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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의 대한제국 1(5화)
3장 여기는 부산(釜山)(2)
“…….”
“거기 진지 한가운데 나뭇잎으로 덮어서 숨은 세 사람. 천천히 위장 풀고 나온다. 부산!”
재차 재촉을 하자 아무것도 없이 그저 낙엽들이 덮여만 있을 뿐인 바닥에서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최 해병님, 그러니까 짱 박혀 봤자 들킨다고 했잖습니까. 이글아이 이 해병이지 말입니다. 특전사도 아니고 이게 뭔 헛짓입니까. 아, 갈매기. 쏘지 마, 이 해병. 1소대 전 해병이야. 근데 보통은 진지에 접근하는 자를 향해서 경계 근무를 서는 사람이 암구호를 대는 것 아니냐?”
“자잘한 건 신경 쓰지 말고 복귀해 인마. 통신선 두 다발 들고 왔으니까 선은 네가 깔아. 근데 왜 다들 매복하고 있었냐?”
전 일병과 이 일병은 서로가 잘 아는 사이인 듯했다.
“그야 최 해병님이…….”
땅속에서 기어 나온 최 병장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전 일병의 말을 가로막았다.
“야, 2소대.”
“해병. 이. 익. 한.”
“해병. 박두식.”
“니들이 이글아이 이 해병과 FD 박 해병이냐?”
“해병 박두식. 이익한 해병은 맞습니다만, FD는 뭡니까?”
“네놈 별명도 모르냐? 포레스트 디스트로이어 박두식 아냐?”
“아, 맞습니다.”
“NGO에서 네놈 잡아 족치려고 벼르고 있으니 조심해.”
상당히 호전적인 눈빛이 최 병장의 눈에서 나오고 있었다.
“NGO는 또 뭡니까?”
“박 해뱀. 원래 NGO는 국제 비정부 기구의 약자로 환경, 인권 등 관련 활동을 전 세계적으로 하는 기관입니다만, 1소대 별명도 NGO임다.”
이 일병은 언제나 그렇듯이 박 상병의 가려운 곳을 긁어 줄줄 아는 존재였고, 이번에도 명확하게 그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하지만 박 상병은 상황을 그다지 따지질 않았다. 어차피 무슨 일이 발생하면 도망가면 장땡이고, 여차하면 자신의 소대원들이 버텨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2소대는 1소대보다 평균 계급이 높았다. 1소대를 골탕 먹여 줬다는 소식이 병장들 귀에 들어가면 좋아하면 좋아했지 싫어하진 않을 것이다.
“아, 그 노 갓 원. 뭐 하나 가진 거 없는 1소대?”
별로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박 상병은 자연스럽게 상대방을 내리깔아 버리는 문제성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온리의 1소대다. 자연과 동화되어 적을 기습하고 타격을 입히는 것이 1소대다, 이놈아! 자연 파괴의 주범인 네놈을 우리 1소대에서 가만둘 것 같아?”
“에…… 그러니까 땅 파고 그 밑에 들어가 있던 것도 자연과 동화되기 위한 훈련 중의 하나였습니까?”
“당연하지. 그리고 네놈을 엿 먹이기 위한 매복이기도 했다.”
“그건 어렵습니다. 제 후임인 이글아이 이 해병이 있는데 엘프라 할지라도 이 해병한테는 들킬 겁니다.”
자신만만한 모습. 박 상병은 상대의 계급에도 상관없다는 듯이 자신만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는 숲 속. 숲 속에서 자신이 도망치고자 마음먹으면 따라잡을 존재는 부대 내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 상병은 여차하면 도망칠 궁리였지만, 이 일병은 그런 생각은 꿈에도 못 꾸고 있었고, 라이벌 1소대에 통쾌한 일격을 날려 주는 박 상병의 모습이 그저 거대해 보일 뿐이었다.
“어찌 되었든. 네놈들 2소대는 반드시 박살 내 주마. 네놈들의 만행을 만천하에 알려서 철저히 뭉개 주마!”
그리고 진지 구축 임무로 먼저 와 있던 1소대는 박 상병이 만들어 놓은 길을 넓히면서 줄지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1소대가 사라지자 박 상병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우리 어떤 짓을 저질렀기에 저리도 원망을 사고 있냐?”
“모르십니까, 박 해뱀? 1소대에서 자연식으로 키운다고 전복이랑 해삼 종자 뿌려 놨던 거, 좀 컸다 싶을 때 우리 2소대가 잠수 훈련한다고 들어가서 싹 다 건져 올려 먹었잖습니까.”
“아, 그 김 해병 생일 파티 때 안줏거리 건져 올린 거? 1소대 거였냐?”
