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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의 암살자 1권(12화)
5화 믿음은 허공 곁으로(3)
현상은 이와 같은 변화에 당황해하고 있었다. 원통한 기운이 밀려오고 만감이 교차했다. 게다가 도저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자신이 게임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현상은 자신이 게임에서 죽었기 때문에 현실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자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자괴감이 밀려오며 현상을 분노의 상태로 빠트리고 말았다.
사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한 현상은 주먹으로 벽을 강하게 두드리며 분노를 표출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인정사정없이 다 집어 던지면서 말이다.
쨍그랑!
거실 탁자 위에 있던 두 개의 꽃병 중 하나를 깨트린 현상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양손으로 소파를 뒤흔들고 괴성을 질렀다.
그러나 그런 행동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은 현상은 트레이닝실에 있는 샌드백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샌드백 앞에 선 현상은 그 후로 쉼 없이 샌드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샌드백을 마치 자신을 죽인 블라덱이나 구타를 한 레이스트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퍽! 퍽! 퍼벅!
패배의 기억을 지우기 위하여 샌드백을 두드리는 거지만 샌드백을 아무리 쳐도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냥 잠시나마 샌드백으로 승리라는 단어를 자신의 머리에 새기기 위하여 하는 무의미한 행동일 뿐.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나게 높았던 현상으로선 패배로 인하여 오는 자괴감 또한 엄청났다.
“이런 젠장맞을, 젠장맞을…….”
욕을 계속해서 내뱉으며 30여 분간 샌드백만 두드린 현상. 그 횟수가 100번은 훨씬 넘은 듯 보였다. 이쯤 되자 머리는 따라가는데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지경에 도달하고 말았다.
샌드백을 치다가 결국 지쳐 버린 현상은 온몸을 홍건하게 적신 땀을 바라본 다음 옆에 있는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땀으로 인한 찝찝함을 샤워로 해결할 심산인 듯 보였다.
그리고 10분 뒤, 수건을 두른 현상은 작은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2층으로 올라갔고 2층에 있는 침대에 도착한 현상은 아래에 있는 상자를 밖으로 끄집어냈다.
상자 안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옷가지들이 널려 있었다. 종류들로 보아 실내에서 생활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일 정도로 그 수가 많았다.
빨래라면 욕실 내부에 있는 세탁기로 해결하면 되었고 젖은 빨래는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는 장소인 2층으로 가서 말리면 되었다.
아주 작은 창문이지만 적은 빛이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었다. 2층에 있는 창문은 천장 위에 있었고 가로가 아닌 세로가 더 긴 창문이라 일조량도 동일 크기의 다른 창문에 비해 더 좋았다.
그러나 이 창문의 존재가 탈옥까지 연결될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창문은 공중에 있었고, 또 실탄 권총도 견디는 특수 강화 유리로 만든 것이었다.
그 유리에 강력하게 충격을 줄 만한 도구는 감옥 내에 없었다. 그야말로 그림의 떡인 것이다.
한편, 옷을 갈아입은 현상은 자신을 죽인 레이스트와 블라덱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졌다. 만약 현상이 감옥에 있지 않았고 그들의 위치만 알았다면 단번에 달려 나가 그들의 심장에 나이프를 박아 넣었을 것이다.
일단은 하루 정도 접속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현상은 게임을 하면서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하여 침대에 그대로 누웠다. 마침 샤워도 한 터라 잠도 잘 왔고 또 심신이 안정을 취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불 안으로 들어간 다음 천천히 침대 속에 몸을 맡긴 현상은 생각하면 할수록 모멸감을 느끼는 게임에서의 사건을 잊기 위해 노력하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
삐이이이!
감옥 안으로 엄청나게 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이 소리는 이내 감옥 전체에 울려 퍼지며 듣는 이로 하여금 괴로움에 몸부림치게 하였다.
침대에서 잠을 자던 현상도 이 소리에 미간을 찡그리다가 한 1분쯤 지나자 이 엄청난 소리를 이기지 못하고 굴복을 하고 말았다.
머리카락을 비비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현상은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망할 놈의 간수 XX.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침대에서 일어나며 간수인 지성을 욕한 현상은 스트레칭을 하며 1층으로 내려왔다. 엄청나게 졸렸지만 이러한 환경에서는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잘 수 있는 사람이 정말로 용한 것이다.
그런데 현상이 1층에 발을 딛는 순간, 놀랍게도 감옥을 울리던 사이렌 같은 소리가 멎으며 일시에 평범한 상태로 돌아왔다.
