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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의 암살자 1권(10화)
4화 시작된 악연(3)
휘이이잉!
신선하게 불어오던 바람의 본질이 약간 변한 듯 매섭게 불기 시작했다. 가만히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던 레시온은 이내 무언가가 왔음을 직감하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주변의 분위기가 조금 전과 미묘하게 달랐다. 어느 정도 돌아다니던 오크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무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떠돌이 생활을 10여 년간 해 온 레시온에겐 이러한 것들이 민감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경찰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울고 웃던 레시온이기에, 이러한 감각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수리검을 손에 쥔 채 사방을 둘러보다가, 이내 다가오는 숫자가 결코 적지 않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현재 파악이 되는 숫자는 10명.
무언가 생각을 하던 레시온은 이들이 일전에 만났던 레이스트와 블라덱과 같은 일행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복수를 한다고 하더니 지금에서야 복수를 시작하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후후, 혼자서 안 되니 이제는 떼로 왔단 말인가.”
레시온이 헛웃음을 지으며 전투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올 테면 와 보라는 식의 배짱을 부리는 것 같았다.
한편 레시온을 포위한 그들은 점점 포위망을 좁혀 가기 시작했다. 레시온과의 거리가 5m 정도 남은 지금 그들은 귓속말로 먼저 달려들 사람을 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먼저 달려들 사람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레시온이 그들을 향해 달려든 것은 바로 이때였다.
“읍!”
6시 방향으로 날아간 레시온은 그곳에 숨어 있는 한 유저의 심장을 향해 수리검을 박아 넣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 유저는 갑자기 달려든 레시온의 공격에 손을 쓰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띠링! PK를 2번 하셨습니다.
―상점 물품 구매 시 기존의 물건 값에서 10%를 더 주어야만 물건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드롭되는 돈의 액수가 5% 줄어듭니다.
패널티를 설명하는 메시지들이 올라왔지만 현재 레시온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최대한 살인을 자제하려고 노력했지만 자신을 죽이기 위해 온 이들에게 그러한 규칙은 지킬 수 없었다.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기 때문에 레시온은 엄청난 패널티를 감수하기로 마음먹고 달려든 것이다.
“적이 달려들었다. 총공격!”
12시 방향에서 칼을 뽑아 들며 소리치는 한 사내. 그는 바로 일전에 만났던 레이스트였다. 레시온에게 당한 굴욕을 참지 못한 그가 그새를 기다리지 못하고 일원들을 끌어들인 것 같았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공격도 하기 전에 한 명이 당했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그는 옆에 있던 유저를 향해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그들이 표창을 꺼내 들더니 이내 레시온에게 날리기 시작했다.
파바박! 파박!
그러나 몸을 돌린 레시온이 사라지려고 하던 유저의 몸으로 날아오는 표창을 막았다. 그런 다음 레시온은 스킬 목록에서 이동 속도를 증가시켜 주는 업그레이드 워크를 시전했다.
다른 것도 시전하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날아드는 공격 때문에 이것 하나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사라지는 유저의 시체를 버린 레시온은 근처에 있던 한 유저에게 수리검을 찔러 넣었다.
수리검을 방어하며 뒤로 물러선 그 유저는 한 바퀴 몸을 돌리며 레시온의 목을 향하여 공격을 날렸다. 이에 레시온은 양손으로 쥔 수리검으로 날아오는 검을 방어했다.
챙!
수리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레시온은 검을 날린 유저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그의 복부를 향해 정확하게 먹혀 든 발차기는 그 유저를 넘어지게 하였다.
그다음 수리검을 이리저리 돌린 레시온은 고개를 수그림과 동시에 몸을 반대편으로 돌려 어느새 뒤로 다가온 유저의 목에 수리검을 찔러 넣었다.
“크으…….”
목에 검을 맞은 그 유저는 낮은 신음 소리를 흘리며 레시온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재빨리 자신이 들고 있는 무기를 휘두르며 레시온의 옆구리를 베어 나갔다.
좌아아악!
깔끔하게 베인 레시온의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나오며 엄청난 고통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체력이 감소했지만 레시온은 최대한 참으며 유저의 목에 박아 넣은 수리검을 뺀 다음 그의 심장 부근을 향해 수리검을 찔러 넣었다.
단숨에 두 곳의 급소를 맞은 그 유저의 눈알이 위로 뒤집어지며 터질 것만 같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내 체력이 0이 되며 로그아웃되었다.
그리고 그 유저가 로그아웃이 됨으로써 레시온이 받게 된 패널티도 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제한폭이 10이라고는 하지만 PK를 할 때마다 엄청난 패널티를 주었기 때문에 제한폭이 10이라고 해도 10이 아니었다.
그냥 두세 번만 죽이면 게임 불능과 같은 상태가 되어 버리는데 그 누가 살인을 하려고 들 것 같은가.
물론 이곳에 있는 레시온과 데스사이트의 일원들에게는 예외지만 진정으로 시그널 온라인을 즐기는 사람들 중에서는 그럴 배짱을 가진 인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단숨에 2명을 죽인 레시온은 피가 계속 흘러나오는 옆구리의 상처를 붙잡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까지 적은 8명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부상을 입었으니 앞으로의 길이 막막할 지경이었다.
