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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의 암살자 1권(19화)
8화 또 다른 전직 퀘스트(2)
“하아.”
고블린 킹이 시야에서 사라져 가자 레시온이 십 년을 감수했다는 표정으로 지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인벤토리에 포션이 없기 때문에 체력을 최대한 빨리 채우려면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 제일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체력의 대부분을 소진했지만 레시온은 혈투 끝에 난적인 고블린 킹을 쓰러트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한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하는 레시온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판이었다.
자리에 앉은 레시온은 천천히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바닥을 치려고 하던 체력이 점점 차올랐다.
심신을 안정시키며 문 앞에서 시간을 보내던 레시온은 휴식을 취한 지 1시간이 지나가 HP와 MP 전부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서 이번 퀘스트의 가장 중요한 열쇠 격 NPC인 노인을 만날 차례였다. 노인이 레시온에게 테스트를 할 내용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지만 노인이니만큼 아마 무난하게 가지 않을까 생각하는 레시온이었다.
문 앞으로 다가간 레시온은 주저하지 않고 문을 열어젖혔다. 요란한 마찰음이 일어나며 열린 문은 레시온에게 감추고 있던 내부의 세계를 보여 주었다.
광장보다는 작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규모를 자랑하는 별도의 공간이었다. 사방은 어두컴컴했고 빛 한 줄기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심지어 밑에 있는 발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어두운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끼이이익!
다시 한 번 요란한 마찰음이 들려오며 문이 저절로 닫혔다. 그리고 그 문은 허공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제 이 공간에 레시온 혼자만 남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주변에 있었던 양초에 불이 하나씩 켜지면서 순식간에 주변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뒤에서부터 시작된 불꽃은 원형의 모양으로 서로를 향해 나아가더니 잠시 후 하나로 합쳐졌다.
하나로 합쳐진 곳에는, 레시온이 찾던 노인 한 명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나이를 알 수 없는 외모를 가진 이 노인은 머리가 백발로 무성했고 수염 또한 흰색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기른 수염의 길이는 목선까지 이어지고 있어 엄청나게 늙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그의 전신에서 풍겨져 오는 포스가 그의 외형을 무색하게 할 정도였다.
밑에서 위로 노인을 바라보던 레시온도 노인의 비범함을 단번에 알아채고는 살짝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산 넘어 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생각은 거의 옳았다. 실제로 이 노인은 산 넘어 태산과도 같았다.
한편, 도인과 같은 포스를 풍기던 노인이 레시온에게 입을 열었다.
“그대가 바로 나의 가르침을 받으러 온 자인가?”
“전직이 가르침이 맞다면 나는 그대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온 것이 맞다.”
“말이 이상하군. 하지만 그대가 가르침을 받으러 온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 같군. 그대는 잘 모르고 있겠지만 나는 허울뿐인 제자는 받지 않는다. 엄선된 자들만이 나의 제자가 될 수 있지.”
“그 말은 즉 그대가 강하다는 소리로군. 나를 실망시키지 말도록.”
엄청난 포스를 풍기는 노인이 목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시온은 끝까지 기세를 굽히지 않고 노인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레시온의 장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레시온의 기백이 마음에 드는 듯 노인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허허, 그대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의문이나 최소한 그대를 실망시키진 않을 것이다.”
“그럼 내가 해야 할 일이 뭐지? 무언가 테스트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물론이네. 내 그대가 해야 될 일을 직접 눈으로 보여 주도록 하겠다.”
스팟!
레시온의 오른편 주변에서 작은 섬광이 발산하며 의문의 물체 세 개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는 배팅 머신과 비슷하게 생긴 것 같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것 같았다.
테스트에 왜 이것이 필요한지는 의문이지만 레시온은 그 답을 곧 알게 되었다.
“시험을 한다고 하더니만 무슨 기계 같은 걸 꺼냈나?”
“천 번이네.”
“천 번이라고?”
“저 기계, 나는 어보이드 머신 1호라 부르네. 아무튼 기계에서 나오는 공 1천 개를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하네. 때려서 앞으로 보내든가, 그대로 피해서 뒤로 보내든가는 자네의 몫이네. 하지만 맞는 개수가 50개를 넘어선 안 된다. 이것이 유일한 규칙일세.”
노인의 설명에 레시온의 시선이 어보이드 머신 1호에게 가기 시작했다. 저 기계는 일단 배팅 머신과 비슷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일반 야구 선수들이 쓰는 배팅 머신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차이가 있든 없든 레시온은 무조건 이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준비가 다 된 듯하니 5초 후에 시작하도록 하겠네. 준비 잘하게나.”
살짝 말투를 바꾼 노인이 어보이드 머신 1호 앞에 선 레시온을 바라보며 선전을 기원했다.
그리고 예고된 5초가 지나가고 레시온의 3단계 퀘스트가 시작되었다.
피웅! 피웅! 피웅!