의아함을 느낀 현상은 1층에 디뎠던 발을 다시 계단으로 올렸다. 그러자 다시 울리는 소리.
삐이이이!
전보다 더 크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아예 귀를 막아 버린 현상은 완전히 1층으로 내려오면서 배식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밥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밖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에 현상은 이곳을 통하여 지성과 대화를 시도해 볼 생각인 것 같았다.
“이봐! 간수! 간수!”
현상이 배식구를 탁탁 치며 큰 목소리로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곧바로 간수실에서 지성이 걸어 나오며 배식구 너머에 있는 현상을 보기 위하며 몸을 수그렸다.
“오늘 아침은 카레라이스입니다.”
“사이렌 좀 안 울리게 할 수 없나?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군.”
“감옥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면 그게 감옥입니까? 참고로 내일도 계속해서 울릴 예정이니 사이렌 소리 듣기 싫으시면 일찍 일어나세요.”
현상의 요구를 완벽하게 묵살해 버리는 지성이었다.
한편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긴 지성은 10여 분 후, 카레라이스를 배식구를 통해 현상에게 주었다. 그런 다음 계속해서 들려오는 현상의 말을 무시하며 자신의 근무 장소인 간수실로 돌아갔다.
결국 이유만 알게 된 현상은 지성의 태도에 엄청나게 화를 내며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간수실로 들어간 지성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칼자루를 잡은 자의 배짱인 것이다.
10여 분간 소리만 친 현상은 지성을 부르는 걸 포기하고 소파에 앉아서 카레라이스를 먹기 시작했다.
지금의 현상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저 사이렌을 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일단 첫 번째로 생각한 1층에서 자는 방법.
그러나 1층에서 잔다고 하더라도 어디에선가 자신을 보고 있는 지성은 금세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사이렌은 어김없이 또 울릴 것이다. 곧바로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밖에도 자지 않는 척하면서 자는 거나 야행성으로 바꾸는 법이 생각났지만 몸을 엄청나게 혹사시키기 때문에 현상은 이 방법도 포기했다.
카레라이스가 거의 다 식어 갔지만 현상은 반밖에 못 먹은 상태였다. 생각을 하면서 느릿하게 먹는 터라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밥을 절대로 남기지 않는 현상은 20분 후, 카레라이스를 다 먹어 치웠고 배식구에 그릇을 반납한 다음 사이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에 다시 오만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고 현상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서울 여의도 다이나믹사 건물 꼭대기 층.
시그널 온라인 담당 부서가 있는 이곳에서 현상만을 담당하는 KBT의 일원들이 고심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들이 고심을 하는 이유는 바로 현상이 게임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냥 죽은 것이 아닌 전문적인 PK 단체의 손에 죽은 것이었다.
레시온이 그들과 대치 중일 때 일단 그들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서울 용산이 바로 파악된 위치였다.
그들은 곧바로 용산을 향하여 차를 몰고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용산에 있는 그들의 접속 위치에 도착한 그들은 어이 상실의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바로 넷방이었다. 특히나 시그널 온라인 서비스 시작으로 엄청난 사람들이 오고 가는 넷방.
결국 그들은 그곳에서 조사를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넷방에서 위치 추적을 막는 바이러스까지 설치한 그들의 실력으로 보아 일을 매듭짓는 데 엄청난 시간이 들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들에겐 시간이 별로 없었다. 이 일이 다르게 변질이 되기 전까지 그들은 현상을 죽인 유저들의 정체를 반드시 알아내야만 했다.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닌 것이다.
만약에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현상이 배 째라는 식으로 접속을 하지 않는다면 그로 인하여 다가올 파장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법원의 판결에 따라 경찰과의 제휴로 현상의 플레이를 감독하고 있었는데 만약 현상이 플레이를 하지 않는다면 최악의 경우에는 판결 불이행으로 인한 재심판이라는 카드까지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회사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 그들은 상황을 악화시킨 책임을 지며 사표를 쓰게 될 것이 뻔했고 따라서 그들의 인생이 파탄 날 지경이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아, 왜 류현상을 죽여서 우리를 이 꼴로 만드냐.”
“팀장님, 일단은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류현상이 플레이를 하지 않는다면 엄청난 사태로 갈 수 있습니다.”
“이제 입사 1년 찬데 사표 쓰기 싫단 말입니다.”