복면을 쓴 채로 레시온을 바라보고 있던 레이스트는 일단 레시온에게 상처를 입힌 것에 대하여 만족감을 표시했다. 한 명당 이렇게 한 번씩만 공격을 성공한다고 쳐도 반드시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놈을 죽여! 저놈을 죽이면 돈이 굴러 들어온단 말이다, 돈이!”
레이스트가 인벤토리에서 은화를 꺼내 들며 소리쳤다. 찰랑거리는 은화 소리가 들려오자 머뭇거리고 있던 유저들의 마음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죽이는 데 성공해서 돈을 쟁취할 것인가 죽어서 레벨이 다운될 것인가, 유저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머뭇거리는 저들을 보니 아마도 이번에 데리고 온 자들은 가입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들인 것 같았다.
신참들이라 그런지 PK에 대한 두려움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들의 답답한 플레이를 지켜보던 레이스트는 한심하다는 듯이 그들을 바라보며 언성을 높였다.
“패널티가 두려운가? 고작 레벨이 다운되는 게 두려워 나서지 못하는 것인가! 그래, 돈이 부족한 건가? 좋다, 만약 저자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5골드를 포상으로 주도록 하지.”
인벤토리에서 금화 5개를 꺼내 든 레이스트가 손을 내밀어 금화를 흔들기 시작했다. 5골드라면 시가 50만 원.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그리고 레시온에 대한 레이스트의 한이 엄청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숫자이기도 했다.
한편 레이스트가 5골드를 내놓자 마음을 정하지 못했던 유저들 중 한두 명이 독기를 품으며 레시온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압!”
전사로 보이는 유저가 레시온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돈 때문에 의욕만 앞선 공격이었다.
그의 공격을 가볍게 피한 레시온은 그의 목을 강하게 내리친 다음 무릎으로 그의 면상을 차올렸다. 그다음 오른 주먹으로 다시 한 방을 먹인 레시온은 발차기로 그 유저를 구석으로 날려 버렸다.
덥석!
그리고 뒤에서 달려오던 도적 유저의 손목을 잡은 레시온은 왼손으로 그의 명치 부근을 강하게 가격하기 시작했다.
본의 아니게 허리를 수그리며 괴로워하던 그 유저는 곧바로 날아든 레시온의 발차기가 결정타인 듯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이번에는 유저들을 죽이진 않았지만 엄청나게 괴로워하는 두 유저는 신음 소리만을 흘리며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리고 레이스트의 안색도 덩달아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고작 레벨이 10밖에 되지 않았다. 분명히 전직을 한 이후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오며 모든 플레이를 지켜보았다.
그렇다고 레벨이 올랐다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오크 한 마리로 오를 레벨이라면, 레벨이라는 숫자는 쓰레기보다 더 낮은 취급을 면치 못할 것이다.
현재 자신이 포섭을 해 온 유저들의 레벨은 15에서 20 사이였다. 5의 레벨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쉽게 일을 처리할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가도 너무 빗나가 버렸다.
2명이 죽고 2명이 전투 불능이 되어 버리자 레이스트는 자신이 결국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걸 직감했다.
곧바로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레이스트는 잠시 후, 마음을 정한 듯 눈빛을 번뜩이며 레시온을 바라보았다.
레시온의 주변에서 대치하고 있는 부하들을 헤치고 달려 나간 레이스트는 곧바로 레시온과 조금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선 다음 다시 한 번 레시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검을 꺼내 들고 레시온의 목을 향해 내민 다음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운이 참 나쁜 것 같군. 우리에게 걸리다니 말이야.”
“후후, 여우가 혼자서는 안 될 것 같으니 동료들을 불러 온 모양이군.”
“닥쳐라! 우리의 존재를 본 이상 너는 그냥 지나갈 수 없다.”
“웃기는군. 그러고도 네놈이 사내냐? 그새를 못 참고 달려들다니. 형인 주제에 억지 주장을 펴던 놈들보다 개념이 부족한 모양이군.”
“곧 죽을 놈이 말은 많구나.”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레이스트가 바스타드 소드를 레시온에게 겨누며 말을 이어 나갔다.
“오늘, 네놈이 죽는 건 기정사실이다. 네놈의 레벨은 10. 죽었다 깨어나도 나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크게 소리친 레이스트는 검에서 시퍼런 검기를 뿜기 시작했다. 그 진하기는 얕았지만 무언가 무시무시해 보이는 검기였다.
시그널 온라인의 설정에는 검기가 있는 검은 검기가 없는 검보다 공격력이 뛰어나고 또 내구도를 떨어트리는 능력을 가지게끔 하고 있었다.
일반 판타지 소설에서 검기를 머금은 검이 일반 병사의 창날을 무 썰 듯이 잘라 버리는 것을 게임에서 형상화시킨 결정체가 바로 내구도 하락인 것이다.
