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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플레이어 1권(19화)
Chapter 6. 미궁 속을 헤매다Ⅱ(2)
분명히 어디선가 본 광경.
일그러진 자(Monster)!
노인은 정신력이 무너지며 일그러진 자로 변하고 있었다.
완전히 변태하기 전에 죽여야 해!
허물어지고 있는 노인의 머리를 향해 칼날을 내리 베었다.
슈아아악― 파악!
“크아아아아!”
몸통이 반쪽으로 조각났지만 노인은 죽지 않고 비명을 내질렀다.
조각난 살덩어리는 금세 다시 뭉쳤다.
젠장! 두 토막을 내도 안 되면 어쩌라는 거지?
파악! 파악!
정신없이 칼을 내리쳐 수십 토막을 냈으나, 살덩어리들은 다시 뭉치며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슈욱!
살덩어리에서 뼈가 솟아나며 순식간에 여덟 개의 팔이 되었다.
괴물은 여덟 개의 팔을 휘둘러 나를 공격해 왔다.
위험!
나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괴물의 공격을 피해 냈다.
어? 그런데 왜 이렇게 느리지?
일그러진 자가 된 노인의 몸놀림은 인간이었을 때와는 달리 평범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설린 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행히 그들은 플레이어일 때 가졌던 특수 능력을 모두 상실해요.”
그렇다면 일그러진 자 쪽이 오히려 원래의 노인보다 상대하기 편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괴물을 향해 칼을 휘둘러 팔을 베었다.
서걱!
“크아아아!”
칼은 맨주먹보다 날카롭고, 난 예전에 일그러진 자와 마주쳤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다.
미궁 속의 몬스터들을 베며 강해진 탓인지 내 공격은 손쉽게 일그러진 자의 내부를 부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딜 공격해야 죽는 거지?
설린 씨가 옆에 있었다면 물어봤겠지만, 지금은 머리를 굴려 알아내야 했다.
어? 저건 뭐지?
투명한 푸딩 같은 괴물의 몸 안에 축구공만 한 둥근 물체가 보였다.
둥근 공간 안에 뭔가 들어 있는 것이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세포의 핵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크아아아― 롸롸롸!”
일그러진 자가 변태를 거의 마친 듯 목소리가 변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생각할 틈이 없어, 난 둥근 물체를 향해 힘껏 칼을 찔러 넣었다.
파악!
핵이 깨어지자 일그러진 자가 형체를 잃고 허물어졌다.
완전히 액체로 변한 몸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석실 바닥을 채웠다.
으, 찝찝한걸?
― 일그러진 자를 해치워 라이프 30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 상대 플레이어를 죽여 모든 속성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조금 늘었습니다.
― 상대의 능력을 흡수하는 데 실패합니다. 대신 특수 능력의 일부분이 순수한 에너지로 변환 되어 흡수됩니다.
파앗―
눈부신 빛과 함께 순수한 에너지가 내 몸 안으로 몰아쳤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엄청난 힘이 혈관 안으로 몰아쳐 몸속에 태풍이 치는 것 같았다. 나는 상쾌함 대신 내장을 갈가리 찢기는 것 같은 고통에 휘말렸다.
“끄아아아아아아!”
찢어진다. 부서진다. 터진다.
엄청난 고통이 내 의식을 단번에 날려 버렸다.
“으윽.”
눈을 뜨자 요즘 들어 자주 기절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덩치 큰 사내가 순정 만화의 주인공처럼 자꾸 픽픽 쓰러지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석실 바닥은 정체를 모를 질척한 물로 가득 차 있었다.
“어푸! 어푸! 퉤!”
그 물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머릿속으로 떠올린 나는 황급히 입안에 들어온 물을 뱉어 냈다.
그건 그렇고 어딘지 모르게 몸 상태가 변한 것 같다.
특별히 강화계 능력을 끌어 올리지도 않았는데 온몸에 기운이 넘친다.
이게 그 노인네가 가지고 있었던 에너지?
어딘가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닌가 싶어서 천천히 몸을 움직여 보았다. 다친 곳은 전부 아물었고 컨디션은 다치기 전보다 더 좋아진 것 같다.
