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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거괴동 1권(12화)
第四章 무림전설(武林傳說) ― 네놈의 제자가 천재면 내 제자는 천외천재(天外天才)다(1)
“으음, 여기가 어디지?”
침상에서 장소연이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주위에서는 약초 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순간 아까 사건이 장소연의 뇌리를 스쳤다.
단순한 노인으로 보이던 자가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고수라는 것을 알고 정신을 잃은 것까지 기억이 났다.
“정말 그 노인께서 칠보권왕이라니…….”
칠보권왕(七步拳王), 사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권의 고수였다. 사천에서 난리 치던 쌍룡희마(雙龍稀魔)를 단신으로 제압하며 화려한 등장을 알렸던 칠보권왕은, 절정의 권법으로 사천을 지배하다시피 했다.
칠보권왕이 일곱 번을 걸으면 아무도 대적할 자가 없다 하여 그러한 명호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칠보권왕이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는 대략 이십 년 전. 서서히 전설로 회자되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홀로 나타나, 홀로 사라진 그는 종적이 묘하여 죽었다는 둥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은거를 했다는 둥 많은 이야기가 구설수에 올랐었다.
그런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절정의 고수가 이런 숲 속에 살고 있는 것이었다.
몸을 일으킨 장소연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침상에서 내려가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독고천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장소연을 훑으며 물어왔다.
“괜찮소?”
“괜찮아요. 잠시 놀랐어요. 그분이 정말 칠보권왕 맞으신 가요?”
확인하듯 되묻자 독고천이 어깨를 들썩였다.
“내 알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알고 있소.”
독고천의 별다른 없는 반응에 장소연이 놀라워했다.
권으로 칠보권왕을 능가하는 자는 많았지만 칠보권왕은 특히 여인들에게 유명했다.
칠보권왕의 외모는 가히 옥면(玉面)이라 칭한다고 해도 부족하다고 알려져 왔었기 때문이다.
잠시 칠보권왕의 소문과 칠보권왕의 현재 모습을 비교해 보던 장소연이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옥면까진 아니던데…….’
역시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다.
고개를 내저으며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짓는 장소연을 지켜보다가 독고천이 물었다.
“수련을 갈 예정인데, 여기에 계시겠소?”
“가고 싶은데, 될까요?”
“안 될 이유가 있소?”
독고천이 가볍게 웃으며 말하자 장소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무림인이란 자신의 수련을 누가 보는 것을 꺼려 했다.
자신의 절기가 노출되는 것만큼 무림에서의 명줄이 짧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고천이 흔쾌히 응하니 장소연이 잠시 의문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장소연은 뛰어난 무위를 자랑하는 독고천의 수련 방법이 궁금했다. 나이는 자신과 비슷해 보였지만 무위는 차원이 달랐다.
자신이 쩔쩔매는 자들을 단 한 수로 제압해 버린 것이었다.
급히 침상에서 내려온 장소연이 앞서 가는 독고천을 뒤쫓았다. 꽤나 빠른 걸음걸이를 자랑하는 독고천을 쫓으며 장소연이 작게 숨을 헐떡였다.
독고천이 도착한 곳은 큰 공터였다.
흙이 잘 정돈되어 있는 공터였는데 탁 트인 공간에 가슴이 펑하고 뚫린 것만 같았다.
장소연은 꽤나 빼어난 경치에 주위를 훑어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독고천과 장소연이 공터에 도착하자, 청의 중년인이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독고천이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인사했다.
“선배, 저 왔습니다.”
“그래, 그런데……?!”
멍하니 손을 흔들던 당하천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독고천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옆에 있는 장소연을 몇 번 흘겨보더니 독고천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독촉하듯 말했다.
“저분은 누구시냐. 빨리 말하지 못할까.”
“어쩌다 제가 구해 드린 분입니다. 장소연 소저입니다.”
독고천이 장소연을 가리키며 소개하자 장소연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당하천이 탄식을 토해 내며 말했다.
“오오, 장소연 소저시군요. 전 당하천이라고 하오. 참으로 아름다우시오.”
당하천의 능글스런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웃던 장소연이 눈이 경악에 물든 채 기겁하며 물었다.
“당하천?! 당문(唐門)의 당하천 선배님이요?”
“그렇소.”
당하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소연이 뒷덜미를 움켜쥐며 신음성을 터트렸다.
당문세가는 독과 암기가 특기인 문파로서 오대세가(五大世家) 중 하나이다.
독과 암기를 쓰는 만큼 무림인들의 경멸 어린 시선이 있었지만, 그것을 바꾸어 놓은 것이 바로 당하천이었다.
당하천은 암기를 던지기 전에 어디로 던질지를 말한다. 그런데도 그 누구도 그의 암기를 피한 자는 없었고 당하천의 무위는 널리 퍼졌다.
심지어 당하천이 암기를 던지면, 그냥 삶을 포기하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당하천의 암기는 유명했다.
