 위해 나는 일부러 강화계 능력을 조금 줄였다.
으드득―
관절에서 삐꺽거리는 소리가 나며 자동차 뒷바퀴에 깔린 개구리처럼 살점이 안쪽에서 툭툭 터져 나간다.
벌어진 살점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걸 느끼며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쿵!
“으아아아악!”
빨리 좀 나오지. 이러다 진짜 죽겠구나.
저절로 강화계 능력이 일어나려는 걸 억지로 누르자 왼쪽 통로에서 낯선 사내가 나타났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은 뚱뚱한 사내가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크크……. 그래. 죽어라. 죽어!”
오덕후같이 기분 나쁘게 생겼군. 오덕후에게 필요한 건 현실을 일깨워 줄 철저한 응징뿐!
찌이잉―
난 강화계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며 바닥에 떨어뜨려 두었던 칼을 잡았다.
슈아아악!
힘차게 휘두른 칼날이 녀석의 정수리를 향했다.
중력의 영향을 받고 있어 평소보다 속도가 느렸지만, 그것만으로도 녀석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육체 능력은 평범한가 보군.
“끄어어어?!”
놀란 녀석이 의미 없는 소리를 뱉어 냈다.
파악!
칼날이 그의 정수리를 시원하게 파고들며 녀석을 그대로 위에서 아래로 정확히 2등분해 버렸다.
쓰러진 녀석의 몸은 마른 모래 같은 고운 입자로 분해되어 버렸다.

― 상대 플레이어를 살해하셨습니다. 보상으로 라이프 1포인트를 얻었습니다.
― 상대 플레이어를 죽여 모든 속성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조금 늘었습니다.
― 상대의 능력을 흡수하는 데 실패합니다. 대신 특수 능력의 일부분이 순수한 에너지로 변환 되어 흡수됩니다.

청량한 느낌이 전신을 파고들며 묘한 쾌감이 핏속을 떠돌았다.
새로운 에너지가 내게 활력을 주며 소유한 다른 능력인 치유력이 극대화되었다.
파앗―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상처가 완전히 아물었다.
그런데 이 녀석 어디로 들어온 거지?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나와 같은 입구로 들어왔거나, 아니면 이 미궁에 여러 개의 다른 통로가 있다고 가정해 볼 수 있었다.
뭐 둘 중 하나겠지. 어느 쪽이건 별 상관없잖아?
어차피 입구는 플레이어가 들어온 순간 닫힌다. 나갈 수 있는 건 출구뿐.
중요한 사실은 미궁 속에 다른 플레이어가 침입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잠재적인 적.
위험도가 더 높아졌으므로 앞으로는 더 신중하게 움직여야겠다.
일단, 뭘 가지고 있나 볼까?
나는 녀석이 남긴 가방을 털었다.
가방에는 하급 포션 몇 개와 구슬 몇 개, 그리고 독이 든 시약병이 들어 있었다.
에이, 거지잖아?
이런 생각을 하며 가방을 버리려는데, 빈 가방 무게치고는 꽤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살펴보니 가방 밑에 숨겨진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는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 등으로 추측되는 보석들이 들어 있는 주머니가 있었다.
오오! 럭키(Lucky)!
이걸로 당분간 우리 가족 생활비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나름대로 소박한 기쁨을 느끼고 있을 때, 갑자기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석실이 울렸다.
드드드드― 드드드드―
또 시작이군.
미궁의 통로는 시간이 지나면 전체적으로 뒤바뀐다. 석벽이 움직이며 통로의 연결이 바뀌는 것이다.
덜컥.
바닥의 석판이 움푹 꺼지기 시작했기에 나는 다른 석판 위로 가볍게 뛰어 옮겼다.
석판이 어지럽게 얽히며 기존의 통로는 지우고 새로운 통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드르륵! 덜컥!
새로운 통로가 완전히 만들어지는 데는 체감 시간으로 5분쯤 걸린다.
살짝 지루함을 느끼는 순간.
쉐에에엑―
갑자기 새로 열린 통로에서 뾰족한 화살촉이 내 심장을 노리고 찔러 들어온다.
새로 연결된 통로에 숨어 있던 플레이어가 나를 향해 기습을 펼친 것이다.
찌이잉―
강화계 능력을 끌어 올리자 나를 향해 찔러 오는 화살이 점점 더 느려진다.
화살을 비껴 내며 나는 아래쪽 통로에 있는 사내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슈아아아악―
단번에 사내의 머리통을 잘라 낼 생각이었으나 생각보다 사내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하압!”
기합을 내지른 사내가 강철로 된 창을 휘둘러 내 공격을 막았다.
파앙!
무기가 서로 부딪히는 순간, 나는 강화계 능력을 최대한 끌어냈다. 무식한 파괴력으로 적의 무기를 그대로 부수어 타격을 입힐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내의 무기는 생각보다 단단했고 힘의 균형도 서로 비슷했다.
강화계 능력자다! 능력의 파괴력도 거의 비슷해!
같은 능력을 가진 플레이어와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긴장했다.
부우우웅―
창을 든 사내의 반격이 시작됐다.
휘둘러진 창대를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놓쳤지만, 움직임이 너무 컸으므로 목표 부위를 예측할 수 있었다.
파앙!
오른쪽 다리를 노린 공격을 칼을 휘둘러 막아 냈지만 완력에서 내가 다소 밀렸다.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물러서자, 녀석은 내가 있는 석판 위로 올라왔다.
그제야 사내의 모습을 자세히 보니, 나름 근육질의 날렵한 몸에 눈썹이 짙고 눈빛이 상당히 고집스러워 보였다.
같은 능력이지만 파괴력은 내가 조금 밀린다.
한 끗발 밀린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속에서 울컥 오기가 치밀었다.
반으로 쪼개 주겠어!
녀석의 정수리를 노리고 힘차게 칼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