다만 아직도 에너지 덩어리는 내부에서 꿈틀대며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 막대한 에너지는 노인네가 가지고 있던 에너지의 일부분.
과연 그 노인네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극서위지, 양주사윤, 태후즉양, 마훈고연…….”
나는 자신도 모르게 노인네가 가르쳐 준 한자음을 중얼거렸다.
정신이 맑아진다. 몸속에서 멋대로 움직이던 기운들도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완전히 몰입하게 된 나는 시간 가는 것마저 잊어버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들려오기 시작한 소음 때문에 난 눈을 떴다.
드드득. 드르륵.
석벽이 움직이며 미궁의 통로가 바뀌기 시작했다.
뭐야? 얼마나 오랫동안 이러고 있었던 거지?
미궁이 다시 설계되는 타이밍은 체감 시간으로 24시간에 한 번. 그 계산대로라면 나는 하루 종일 명상의 시간을 가진 셈이다.
덜컥!
석벽이 움직이며 통로가 열리자 난 재빨리 자리를 옮겼다.
아차! 칼은 챙겨 가야지.
노인이 남긴 두 자루의 칼은 당연히 내 차지가 되었다.
한 자루는 아무런 마법 능력이 없는 평범한 칼이었으나, 다른 한 자루는 달랐다.
― 뱀프 블레이드(Vamp Blade).
사용 시 강화계 능력이 50퍼센트 강화됩니다. 공격력이 추가로 30퍼센트 상승합니다.
칼날이 매우 날카로워 절삭력이 강합니다.
적을 가격할 때마다 상대의 강화계 에너지를 5퍼센트 정도 흡수합니다.
아티펙트 급 무기라 파괴되지 않습니다.
적의 기운을 흡수하는 뱀파이어 같은 칼.
비록 5퍼센트밖에 안 되는데다 강화계 에너지만 뺏을 수 있다는 한계가 있지만 그게 어딘가?
무엇보다 남이 힘들어 쌓아 올린 힘을 뺏는다는 것. 그 자체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좋은 무기를 손에 넣었으니 얼른 성능 테스트를 해 보고 싶었다.
저벅. 저벅.
통로로 나아가자 올빼미와 곰을 합친 것 같은 몬스터들이 나를 반긴다.
이것과 비슷한 생김새의 몬스터를 온라인 게임에서 본 적이 있다.
아울베어(Owlbear).
기본적으로 야생 곰의 체형이지만, 머리는 올빼미를 닮았으며 큼직한 부리가 있다.
몸통의 털 위를 거대한 깃털이 뒤덮고 있고, 앞발에는 조류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칼날처럼 돋아나 있었다.
“크어엉!”
아울베어가 힘차게 울어 대다 몸집이 두 배로 늘어난다. 근육도 잔뜩 부풀어 올랐다.
뭐야? 요놈도 강화계 에너지를 갖고 있는 건가?
그러나 난 녀석의 생김새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저 새로운 칼을 시험해 볼 적당한 상대가 나타난 것에 기뻐할 뿐.
슈아아악―
칼날이 몹시 가볍고 손잡이가 손바닥에 착 감기는 느낌!
서걱!
베는 느낌도 매우 가벼워, 저항감이나 반발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뼈와 힘줄을 자르는데도 두부를 자르는 듯한 느낌!
그렇게 아울베어의 몸통이 수평으로 반듯하게 잘려 두 토막으로 나뉘었다.
“크어어엉!”
동료의 허무한 죽음에 화가 났는지 아울베어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일제히 덤벼든다.
지잉―
강화계 능력을 끌어 올리자 이전엔 느낄 수 없는 엄청난 힘이 솟아나는 걸 느꼈다.
탓!
가볍게 디딤 발을 내디디며 허리를 틀었다.
칼날을 눕혀 수평으로 빙글 돌리자 아울베어들이 동시에 잘려 나갔다.
샤아악― 서걱!
손잡이로 전해지는 반발력이 너무 없어 살짝 소름이 끼쳤다.
스르르―
순간, 손잡이를 통해 뭔가 손목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근질근질한 느낌이 몸속으로 파고드는가 싶더니 새로운 활력이 전신으로 퍼졌다.