“그뿐입니까? 박 해뱀 순찰 돌 때마다 부대 내에 존재하는 계절 열매들 싹쓸이하잖습니까?”
“그야 야간 순찰의 묘미 아니겠냐. 인스턴트 식이나 군용 건빵 같은 거 먹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네놈이랑 같이 다니면 잘 찾아내니까, 너도 같이 먹었잖냐.”
“예. 알고 보니 1소대가 곳곳에 숨겨 놓은 텃밭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공교롭게도 박 해뱀과 제가 야간 순찰을 돌고 나면, 다음날 1소대는 발칵 뒤집혀지던데 말입니다.”
“부대 내에 텃밭 만들어도 된다는 허가 있냐? 내 기억으로는 없는데.”
“물론 없습니다. 그래서 몰래 키우던 것이고, 소대 내에서는 난리가 나도 다른 곳에는 안 알려진 것이죠.”
“근데 너는 어떻게 그리 잘 아냐?”
“제 동기가 몇 명인데 말입니다.”
“응?”
“제 동기가 우리 중대에만 10명이 넘습니다. 각 소대별로 한두 명씩은 다 있슴다. 동기들이 이야기해 주는데 모를 리 있겠습니까?”
“오호. 은근히 정보 수집 능력도 상당하군. 하하하. 그건 그렇고 빨리 지통실 연락하고 한 대 때우자고. 길 뚫느라 중노동 좀 했으니까.”
“알겠슴다. 통신 보안. 갈매기 하나. 갈매기 하나…….”
한 대 때우자는 말에는 재깍 말을 잘 듣는 이 일병이었다. 연초가 없다면 이들의 행복은 아마 멀리멀리 날아가고 없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이 산 밑에서 볼 땐 완전 솥뚜껑처럼 생겼던데.”
― 치치직. 여긴 둥지. 갈매기 하나 뭔가?
단방향 통신 방식으로 인해 말을 할 때마다 전기적 접촉에 의한 잡음이 치직거리면서 들려왔다.
“포인트 베타 초소에 도착하였기에 보고합니다.”
― 치직. 출발 10분 만에 도착했단 말인가? 자네 누군가?
“갈매기 하나. 해병대대 2대대 1중대 2소대 통신병 일병. 이. 익. 한. 해병입니다.”
― 치지직. 청해 함대 사령관 김충렬 준장일세. 같이 근무 서는 사병은 누군가?
놀랍게도 무전 저편에서는 하늘과도 같은 함대사령관이 무전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느긋하게 한 대 때울 준비를 하던 박 상병은 화들짝 놀라며 무전기를 빼앗아 들었다.
“필! 승! 상병. 박. 두. 식.”
그리고 잠시 동안 응답이 없다가 다시 무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치직. 오호. 자네들이 그 유명하다는 2대대 명콤비인가? 2대대장 설명으로는 10분 만에 도착했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군. 역시 귀신 잡는 해병대야. 잠깐 휴식을 취하도록 하고, 측량할 애들 올려 보낼 테니 측량이 끝나는 대로 같이 복귀하도록 하게. 이상.
“필. 승. 알겠습니다.”
무전을 마친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령관님한테 칭찬받은 거지?”
“확실함다, 박 해뱀. 잘하면 포상 휴가 떨어질지도 모르겠는데 말입니다?”
“그…… 그렇겠지?”
“일단 부대 복귀해야지 휴가를 받지 말입니다.”
“그래. 부대 복귀하면…… 응?”
“왜 그러십니까, 박 해뱀?”
“야 임마! 여기 지구가 아니라고! 달 두 개 떠 있는 거 봤잖아! 부대 복귀는 어떻게 하란 거냐? 그리고 짱깨 놈들이랑 전쟁은 어쩌고? 아악! 내 휴가아∼!”
“휴우. 박 해뱀. 그게 문제가 아니지 말입니다.”
“포상 휴가아∼∼∼∼∼.”
군인이 되면 다들 멍청해진다는 속설이 있다.
비록 SKY 출신의 수재 혹은 천재라고 불리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군대에 들어가면 보통 사람이나 다를 바 없는 바보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짬밥이 높으면 높을수록 바보 수치는 높아진다고 한다.
박 상병은 당장 어떻게 돌아갈지에 대한 걱정보다 포상 휴가를 못 받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고 있었다.
이 일병은 그런 박 상병의 모습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 * *
상륙부대는 진지 구축과 더불어 전략적 요충지 확보가 최우선시되었다. 물론 막아서는 적이 없었기에 작전은 개시 두 시간 만에 완료되었다. 뒤이어 주변 탐색과 지형을 파악하는 것이 이어졌고, 지형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측량 기술이 있는 병력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또한 이곳 원주민들과의 접촉도 필요했다. 당분간은 어떻게든 버텨 낼지 모르겠지만, 보급이 없는 이상에는 물자의 현지 조달이 필수 불가결이었기 때문이다.
