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대검의 암살자 1권(24화)
10화 세상의 품속으로(3)
동욱이 보낸 메시지를 바라본 레시온은 주먹을 말아 쥐면서 전방을 바라보았다.
살려 달라는 비굴한 모습을 할 레이스트와 블라덱을 상상하는 듯, 레시온은 그 상태로 멍하니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오늘도 광렙이다!”
“오케이!”
한 파티가 파티원을 다 모은 듯 화이팅을 외치며 마을 밖으로 향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큰 목소리에 그들의 활기찬 모습을 살짝 바라보게 된 레시온은 긍정적으로 플레이하는 그들을 보고 큰 결정을 한 듯 남문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왁자지껄하는 마을의 대로를 걸어 내려간 레시온은 수분 후에 서문에 도착했고 그곳에는 당연히 레시온을 기다리고 있는 유저들이 서 있었다.
아마 동욱은 그들 중에 한 유저로 위장을 한 것 같았다. 일단 운영자가 이런 곳에 나타나면 엄청나게 시끄러워지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동욱도 시그널 온라인의 한 유저로서 변장을 하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외모는 전에 만났던 것과 동일했기 때문에 남문에 도착한 레시온은 곧바로 무리들 정가운데에 위치한 동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언가 얘기를 하고 있던 동욱은 다가오는 레시온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레시온 님, 역시 바로 오셨군요.”
“같이 가는 녀석들이 조금 많은 것 같군.”
“다다익선이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지요. 그리고 일전에 말씀드렸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불만이 아니라 들킬 수도 있지 않겠나?”
레시온의 말에 동욱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이번 일은 데스사이트의 본부로 가기 전까지 철저하게 비밀이 될 겁니다. 경찰에서도 도와주니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짜바리 놈들이 개입했나?”
“지금 게임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들을 잡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단 대략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이곳에서 그들을 붙잡는 동안 경찰 분들과 저희 회사원들이 그들의 접속 장소를 급습할 겁니다.”
“호오, 그거 꽤 좋은 방법이로군. 그런 식으로 양면 작전을 쓸 줄은 몰랐다.”
“레시온 님은 과거의 일 때문에 경찰을 증오할지도 모르지만 저와 같은 선량한 시민들은 경찰을 전폭적으로 신뢰합니다. 일단 이러한 일은 경찰 말고는 맡길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동욱의 말에 레시온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짜바리 놈들이 뭐가 좋다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녀석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만한 대목이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구체적인 작전 같은 건 가면서 설명하겠습니다.
“알겠다. 그리고 잘해 보도록 하지. 네 녀석과 나의 미래를 위해서 말이야.”
“후후, 다른 것들은 몰라도 일에 대한 기백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요. 자, 가시죠.”
무언가 미묘한 감정을 주고받은 동욱과 레시온은 대화를 마치고 곧바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일단 데스사이트의 위치를 알고 있는 동욱이 제일 선두에 서고 레시온과 20여 명의 유저들이 앞서 나가는 동욱을 뒤따랐다.
그리고 이것이, 화려한 복수의 시작이었다.
11화 다른 사람 같은 이유(1-1)
탁 트인 하늘 아래에 일행들이 강변을 따라 가로지르고 있었다. 바로 레시온 일행들이었다.
서문을 나선 그들은 곧바로 서북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계속해서 걸어갔다. 2시간 후, 그들의 앞에 나타난 강을 건너고 다시 강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를 기하여 4시간이 흐른 때였다.
그리고 조금 전에 시작한 동욱의 얘기를 들은 레시온은 현재까지 이러한 내용들을 알 수 있었다.
일단 데스사이트의 본거지는 의외의 장소에 있었다. 사람을 숨기려면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야 되는 것처럼 그들의 본거지는 아벨리스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그들은 외부와 이어지는 워프게이트를 이용하여 출입을 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지만 워프게이트를 구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아마 그들은 유저들에게 빼앗은 돈을 긁어모아 워프게이트를 구입한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이동하는 장소는 아벨리스크 남쪽에 위치한 동굴이었다. 동굴로 워프한 그들은 여타 유저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 사냥을 하며 레벨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팀원들의 숫자는 대략 200여 명. 그들을 이끌고 있는 마스터의 레벨은 35. 직업은 전사였다. 하르켈이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는 그 유저가 데스사이트 창립 이래로 마스터 노릇을 했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일단 저희들의 목적은 그들의 생포입니다. 물론 레시온 님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그들을 마음껏 때릴 수 있는 기회도 제공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찰 분들이 그들을 잡기 전까지에 한해서 말입니다.”