미정이 절망적인 눈으로 동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절실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KBT의 팀장인 동욱도 이번 사건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현상을 죽인 거라면, 그들의 생각에서는 낮은 확률이지만 현상이 재접속을 하면 또 죽일 것이 뻔했고 현상은 점점 자괴감에 빠지며 캡슐과 영원한 이별을 할 수 있었기에 뾰족한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그들의 접속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방법이 있었지만 이것도 꽤 위험한 방법이었다.
증거 확보가 덜 된 상태에서 행여나 그들이 접속 차단을 이유로 재판을 신청한다면 이것도 그들에게는 상상하기 싫은 엄청난 위협 거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덜컥.
그들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뒤쪽에서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40대 후반의 외모에 짧은 스포츠머리, 그리고 호감형의 얼굴 형태를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그러나 그 내면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사람, 그의 정체는 바로 시그널 온라인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이현석 이사였다.
180 정도의 키에 철두철미한 스타일로 유명한 현석은 이사 밑의 부장, 차장, 과장, 팀장들에겐 그야말로 저승사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출근 시간부터 퇴근 시간까지 그에게 야단을 안 맞는 사원이 있다면 그 사원은 정말로 모범 사원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일 처리가 매우 깔끔했다.
그리고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동욱은 현석의 등장과 동시에 안면 근육이 얼어붙은 것같이 움직임을 멈췄다. 왜 이런 타이밍에 나타나는 것인가라는 한탄 섞인 한숨을 내쉬면서 말이다.
아무튼 이러한 현석이 이곳에 온 이유는 동욱이 올린 보고서 내용 중에 현상이 게임에서 PK를 당했다는 항목이 있어서였다.
원래라면 사소한 일이었지만 상대는 바로 류현상이었다. 그의 행동 감시에 경찰까지 끼여 있는 마당에 행여나 현상이 이 일로 인하여 이상 행동을 보이거나 한다면 엄청난 골칫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이사님,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류현상이 죽었다는 소식을 보았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게, 영문을 모르는 한 단체가 류현상을 죽였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런 거라 앞으로도 접속을 할 때마다 계속해서 죽일 것 같습니다.”
“이런 망할 놈들. 그 많고 많은 PK 상대 중에 왜 하필 류현상이란 말이냐. 그냥 조용히 가면 될 것을. 아, 저들에게 쪽지는 보내 봤나?”
“당연히 보냈습니다. 그런데 답이 없는 걸로 보아 아마 저희들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PK가 금지 사안은 아닌데도 그러한 행동을 보이니, 억측일 수도 있겠지만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현수의 말에 현석이 머리를 매만지며 탄식했다. 점점 일이 복잡해질 조짐을 간파한 것이다.
“일단 청장님에게 연락은 안 온 건가?”
“네. 저도 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청장님께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아아, 행여나 류현상이 이상한 짓이라도 벌이면 끝장인데 말이야. 이제 어떡할 생각이야?”
“이, 일단은 그들의 플레이 파악에 주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사님.”
동욱의 변명이 이어졌지만 현석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 식으로 해서 뭐 얻을 수 있는 게 있겠나?”
“현수 씨의 말처럼 그들이 저희들에게 무언가 숨기는 게 있을 수도 있습니다. 비록 숨기는 것이 없을지라도 그들을 조사해 트집이라는 트집은 다 잡아내겠습니다.”
“뭐 그렇게만 된다면 좋네. 하지만 가능성이 낮다는 거지. 아무튼, 최선을 다해 보…….”
띠리링! 띠리링!
현석의 말이 끝나기 직전에 전화기 소리가 울려왔다. 동욱을 바라보던 현석은 중앙 모니터 근처에 놓여 있던 수화기를 집어 든 다음 귀에 가져갔다.
“여보세요?”
“아, 이 이사로군. 나 청장일세.”
“안녕하셨습니까, 청장님.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를 하셨는지?”
부하 직원들에게는 엄격한 상사였지만 청장과 같은 높은 사람들에게는 호랑이 앞에서 굽실거리는 여우와 같았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직접 관람(?)하게 된 KBT 일원들은 엄격하기로 소문난 현석의 저런 모습에 전혀 의외라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표정은 금세 바뀌고 말았다.
“이 이사, 도대체 플레이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건가?”
“플레이 관리라뇨?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뭘 모른다는 건가! 지금 류현상이 탈옥을 했단 말이네!”
“네?”
조마조마해하던 현석의 눈빛이 청장의 말 한마디로 경악에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