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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플레이어 1권(18화)
Chapter 5. 미궁 속을 헤매다Ⅰ(4)


슈아아악!
힘찬 공격. 공격에 대한 확신.
그러나 그건 사내가 휘두른 창대에 깨졌다.
파악!
맹렬하게 휘둘러진 창대에 부딪힌 내 칼날이 깨졌다.
완전히 칼이 부러지진 않았지만 칼날이 깨지며 금이 갔다. 내 자존심에도 금이 갔다.
죽여 버리겠어! 이 X자식!
힘차게 칼을 휘둘렀으나 흥분으로 공격이 커진 탓인지 녀석은 쉽게 내 공격을 피해 내는 동시에 반격을 해 왔다.
부우우웅!
강철 창의 움직임을 놓치는 순간.
파악!
충격으로 오른쪽 어깨뼈가 우지끈 부러졌다.
부러진 뼈가 근육에 박히며 끔찍한 고통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칼을 잡은 손에 힘이 빠지며 손잡이를 놓치자 칼이 움직이고 있는 석판 사이의 틈으로 빠져 버렸다.
부우우웅!
고통으로 몸이 멈춘 사이, 녀석은 재차 강철 창을 휘둘렀다.
강화계 능력으로 수십 배는 느려진 시야로도 쫓을 수 없는 속도.
공격을 피할 생각은 버렸다.
대신 나는 동시에 녀석의 턱을 향해 올려 차기를 날렸다.
빠각! 퍼억!
발차기에 맞은 녀석의 턱뼈가 부서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통쾌한 쾌감을 느낄 사이도 없이, 녀석이 휘두른 창이 내 왼손을 부수고 옆구리로 박혀 들었다.
우드득―
칼날처럼 변한 부러진 뼛조각이 몸속 깊숙이 박혀 든다.
갈비뼈를 왕창 부러뜨리고도 남은 충격이 내장을 헤집었다.
“크아아악!”
의식이 한 방에 날아갈 것 같은 충격.
충격으로 튕겨져 나간 나는 움직이는 석판 사이 비좁은 틈으로 떨어져 버렸다.
드르륵. 덜컥.
석판이 움직이며 내 시야를 막았다.
충격 때문인지 의식이 흐려졌다.



Chapter 6. 미궁 속을 헤매다Ⅱ(1)


“으윽.”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깨어났다.
재생력 덕분에 부러진 뼈가 도로 붙고 출혈이 멈췄지만, 상처는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으깨졌던 왼손도 신기할 정도로 멀쩡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반지가 없어졌다!
쓰라린 왼손을 어루만지다가 난 문득 설린 씨가 준 반지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충격으로 손가락뼈가 으깨질 때 어디론가 떨어진 모양이다.
기억의 반지가 없어진 이상, 미궁에서 죽어도 그녀 곁에 부활할 수는 없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진작 죽어 볼 걸 그랬나?
“쿨럭.”
기침을 하자 피가 섞여 나왔다. 망가진 내장이 아직 완전히 재생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이곳은 20평쯤 되는 작은 석실이었다. 그런데 어느 곳에도 다른 통로로 연결된 출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갇힌 건가?
그럼에도 난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기다리다 보면 다음번에 미궁 전체가 다시 설계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자연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겠지.
“젠장! 졌어.”
분한 마음이 가슴 속에 가득했다. 그와 동시에 내가 너무 어리석게 대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분한 탓에 너무 쉽게 졌어.
녀석이 나보다 더 강한 것 사실이었지만, 단번에 질 만큼 큰 격차가 있는 건 아니었다.
질 수도 있지, 뭐. 내가 무슨 XX 코믹스에 나오는 무적의 초인도 아니고.
그동안 내 힘에 너무 도취되어 있었다는 자각이 들었다.
뼈아픈 패배지만, 플레이어들과 전투에서 살아남기에는 내 능력이 아직 부족하다는 걸 자각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으으으으.”
어디선가 들려온 신음 소리에 난 흠칫 놀랐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석실에 누군가 있었다.
플레이어인가?
나는 반사적으로 칼을 찾았지만 뒤늦게 잃어버렸다는 걸 자각했다.