“최대한 들어가서 그 빌어먹을 놈들을 곱씹을 것이다. 그런데 아벨리스크에 있다면 엄청난 혼잡이 있을 것 같은데 그건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지?”
“아벨리스크는 레시온 님이 상상하시는 이상으로 큽니다. 골목에 있는 건물 하나가 습격 받은 사건 정도는 곧바로 새어 나가지 않을 겁니다. 천우신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본부가 유저들의 발길이 드문 골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동욱의 말에 레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렇게 걷기만 할 건가? 도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지?”
“4시간 정도 걸었으니 앞으로 2시간만 더 걸으시면 아벨리스크가 나올 겁니다.”
“그 잘난 워프는 왜 안 쓰는 거지? 그것만 있으면 한 방에 가지 않나?”
“미끼 활용을 위해서지요.”
동욱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앞쪽에서 한 무리들이 걸어오는 광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대략 50여 명의 규모로 보이는 그들은 무언가 예상을 한 듯한 걸음걸이로 레시온 일행들에게 다가왔다.
바로 동욱이 미끼라고 표현한 이들, 데스사이트였다.
그들이 걸어오는 광경을 목격한 레시온은 곧바로 동욱이 했던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수적으로 불리하기 때문에 이렇게 아벨리스크까지 걸어가면서 저들이 보내는 유저들을 해치울 생각인 것이다.
“이봐, 그런데 우리가 저놈들을 죽이면 패널티를 받지 않나?”
“레시온 님이 로그아웃하고 이번 작전을 위해 한 가지 업데이트를 한 것이 있습니다. 서로가 싸울 의사가 있는 한에서 PK가 허가될 수 있게끔요.”
“그런 건 저번에 알려 주면 안 되나? 서문에 오기 전에 놈들이랑 마주쳤는데 패널티 때문에 죽이지도 못하고 제압했단 말이다.”
“PK는 좋지 않은 것이지요. 그런 걸 알려 주면 혹시 악용하실 것 같아서 말씀을 드리지 않으셨습니다.”
“같은 배를 탄 사람에게 그런 것 하나도 말해 주지 못하나?”
레시온의 항의에 동욱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명심하십시요. 레시온 님은 전과 14범의 범죄좌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서 전과자를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레시온 님이 우리와 경찰 분들을 못 믿는 것처럼 저희도 PK에 관련된 사안만큼은 레시온 님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작전에서는 상호간의 믿음이 중요하다. 네놈은 그거도 알지 못하는가?”
“물론 이러한 단체 행동에는 상호간의 믿음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국가와의 약속을 14번이나 어기신 분의 말을 쉽사리 믿는 바보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솔직히 레시온 님께 전과 14범이라는 것은 무덤까지 가져갈 꼬리표입니다.”
“지금 나를 훈계하는 건가?”
“훈계라고도 볼 수 있겠군요. 하지만 악의는 없습니다. 믿으실진 모르겠지만. 그럼 일단은 저분들부터 제압하고 보지요.”
동욱이 데스사이트 팀원들을 가리키며 말하자 무언가 할 말이 있던 레시온이 입을 다물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들 사이에 대화가 오고 가는 동안 데스사이트의 팀원들의 위치는 일행들의 지척까지 당도해 있었다. 아득하게 보이던 그들이 어떻게 빠르게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걷는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그 빠른 걸음으로 돈에 굶주려 있는 하이에나처럼 단숨에 달려온 그들이 일행들과의 거리를 10m 정도 유지한 다음 일행들을 향해 시선을 날려 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찾아든 정적.
그러나 잠시 후, 그 정적을 깨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시나?”
“잠시 아벨리스크에 볼일이 있어서 가는 중입니다.”
“보아하니 일전에 우리에게 많이 당했던 놈들인데 말이야. 수상하군.”
“일전에 당한 건 맞지만 당신들을 칠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워프게이트를 통해서 왔을 겁니다. 지금은 단순히 아벨리스크에 볼일이 있어서 가는 것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동욱의 말에 그들을 이끌고 있는 제온이라는 유저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알겠다. 하지만 또다시 너희들은 죽어야 돼. 우리에게 돈을 뱉어야 된단 말이다. 하하.”