아울베어는 강화계 능력을 가진 몬스터.
뱀프 블레이드는 단순히 상대의 기운을 흡수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빼앗은 기운이 나한테 전해 준다.
비록 한 마리당 5퍼센트라지만 여러 마리를 베었더니 몸속으로 들어온 기운이 적지 않다.
이거라면 지치지 않고 하루 종일 싸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는 말이지?”
자신감이 충만해진 나는 기다리지 않고 아울베어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슈아아악―
그대로 휘두른 칼날이 적의 몸통을 가볍게 파고든다.
내려 베기. 수평 베기. 사선 베기.
아울베어의 질긴 가죽과 단단한 뼈도 칼날의 진입을 막을 수 없다.
칼날이 가벼운데다 노인네가 주고 간 엄청난 양의 에너지 덕분에 속도도 전보다 굉장히 빨라졌다.
그야말로 폭풍난입(暴風亂入)!
난데없이 들이닥친 칼날의 폭풍에 아울베어들은 속절없이 죽어 나간다.
강해졌다! 빨라졌다!
두근. 두근.
충만한 기운이 남아돌았다.
힘껏 통로를 전진하며 마구 칼을 휘두르고 싶었다. 난폭하고 잔인한 원시의 향연을 즐기고 싶다.
진정해! 침착해!
그러나 난 냉정히 기운을 다스리려고 애를 썼다.
조금 강해졌다고 날뛰다가 코가 깨지는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강대한 힘을 얻은 것 같아도 다른 모든 플레이어들보다 강하진 않을 것이다.
뜨거운 심장과 차가운 두뇌.
그 두 가지를 가져야 신들의 생존 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후우.”
호흡을 길게 내쉬며 맹수처럼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심장이 진정되자 온몸에 충만한 기운도 서서히 잠잠해지며 혈관 속으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자! 이제 가 볼까?
칼날에 엉겨 붙은 피를 털어 낸 나는 통로를 통해 천천히 걸어갔다. 아울베어들을 모조리 베어 버렸기 때문인지 통로는 비어 있었다.
잠시 후, 눈앞에 갈림길이 나타났기 때문에 난 잠시 멈춰 섰다.
어느 쪽으로 갈까?
몇 초 정도 고민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났다.
“흐윽. 흐으윽.”
흐느끼는 듯한 여인의 울음소리.
플레이어? 아님 몬스터?
몬스터 중에도 인간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있다. 보통은 여인의 모습으로 방심을 유도한 뒤 기습한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기 위해 구두를 벗어 배낭에 넣었다.
양발만 신은 채 조심스럽게 나아가자 통로의 바닥이 열려 있고, 한쪽에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힘겹게 매달려 있었다.
함정을 건드렸나 보네.
“흑. 살려 주세요!”
여자아이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가냘픈 팔을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매달려 있는 것이 안쓰러워 보인다.
그러나 나는 아이에게 다가가지 않고 냉정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플레이어야? 아님 몬스터?”
“흑. 흑. 살려 주세요.”
“살고 싶으면 질문에 대답부터 해.”
스스로 생각해도 약간 심하다 싶을 정도의 냉정함. 그러나 플레이어를 쉽게 믿으면 이 게임의 승자가 될 수 없다.
게다가 저렇게 어린 여자아이가 위험한 미궁에서 혼자 살아 있다는 자체가 믿기 힘들었다.
“흑. 전 몬스터가 아니에요! 떠…… 떨어질 것 같아요. 아저씨!”
“누구랑 같이 왔니? 왜 혼자 있어?”
“언니들과 같이 왔는데 몬스터를 피해 도망치다가 헤어졌어요. 아……. 아저씨! 제발.”
여자아이가 더 이상 견디기 힘든지 울먹거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
그러나 난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라이프 포인트가 몇 개 있지? 하나라도 있으면 죽어도 다시 부활할 수 있어.”
“흑. 제가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우아아앙!”
아이는 기어이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러나 난 아이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언제부터 거기 매달려 있었니?”
계속되는 질문에 아이는 엉겁결인 듯 대답했다.
“히끅. 몰라요. 한 20분 정도?”
20분이라고? 그게 가능할 리가?
여자아이의 대답에 나는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