공 세 개의 소리가 마치 총알을 발사하듯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방금 전 세 발을 신호탄으로 엄청난 기세로 2초마다 한 번 꼴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수리검을 오른손에 쥔 레시온은 날아오는 공을 사정없이 후려치거나 피했다. 제자리에 서서 최대한 움직임을 자제하는 모양새로 보니 후반의 체력 저하를 염두해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지금의 상황은 피하지 못하면 잡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본래 가지고 있는 마음을 그대로 믿으면서 착실하게 50개 실수 내로 피하면 되는 것이다.
덥석!
열심히 피하고 있던 레시온이 공 하나를 수리검으로 튕겨 낸 다음 잡아냈다. 그런 다음 앞으로 최대한 달려가면서 전방을 향하여 공을 던졌다.
제법 빠르게 날아간 공은 다음 순서로 날아오던 어보이드 머신 1호의 공을 튕겨 냈다. 이로써 4초의 시간이 비게 된 레시온은 섀도우 스텝을 이용하여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가면 갈수록 불리해진다는 사실을 레시온도 알고 있었지만 왜 앞으로 가려고 하는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철저한 계획하에 몸을 움직이는 레시온의 성격상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듯 보였다.
쿨 타임 1초를 포함하여 4초간 10m를 이동한 레시온은 다음 공이 아래로 발사되는 동안 최대한 앞으로 몸을 날리며 필사적으로 전진했다.
그러나 레시온에게 날아간 공 두 개가 다리에 적중하며 미스 두 개가 발생했다.
―공 두 개 맞으셨습니다. 앞으로 남은 숫자 48.
기계와 제법 가까운 곳에서 맞은 터라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났다. 그러나 레시온은 꿋꿋이 버티며 앞으로 전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다행히 다음번에 날아온 공 세 개를 잘 피해 낸 레시온은 앞으로 손을 뻗어 기계의 동체 부분을 잡았다.
이때 슬며시 미소를 지은 레시온은 발을 앞으로 이동시키며 기계의 뒤로 몸을 돌렸다.
피웅! 피웅! 피웅!
공 세 개가 그때쯤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러나 레시온은 그들의 뒤에 있는 상태. 맞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여유로운 방관자처럼 날아가는 공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지켜보던 노인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어보이드 머신 1호의 뒤로 간 레시온은 앞으로 발사되는 공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레시온이 그토록 앞으로 가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앞만 바라보며 날아가는 공을 원천적으로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지금의 레시온을 보면 알지 않는가. 앉아서 공을 피하는 그의 모습을 말이다.
위에서 레시온을 바라보던 노인도 그의 창의적인 플레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무나도 어이가 없는 플레이에 약간 공들여서 준비한 3단계가 어처구니없게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모니터를 통해서 지켜보고 있던 KBT 팀원들은 자신들이 계획한 역작 중 하나가 어이없게 작살나는 광경을 목격하며 충격에 휩싸였다.
공에 처참하게 맞으며 기진맥진할 레시온을 저마다 상상하고 있었건만 기계 뒤로 돌아가는 레시온을 보니 너무나도 어이가 없는 것이다.
“팀장님.”
“……나의 역작이.”
3단계 퀘스트가 동욱의 작품인 듯 동욱의 절망감이 여타 다른 팀원들보다 더 컸다.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하는 동욱의 모습에 팀원들이 안타까운 눈빛들로 바라보았다.
구상 시간 수시간. 목적은 단 하나, 레시온의 박살. 레시온의 탈옥으로 인하여 위기를 맞을 뻔했던 그들이 기획한 것들이었지만 이제 허공 속으로 날아갈 듯 보였다.
하지만 동욱은 포기를 하지 않았다.
“현수 씨, 저거 각도 좀 돌리게 세팅하면 안 됩니까?”
“각도를 자유자재로요?”
“네. 가능한가요?”
“가능하긴 합니다만 20분 정도 걸립니다. 그런데 그 전에 공은 다 날아갈 겁니다.”
절망적인 현수의 말에 동욱이 품었던 마지막 희망마저 날아가 버렸다. 결국 이번 3단계는 이렇게 내주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모니터 우측 하단에 위치한 날아간 공의 개수는 이제 400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수십 개는 맞았을 상황이었지만 기지를 발휘하여 그 수를 두 개로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여유로운 레시온의 얼굴을 바라보며 동욱은 한 방향으로만 발사하게 설정한 자신을 자책했다.
10여 분이 지나가고, 일전에 400개를 넘어섰던 공의 숫자는 10분 동안 1천 개에 육박해 갔다. 이제 남은 공의 개수는 40여 개. 다 맞는다고 해도 무조건 통과할 수 있었다.
잠시 후, 1천 개의 공이 모두 날아가자 레시온은 성공했다는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띠링! 3단계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노인이 건네주는 퀘스트를 클리어하시기 바랍니다.
휘릭!