찌이잉―
소리 나는 쪽으로 시선을 옮기고 강화계 능력을 시각에 집중했다.
주위의 어둠이 조금씩 걷히며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사내는 노숙자처럼 남루한 차림을 하고 있었으며,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얼굴에 주름이 잡혔다.
적어도 60대 초반은 되어 보이는 노인네였다.
게다가 어딘가 몹시 아파 보이는 모습.
그러나 그의 곁에는 본인의 것으로 보이는 두 자루의 칼이 놓여 있었다.
겉모습과는 다르게 칼을 좀 쓰는 건가? 혹시 강화계 능력자?
난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그에게 접근했다.
일단 노인에게서 두 자루의 칼을 빼앗아야 했다.
나는 노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천천히 칼자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닿았…… 다.
순간, 노인네가 눈을 번쩍 떴다.
슈아아악―!
뭔가 눈앞에서 흰 빛이 번쩍한 것 같은데 칼날이 내 목에 와 닿아 있었다.
꿀꺽!
뭐야. 이 노인네는? 정체가 뭐야?
“……석현이냐?”
갑자기 노인네의 눈매가 부드러워지며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벌써 학교 같다 왔어? 할아버지랑 놀자.”
“…….”
치매 걸린 건가? 석현이가 아니라고 입바른 소릴 하면 목을 자르겠지?
나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할아버지……. 석현이 학교 다녀왔습니다!”
갑자기 어린애 목소리를 내려니 힘들었다.
내가 생각해도 당치도 않은 어설픈 연기. 그러나 노인네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래. 할아비가 사탕 하나 줄까?”
노인은 주머니를 뒤적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느라 목을 겨눈 칼을 내렸다.
휴우. 겨우 살았어.
노인네는 주머니에서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눅진눅진해진 사탕을 꺼내 내게 건네줬다.
“너무 맛있어요. 할아버지.”
“그러냐? 그럼 하나 더 줄까?”
“…….”
잠시 멈칫한 사이, 노인의 시선이 내가 들고 있는 칼로 향했다.
“그런데 석현아. 칼은 왜 들고 있는 거냐?”
노인네의 눈빛이 다시 매서워지기 시작했다. 난 다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할아버지. 나 칼싸움하고 놀 거예요.”
대답이 적절했는지 노인의 눈빛이 다시 부드러워지며 활짝 웃었다.
“이 할아비가 같이 놀아 주랴?”
대답이 적절했다는 말은 취소. 이 노인네랑 칼싸움하며 놀다간 몸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다.
“저 할아버지…….”
다급히 아무 말이나 꺼내려는 순간 노인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할아비랑 신나게 놀자.”
슈아아악!
다시 눈앞에 뭔가 번쩍하며 칼날이 정수리에서 멈췄다. 살가죽이 살짝 베이며 이마로 한 줄기의 피가 흘렀다.
“에구구! 우리 아기. 다쳤냐? 왜 피하지 않고 섰어?”
글쎄, 나도 피하고 싶었습니다만. 뭐가 보여야 말이죠.
노인네는 한차례 수선을 떨며 때가 꼬질꼬질 찌든 소맷자락으로 피를 닦아 냈다.
침으로 소독한려는 걸 간신히 말리느라 혼났다.
“아가. 이번엔 잘 피해야 된다?”
손자랑 놀고 싶어 하는 노인네의 고집을 꺾긴 힘들다. 말리는 대신 나는 간곡한 어조로 부탁했다.
“하…… 할아버지. 너무 빨라요. 좀 천천히…….”
제발 좀. 살살 좀 해 주세요.
“느리게? 이 정도면 되려나?”
슈아아악―!
이번에는 확실히 아까보다는 느린 공격.
그래도 움직임을 보는 데 실패했지만 어디로 공격하는지는 대충 볼 수 있었다.
채앵!
간신히 가슴으로 향하는 공격을 막아 냈으나 노인네의 깡마른 몸에서 나왔다고 보기 힘든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나는 충격에 떠밀려 볼품없이 바닥을 나뒹굴며 나가떨어졌다.
이 노인네가 정말?!
“할아버지랑 신명나게 놀아 보자꾸나!”
슈아아악―
연속되는 공격.
절반은 막아 냈지만, 반은 몸으로 때웠다.