절대암왕(絶對暗王), 당하천이 암기 하나로 무림에 군림한 후 얻은 별호였다.
잠시 뒷덜미를 움켜쥐며 놀랐던 장소연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찌된 것이 이놈의 동네가 절세의 고수가 모래알처럼 많았다.
아무리 무림에 기인이사가 모래알처럼 많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정도를 넘었기에 장소연은 기가 찰 정도였다.
“무슨 이곳에 사시는 분들은 다 고수네요.”
자신의 상식과 정반대되는 상황에 장소연이 짜증을 냈다. 원래 자신이 알고 있던 상식이 맞지 않다면 사람은 당황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오히려 장소연은 화가 나는지 씩씩거렸다.
참으로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갑자기 장소연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당하천 옆에 앉아 있는 중년인을 발견했다.
중년인의 허리춤에는 짤막한 검이 매달려 있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졸고 있었다.
장소연이 당하천 옆에 앉아 있는 자를 거칠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치듯 말했다.
“그럼 저분은 뭐 쾌검제(快劍帝)라도 되시나요?”
당하천 옆에서 앉아서 졸고 있던 이포후가 깜짝 놀라더니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맞는데?”
“정말이요?”
“그래, 소싯적에 그렇게 불렸었지. 그때 얼마나 많은 소녀들이 나를 쫓아왔는지…….”
그러나 뒷말은 상관없다는 듯이 장소연이 무시해 버렸다. 그러자 이포후는 그런 상황에 익숙한 듯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하고 숙일 뿐이었다.
워낙 쟁쟁한 고수들이 눈앞에 서 있어서 그런지 장소연은 제풀에 지쳐 버렸다.
고수도 가끔 봐야 신기하고 경외감이 솟지, 계속 보다 보면 지겨울 뿐이다.
장소연이 딱 그 꼴이었다.
처음에는 혼절도 해 보고, 경악도 했지만 이제는 검신(劍神)이 나타난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만 같았다.
정신적 공황에 빠진 장소연은 비틀거리며 근처 바위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감정이 실리지 않은 눈동자로 주위를 훑어볼 뿐이었다.
독고천은 장소연을 지켜보다가 어깨를 들썩이더니, 당하천에게 정중히 말했다.
“오늘도 부탁드립니다.”
“그래, 가 보자.”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당하천이 뒤로 몸을 날렸다.
표홀한 움직임은 야생 동물을 연상케 했다.
뒤로 몸을 날린 당하천이 품속에서 손가락만 한 암기를 꺼내더니 씨익 하고 웃었다. 그러자 독고천이 침을 삼켰다.
“자, 오늘부터 새로운 수련이다. 잘 버텨 봐라.”
독고천이 고개를 까닥이자, 당하천이 들고 있던 암기를 갑작스럽게 던지며 외쳤다.
“왼쪽 다리!”
가공할 속도로 암기가 허공을 갈랐다. 독고천은 침착하게 보법을 밟으며 왼쪽 다리를 피했다. 그런데.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암기가 오른쪽 다리를 스쳐 지나갔다. 찰과상에 불과했지만 독고천은 당황하며 외쳤다.
“외, 왼쪽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게 새로운 수련이다. 굳이 이름을 짓자면 강태공조어대(姜太工釣魚臺)겠구나. 자, 미끼로 어리석은 독고어(獨孤魚)를 낚아 볼까나.”
흥얼거리며 당하천이 암기를 만지작거리자 독고천이 인상을 찌푸렸다. 던질 위치를 말해 주어도 완벽히 피하지 못할 판에, 던질 위치를 속인다니.
완전 죽으라는 소리가 아닌가.
“자, 간다. 오른쪽 팔!”
당하천이 무시하듯 흥얼거리며 암기를 내던졌다.
독고천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현란하게 움직였다. 그러한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장소연이 고개를 내저었다. 도대체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추측조차 못하는 중이었다.
혼자서 고개를 내저으며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가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졌다.
장소연은 멍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리고 쩍 하고 입을 벌렸다.
한 소년이 그녀의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소년에게 고정한 채 입을 벌릴 뿐이었다.
순간 강렬한 햇빛이 장소연과 소년을 감쌌고, 장소연에게는 축복하는 새소리가 들리는 환청이 들렸다.
아름다웠다.
마치 따스한 봄이 되어 유일하게 핀 하나의 꽃처럼 아름다웠고, 얼음 덩어리처럼 도도한 표정이 소년의 얼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도저히 남자로서 가질 수 없는 얼굴을 소년은 지니고 있었다.
또한 언뜻 흘리는 냉기조차 그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고 뺨을 붉게 물들게 했다.
소년의 이름은 한원기(瀚元起).
장소연의 이상형이었다.
순간 장소연은 저도 모르게 말을 걸 뻔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점창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다.
장소연은 거칠게 고개를 내저으며 점창의 모습을 지웠다.