메시지가 들려옴과 동시에 시야에서 사라진 노인이 어느새 레시온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아까부터 짓고 있던 그 여유로운 미소를 풀지 않은 채로 노인이 레시온에게 입을 열었다.
“대단한 기지로군. 한 방향으로만 날아가는 어보이드 머신 1호의 특성을 파악하여 테스트를 통과하다니 말이야.”
“솔직히 한 방향에만 있어서 긴가민가했지만 운이 좋았을 뿐이다.”
“어찌 되었건 테스트를 통과했으니 다음 퀘스트를 주도록 하겠네. 그러나 혹시 포기할 생각이 있는가?”
“포기할 생각은 없다만 나는 이미 직업을 얻은 상태. 듣기에 전직 퀘스트는 두 번을 하지 못한다고 하던데?”
레시온의 질문에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노인이 곧바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물론이네. 전사 전직 퀘스트를 받고 전직을 한 다음 도적 전직 퀘스트는 받을 수 없지. 하지만 예외가 하나 있다네. 바로 히든 클래스의 특성이라는 것인데, 예를 들어 전사로 전직을 한 다음이라도 전사와 비슷한 히든 클래스 퀘스트는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지.”
“그렇다면 그대가 주는 퀘스트도 나의 현재 직업인 도적과 관련이 있는 히든 클래스 퀘스트란 말인가?”
“바로 보았네. 대검의 암살자라는 직업이지.”
[대검의 암살자로의 전직 ― 전직 퀘스트]
·설명 : 재기의 성공을 위한 마지막 관문. 마나의 안식처에 있는 기인의 직업이기도 한 대검의 암살자. 무언가 매치가 잘 안 되는 대검과 도적의 조화를 이끌어 낸 직업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공짜가 없는 법. 노인이 요구한 조건을 충족하여 대검의 암살자로 거듭나라!
·발동 조건 : ‘다시 일어설 그날을 위하여’ 3단계 클리어
·성공 조건 : 어보이드 머신 2호 일곱 마리 사냥
·보상 : 대검의 암살자 전직. 노인에게 약소한 부탁을 할 수 있다(성공 확률 100%)
·난이도 : 무(특수 퀘스트라 난이도가 없습니다)
퀘스트의 조건은 어보이드 머신 2호 일곱 마리 사냥. 일전에 보았던 어보이드 머신 1호의 강화판인 듯 보였다. 일단 강화판이니 1호보다는 약하지 않을 터.
만약 1호의 엄청난 공격력에 탁월한 기동력까지 갖추고 있다면 고블린 킹을 죽일 때보다 더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물러설 땅이 없는 레시온은 자신 있는 표정을 지으며 승낙했다.
―띠링!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어보이드 머신 2호의 위력이 얼마나 될지는 몰랐지만 아마 움직일 수 없는 1호에 비하여 기동력도 있을 것이고 위력도 어느 정도 첨가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만 하면 잡을 수 있을 놈들이었다.
“멋도 모르고 승낙한 기백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기백이 아니라 자신감이다. 1호나 2호나 그게 그거일 것 같으니깐.”
“이보게. 내가 만든 역작들을 그렇게 욕하지는 말게나. 특히 어보이드 머신 2호는 내가 만들었지만 나 스스로도 엄청난 놈들이라고 생각하니.”
“알겠으니 퀘스트나 빨리 시작하도록.”
노인의 경고를 한 귀로 흘려버린 레시온은 퀘스트의 시작을 촉구했다. 이러한 태도가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노인은 레시온의 자신감에 다시 미소를 짓더니 이내 박수를 세 번 쳤다.
짝. 짝. 짝.
박수 소리가 세 번 들려오고 잠시 후, 레시온의 반대편 대지에서 이상한 물체들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나머지 그 물체가 바닥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은 착각을 하게끔 해 주었다.
실제로는 바닥 밑에 숨겨 놓았던 것이다.
대략 150cm 정도 되어 보이는 어보이드 머신 2호의 위용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매우 단단해 보이는 갑옷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지고 있는 어보이드 머신 2호의 모습에 노인이 또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이 미소는 KBT 팀원들의 얼굴에도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그들의 역작이라고 전해지는(?) 어보이드 머신 2호. 레시온의 기지에 고물이 되느냐, 팀원들의 숙원을 들어 줄 최강 병기가 되느냐. 그 결과는 앞으로 있을 레시온과 어보이드 머신 2호와의 싸움을 통해 나타날 것이다.
“자, 그럼 승부를 시작하도록 하게나. 자네가 무시한 나의 역작에게 기지를 발휘하여 살아남느냐, 아니면 허울과도 같은 자만심에 의하여 두들겨 맞느냐 말일세.”
“두고 봐라. 저런 고물단지 같은 것들을 단번에 처리해 줄 테니.”
수리검을 들고 전투 자세를 취한 레시온은 잠시 후 마지막으로 말을 이었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나에게 보이는 모든 것들은 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