“웃기는 놈이로군. 갓 전직을 한 양아치 놈들만 데리고 온 주제에 입만 살았나.”
“뭐라고!”
실실 일행들을 비웃던 제온이 레시온의 말 한마디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레시온의 기백이 대단하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죽을 생각을 하니 헛말이 나오나?”
“그럼 양아치를 양아치라고 하지 뭐라고 하는지 궁금하군.”
“저놈을 특히 중점적으로 죽여 주시기 바랍니다.”
“대장 꼬락서니가 볼만하군. 호랑이 허세를 믿는 여우 꼴이라.”
딴청을 피우며 슬며시 넘어가려던 제온이 레시온의 비유에 화를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실제로는 딱딱 맞아떨어지는 말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놀리는 비아냥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반면에 일행들의 사기는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레시온의 입담 하나로 단숨에 상대편 대장을 굴복시키자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통쾌하다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돌격 앞으로! 저들의 돈을 쟁취하자!”
레시온의 입담에 곧바로 본색을 드러낸 그들이 일행들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에 일행들도 저마다 무기를 뽑아 들기 시작하자 그들을 이끄는 동욱에게 메시지가 올라왔다.
―띠링! 양측이 전투의 의사가 있습니다. 전투를 진행하시겠습니까?
―현재 상대측은 승낙한 상태입니다.
이때 저들을 향해 달려가다가 멈춘 동욱은 올라오는 메시지에 곧바로 대답을 해 주었다. 싸우겠다고 말이다.
―띠링! 전투가 승인되었습니다. 전투가 끝날 때까지는 근방 100m에서 유저를 죽이셔도 무방합니다.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순간이었다. 승낙을 한 동욱이 일행들에게 전체쪽지를 날리자 그것을 본 그들은 PK를 해도 상관이 없다는 설명에 주먹을 말아 쥐며 팀원들에게 달려들었다.
제일 선두에 선 레시온도 PK가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접한 직후 한 팀원의 몸을 참마격으로 양분시켰다.
깔끔하게 전투의 시작을 끊은 레시온은 곧바로 날아드는 3개의 검을 방어한 다음 비영승보로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다가온 레시온은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부우우웅!
바람을 가르는 대검의 소리가 들려오며 단숨에 두 명의 유저가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레시온을 공격하려던 나머지 한 명의 유저는 레시온의 뒤에서 날아드는 화살에 맞아 그대로 주저앉았다.
고통에 괴로워하는 그 유저의 목숨까지 가져간 레시온은 모처럼의 살인 행각에 흥분감이 솟구쳤다. 살인을 하면 맨날 경찰들이 자신들을 쫓아왔기 때문에 마음 놓고 살인을 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미 4명의 유저들을 직접 죽였지만 자신을 쫓아오는 경찰도, 시민들도 없었다. 이곳에서는 죽임이 정석이었다. 이 휘황찬란한 중세시대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게임 속에서 살인을 많이 함으로써 살인에 대한 희열감을 죽여 보자는 심산에서 변호사 은성이 자신에게 가상 현실을 권했다는 이유까지는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모르는 것이 당연할지도 몰랐다.
“힐링!”
“힐링!”
한편 뒤에서는 3명의 성직자가 부상자들을 향해 힐링을 시전하고 있었다. 데스사이트에 비해 일행들이 유리한 첫 번째 사안, 바로 성직자의 유무였다.
데스사이트는 철저하게 전투 직업을 가지고 있는 유저들만 선발했기 때문에 성직자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성직자의 존재는 전투가 장기전으로 가면 갈수록 일행들에게 호재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젠장맞을. 저놈의 성직자들이 다 죽인 거 다 살리네. 뭣들 하느냐! 성직자 놈들을 집중 공격하라!”
“성직자 유저를 공격하라!”
제온의 말에 데스사이트 팀원들이 성직자 유저들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을 지키는 도적유저들과 궁수유저들이 그런 팀원들을 방관할 리가 없었다.
“성직자 유저 분들을 보호하라!”
“무조건 막아라!”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복수라는 단어로 투합한 그들이 벌 떼같이 몰려오는 팀원들의 공격 앞에서 필사적으로 막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승세는 기울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