그러나 레이스트가 뽑아 든 검기를 단순한 공격력 강화로만 알고 있는 레시온은 곧 일어날 비현실적인 일들을 전혀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에는 오직 비열한 레이스트를 이기겠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5화 믿음은 허공 곁으로(1)
남아 있는 6명의 유저가 레이스트와 레시온의 주변에서 물러나자 곧 싸움이 시작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러난 6명의 유저들을 기점으로 원형 경기장 같은 대결장소가 형성됐다.
레이스트와 레시온은 서로에 대해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다. 레이스트는 레벨이 높다는 이유로, 레시온은 양아치 같은 레이스트에게 결코 질 리가 없다는 신념으로 승리를 예상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레벨 차이가 우선순위였지만 숱한 경험을 쌓아 온 레시온이 반드시 질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확률은 낮지만 이변이 일어난다면 이건 정말로 사건 중의 사건으로 부상할 것이다.
“애송이, 검에 떡칠이나 한 주제에 의기양양해하는 꼬라지가 볼만하군.”
“떡칠이라? 검기를 떡칠이라 표현하는 네놈이 정말로 한심할 지경이다. 시그널 온라인에서 검기를 모르면 간첩이거늘, 도대체 게임을 할 생각이 있는 거냐?”
“나는 이걸 강제로 하고 있다. 잘 모르고 있으면 입이나 닥치시지.”
레시온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친 레이스트는 검 끝을 레시온에게 향하게끔 들고서 말을 이어 나갔다.
“강제로 한다면 죽어 줄 수도 있겠군.”
“죽는다, 웃기는군. 감히 내가 죽는다는 말을 입에 올리다니. 내가 구속되지만 않았어도 네놈은 죽은 목숨이다.”
“하하, 레벨도 낮은 것이 누굴 죽인다는 거지?”
그러자 대소를 터트린 레시온이 레이스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게임에서 죽는 거 말고. 진짜로 죽는 거.”
“뭐, 뭐라고?”
“내가 감옥에 있지만 않았어도 네놈은 진작에 죽은 목숨이다.”
레이스트는 삽시간에 두려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농담으로 들으려고 노력했지만 저 눈빛 하며 내뱉는 말은 결코 허언 같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기억이 날 듯하면서도 안 나는 게 레이스트는 미칠 지경이었다. 고뇌하는 레이스트를 바라보고 있던 레시온은 무슨 생각인지 충격적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뉴스도 안 보나? 나, 너희들이 살인마라고 부르는 류현상이다.”
“뭐, 뭐라고?”
다이나믹 본사 건물 꼭대기 층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KBT 직원들의 몸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브레인, 그들은 레시온이 행할 수 있는 오만 가지 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를 밝힐 거라고는 미처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 누가 유저들에게 ‘나 살인마다.’라고 하겠는가.
당연히 그 말은 전파를 탈 것이고 그 유저는 더 이상 플레이를 하지 못할 것이다. 대안이라고는 아이디를 새로 만들어 얼굴을 변경하는 수밖에 없었다.
멍한 눈으로 레시온을 바라보던 동욱은 뒷목을 부여잡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거 완전…… 미친 건지 의도한 건지.”
“이런 식으로 전개를 할 줄은 몰랐네요. 유저 2명을 박살 낸 거보다 더 심각한 것 같군요.”
상우가 타이핑을 하며 동욱에게 말했다.
레시온이 그 말을 내뱉기 직전에 강제로 로그아웃을 시켜야만 했지만 일단 이렇게 된 이상 저들의 플레이를 그냥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동욱은 레시온을 습격한 무리들에 대한 조사를 현수에게 맡겨 놓은 상태였다.
현재 그들도 갑자기 유저들이 여러 명 나타나서 자신을 죽였다며 신고가 들어오는 경우가 더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양상도 신고된 양상과 비슷했기에 혹시 동일 인물이거나 동일 단체가 아닌지 조사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접속 위치를 파악하기 시작한 현수는 이내 무언가를 발견하더니 인상을 찡그리면서 입을 열었다.
“팀장님, 바이러스를 먹은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바이러스라뇨.”
레시온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던 동욱이 현수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동욱이 뒤로 오자 현수는 자신의 앞에 있는 모니터를 보여 주며 입을 열었다.
“접속 위치 추적을 해 보니…… 바이러스를 내장하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종류는요?”
“트로이입니다. 이것들, 의도적으로 우리가 뚫기를 바라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상태에서 기본적인 신상 정보는 알 수 있습니까?”
“가입 절차에 주민 등록 번호나 이름 같은 걸 기입하는 절차가 없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접속 위치를 확인하는 방법밖엔 없습니다.”
현수의 발언에 동욱이 이마를 짚으며 올라오는 열을 식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현수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바이러스 건 해결하시고 최대한 빨리 위치 추적을 해 보세요.”
“그게, 바이러스를 치료해도 락이 걸려 있어서 그것도 뚫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어느 정도요?”
“30분만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동욱과의 대화를 마친 현수는 다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제자리로 돌아온 동욱은 레시온의 플레이를 감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