만약 점창의 신물을 들고 오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심지어 그녀의 아버지조차 그녀를 찾지 않을 것이었다. 사실상 점창은 용문의 손아귀에 넘어간 상태였다.
그녀의 아버지마저 용문에게 빌붙어 사는 처지로 바뀐 것이다.
비록 자신의 문파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하여 독고천에게 거짓말과 거짓 반응을 했지만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신과 함께 식사를 해 오고, 수련을 해 왔던 식솔들이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용문에 달라붙는 모습이 그녀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녀는 다시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더 이상 점창을 살릴 방법은 없었다. 결국 그녀는 도망치면서 점창을 포기한 상태였던 것이다.
가뜩이나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한낱 이상형을 찾았다는 이유로 헤벌쭉거리는 장소연, 자신에게 참을 수 없었다.
그러자 갑자기 장소연의 망상 속에서 흑의를 입고 있는 동자가 연기와 함께 나타났다.
‘어차피 끝난 거, 다 포기해요. 이제 지칠 대로 지쳤잖아요. 제대로 된 남자 한 명 낚아서 인생 펴자고요.’
설득력 있는 말에 장소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백의를 입고 있는 동자가 연기와 함께 나타났다.
‘무슨 소리예요! 아직 점창은 당신을 원하고 있어요. 아직 포기할 때가 아니에요.’
백의 동자의 설득에 장소연은 또다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순간 흑의 동자가 다시 말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장소연이 거칠게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의 욕심이 만들어 낸 망상이 이젠 자신을 망치려 했다.
심마(心魔)라고 하던가.
그것이 자신을 덮칠 것만 같았다.
고개를 거칠게 내젓던 장소연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자 한층 정신이 맑아지는 듯했다.
이제는 흔들리지 않고 한 발자국씩 원하는 곳으로 내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넌 누구냐?”
나직하고도 건방진 목소리에 장소연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게 변했다. 장소연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는데 마치 목각 인형같이 기괴하게 돌아갔다.
“저, 저는…….”
“새로 왔나?”
“자, 장소연이라고 해요.”
뭐가 그리 창피한지 고개를 푹하고 숙이며 장소연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자 한원기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고개를 숙이며 뭐라 중얼거리던 장소연이 조심스레 말했다.
“이곳에 사시나 봐요?”
“그래.”
짤막한 대꾸였지만 장소연은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얼마나 좋은지 귀에서 연기가 나오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혼자 몸을 배배 꼬던 장소연이 한원기를 슬쩍 흘겨보며 되물었다.
“실례하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스물여덟.”
장소연의 나이는 스무 살이었다.
아직 젊고 화창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숙녀였다.
그러나 그녀에게 여덟 살의 나이 차는 단지 장애물에 불과해져 버린 것일까.
무뚝뚝하고도 한편으로는 거만한 말투였지만 장소연은 뭐가 그리 좋은지 히죽거렸다. 그때였다.
장소연의 행복한 시간을 방해하는 자가 있었으니. 그 주인공은 독고천이었다.
“선배님, 오셨습니까?”
“그래.”
한원기가 다가오는 독고천을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독고천의 몸에는 찰과상이 즐비했지만 독고천의 표정은 밝았다.
독고천은 서서히 무공을 즐기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것이 바로 독고천의 신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장소연 소저와 아는 사이십니까?”
다가온 독고천이 장소연과 한원기를 한 번씩 보더니 물었다. 그러자 한원기가 고개를 내저었다.
“모른다.”
“그럼 제가 소개해 드리죠. 이분은 장소연 소저입니다.”
얼굴이 시뻘게진 상태로 뭐라 중얼거리던 장소연이 애써 표정을 밝게 하며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자 독고천이 장소연에게 시선을 주며 한원기를 가리키더니 말했다.
“이분은 한원기 선배님이십니다.”
“반갑다.”
장소연은 몸을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소연을 잠시 쳐다보고 있던 한원기가 독고천을 툭하고 치더니 앞장섰다.
“시작하자.”
“예.”
독고천의 비무 수련은 드디어 마지막을 남겨 두고 있었다.
원래 하루씩마다 선배들과 번갈아 가면서 수련을 해 왔는데, 오늘은 당하천의 차례였던 것이다.
이포후는 심심했는지 아니면 푸줏간에 파리가 날리는지 그저 구경하러 나온 것이었다.
한원기는 예외였다. 직접 독고천의 수련을 돕겠다고 나선 것이 바로 한원기였다.
비무 수련 중에서 독고천에게는 한원기가 가장 편했다. 우선 꽤나 친절하게 요점만을 말해 주었고 비무할 맛이 나기 때문이다.
물론 한원기가 봐주는 감도 없지는 않지만 선배들 중 가장 비슷한 무공의 소유자가 바로 한원기였다.
그래서인지 한원기의 뒤를 쫓는 독고천의 입가에는 웃음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아직 안 끝났군.”
갑자기 서늘한 목소리가 공터에 울리며 독고천의 행복을 깨부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