다행히 노인네가 날 손자로 착각하는 바람에 몸을 베지는 않았다.
이 노인네 검도 도장 관장이라도 되나? 뭐가 이렇게 강해?!
공격에 조금 익숙해졌다 싶으면 노인네가 공격 패턴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다시 바뀐 공격에 익숙해졌다 싶으면 금세 공격 스타일이 바뀐다.
게다가 노인네의 검술에는 속임수가 꽤 많았다.
오른쪽인가 싶으면 왼쪽. 내려 베기인가 싶으면 올려 베기.
농구로 치면 페인트 모션과 비슷한 기술이다.
“허허! 속았지?! 요놈아!”
“…….”
한참 껄껄대며 좋아하던 노인은 갑자기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잘 들어라. 한측계치, 무혈오하다.”
“네?”
“그러니까. 극서위지, 양주사윤이라니까.”
한자 구결 같은데 뭔 말이지?
뭔가를 가르쳐 주려는 의도 같았지만, 뜻도 모르고 단순히 음(音, 소리)만 듣는 것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노인네는 내가 이해하거나 말거나 공격을 계속하며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야, 이놈아! 태후즉양, 마훈고연이라니까!”
“…….”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자음이 내 머릿속에 쏙쏙 들어온다는 것이다.
평소에 암기력이 좋은 편도 아니었는데 88자의 한자음이 머리에 새겨진 듯 기억할 수 있었다.
“한고즉영, 양주사윤, 척재적람, 능문개호…….”
“옳지! 잘한다.”
88개의 한자 구결을 가르쳐 준 다음에도 노인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지치지도 않네. 이 노인네.
결국 먼저 지쳐 쓰러진 건 나였다.
“하…… 할아버지. 좀 쉬었다가 해요.”
이러다 뼈 삭겠습니다. 어르신!
“…….”
그런데 이 노인네 갑자기 대답이 없다.
그러더니 동공이 멍하게 풀리며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쁜 놈! 배은망덕한 년! 너희들이 어떻게 나를!”
뭔가 조짐이 이상했기에 난 노인네로부터 멀찍이 물러났다.
“널 믿었다! 그런데 나를 속여?! 이 괴심하고 한심한! 차라리……. 죽어라!”
번뜩!
씩씩거리던 노인네의 두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슈아아앙―
칼날이 공기를 찢으며 울었다.
“죽어!”
다시 눈으로 전혀 감지할 수 없는 칼날이 날아왔다.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어깨를 스치며 셔츠와 함께 피부를 베었다.
피했다!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지만 노인네의 공격을 드디어 피해 냈다. 눈으로 공격을 감지한 것이 아니라 감각만으로 피한 것이기에 의미가 있었다.
노인네에게 시달린 시간이 마냥 헛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엇쭈? 피해? 요 얼어 죽을 놈아!”
슈아아악―
노인네는 나를 향해 미친 듯이 칼을 휘둘러 맹공격을 펼쳤다.
“죽어! 이놈아!”
공격이 너무 빨라 반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행히 노인네가 제정신이 아닌데다 흥분 상태라 그런지 공격이 얼굴과 심장에만 집중되었다. 덕분에 난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낼 수 있었으나 칼날이 피부를 스쳐 수많은 상처가 났다.
“으으…….”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그런지 현기증이 났다. 호흡이 거칠어지며 입에서 단내가 난다.
순간, 노인네가 허점을 노리고 내 목을 베어 왔다.
“할아버지!”
너무 다급한 나머지 소리치자 뜻밖에 노인의 칼이 멈췄다. 눈빛이 갑자기 변하며 따스해진다.
“서…… 석현아!”
지금이 기회다!
난 재빨리 노인의 오른팔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서걱!
잘려 나간 노인의 오른팔이 바닥에 떨어지며 피를 뿌렸다.
“크아아악!”
노인이 고통스런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 모습이 조금 불쌍하지만 값싼 동정심은 저 멀리 떨쳐 버리고 칼을 들었다.
우지직. 우직.
그 순간, 노인네의 몸이 형체를 잃고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온몸의 뼈가 우두둑 부러져 나가며 뭉쳐진 살덩어리가 젤리처럼 흐물흐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