가급적 원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지휘부로서는 당연한 바람이었고, 가장 가까운 마을부터 시작하여 접촉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부대의 재편성이 이루어졌다. 이곳은 기존과는 다르다는 판단이 내려졌기에, 적과 조우하였을 때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편성이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인원의 부족과 보급이 없다는 점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효과적인 전투를 위한 인원이 움직이는 데는 그만큼의 물자가 필요한 것이지만, 주된 임무가 수색과 접촉으로 바뀐 이상에는 대단위의 인원이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첩보에 따르면 이곳 주민들의 문명 수준은 수세기 이상 뒤떨어진 것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에 과도한 화력의 집중은 쓸데없는 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경계 근무는 기존 방식인 2인 1조, 수색 임무는 측량을 위한 구성원까지 합하여 4인 1조로 변경되었다.
나머지 인원은 견고한 진지 구축에 투입되었고,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일에 대비하였다.
기름 한 방울 보급받을 수 없는 이상, 장비들의 쓸데없는 운용은 비상시에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어, 대부분 인력으로 해결되고 있었다. 이건 해병대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큰일도 아니었다.
원주민들과의 접촉에는 언어능력이 뛰어난 사병들이 차출되었다.
전 세계 각국의 언어에 능통한 사병들이 하나둘 모였고, 중복되는 능력은 능력의 고하에 따라서 정리되었다.
그렇게 한쪽에서 사병들이 모여서 때아닌 언어능력 테스트를 받고 있는 시점에서, 근무 교대를 하고 돌아온 박 상병과 이 일병은 지통실에서 나오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휴우. 사령관님이 안 계시네. 포상 휴가는 물 건너간 건가.”
“박 해뱀. 그러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지 말입니다.”
“근데 저기 모여서 뭐한다냐?”
“원주민들과 접촉을 위한 언어능력 테스트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헤에?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어떤 말을 한다던?”
“외형은 백인종이랑 닮은 듯하니 가급적 유럽권 언어가 능한 사람들 위주로 뽑는다는데 말입니다.”
“불어니 독어니 그런 거 말이냐? 구텐 모르겐 봉쥬르?”
“쓸데없지 말입니다. 저런 거 해 봤자 무의미한데 말입니다.”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막사로 돌아서서 가려던 찰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쓸데없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어차피 지구가 아닌 곳에서 지구에서 쓰는 언어가 통할 거란 생각 자체가 글러 먹었다는 것이지 말입니다. 근데 박 해뱀, 언제 목소리가 그렇게 굵어지셨슴까?”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본 이 일병의 시선에는 순식간에 온몸이 경직되어 굳어 있는 박 상병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시선이 옮겨진 그곳에는 부대 생활 중 한 번 보기 힘들다던 별을 어깨에 달고 있는 중년인의 모습이 보였다. 물론 뒤에는 흔히들 말똥이라고 불리는 계급장이 두세 개씩은 붙은 자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야……야……. 피피피…… 필! 승!”
“응? 허억?! 필! 승!”
청해 함대 사령관 김충렬 준장과 참모들이 식사를 마치고 줄지어 지통실로 돌아오던 중에, 마침 복귀한 박 상병 일행이 마주친 것이었다. 그리고 김 준장은 이 일병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음, 필승. 그런데 쓸데없다니 자네 의견을 꼭 듣고 싶어지는군.”
“아, 옛! 그러니까 저기, 바, 방금 말씀드린 대로 지구가 아닌 곳에서 지구에서 사…… 사용되는 언어로 접촉을 시도해 봤자 토…… 통할 리 없다는 것이 제, 제 생각입니다!”
이 일병은 하늘 같은 사령관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에 몹시 긴장한 모습이었고, 박 상병 또한 다를 바 없었다.
“일리 있군. 그건 사령부에서도 의견이 나왔네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지. 그런데 자네는 뭔가 수가 있나?”
“따…… 딱히 수랄 것도 없지만, 방……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일병은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기 시작하였고, 당연히 박 상병은 뜨끔한 모습으로 이 일병을 노려보았다.
‘야 인마! 뭔 헛소리야! 또 네놈 판타지 공상을 제독님 앞에서 늘어놓을 셈이냐!’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외치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은 채 눈짓만 보내고 있는 박 상병이었다.
하나 의외로 김충렬 준장은 흥미롭다는 듯한 눈치였다.
“호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안에 들어가서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 볼까?”
“예, 옛!”
그렇게 복귀 신고를 마치고 돌아가던 두 사람은 다시 지통실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