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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의 대한제국 1(7화)
3장 여기는 부산(釜山)(4)


한편으로 이 일병은 은근히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뭐 모가지를 따든 멱을 따든 상관없는데 말입니다. 지금 이동 중인 숫자만 봐도 열댓이 넘는데, 본거지에 얼마나 많은 숫자가 있을지 알 수 없을 텐데 말입니다. 함부로 뛰어 들어갈 수 있을지 걱정이지 말입니다.”
“마, 총도 없는 놈들 아니냐? 어차피 주변엔 숲이 널려 있을 거고. 해병대 1개 대대가 우르르 몰려와도 숲 속이면 도망칠 자신 있는 나라고. 게다가 저따위 원시적인 무기만 가지고 있는 놈들이라면 1개 중대가 덤벼도 다 때려눕힐 자신 있다 이거야. 게다가 저놈들 체계적인 무술 같은 거 배우지도 않았을 것 아니냐.”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가급적 높은 곳에서 이동하던 둘은 이윽고 오크들의 본거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뭐, 그럴 법하긴 한데 말입니다. 아, 다 왔지 말입니다. 히야∼ 오크들 득시글득시글한데 말입니다.”
“우엑! 도대체 몇 마리냐, 이거?”
“얼추 6백 정도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비전투 인원 분류해 봤자 백도 채 안되는데 말입니다.”
“뭐 저따위야? 대부분이 전투 요원이라고? 야, 탄약 얼마나 있냐?”
“주화기 탄창 다섯 개, 부화기 탄창 두 개씩이 전부지 말입니다. 수백 마리를 원 샷 원 킬 가능하겠습니까? 지원 요청하러 갔다 옵니까?”
“그러다가 저 인질들 다 죽고 말겠다. 뭔가 수가 없겠냐?”
“박 해뱀. 어차피 저놈들 지능 낮지 말입니다. 함정 파 놓고 조금씩 유인하면 시간은 걸려도 가능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흠, 준비에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이면 충분하지 말입니다. 박 해뱀 칼 솜씨면 금방임다. 그리고 가능하면 총은 안 쓰는 게 좋겠는데 말입니다.”
“왜? 있는 화력 위험 감수해 가면서 아낄 건 뭐냐?”
“휴우, 박 해뱀. 잊었슴까? 지구 아니지 말입니다. 보급 없지 말입니다. 쓸데없이 총알 마구 써 대다간 나중에 정작 필요할 때 못 쓰지 말입니다.”
“아아, 그래 알았다 이놈아. 어차피 나도 이런 데서 별로 총 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그럼 일단 부비 트랩 설치부터 하자고. 엄청나게 원시적일 것 같긴 하다만.”
그렇게 두 사람은 분주하게 오크 마을 주변 숲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면서 슬슬 어두워질 무렵, 오크 마을 여기저기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나무로 대충 얽어 놓은 듯한 구조에, 곳곳에 널려 있는 건초 더미로 인하여 불길은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물론 오크들은 우왕좌왕하며 불길을 잡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지만 좀처럼 불길이 잡히질 않았다.
게다가 일정 거리를 두고 계속 불길이 치솟아 오르면서 진화 작업을 하려던 오크들을 에워싸는 형식이 되었고, 오크 마을의 절반 이상이 불길에 휩싸였다.
마치 노리고 불을 지른 듯했고, 불이 나더라도 완전히 둘러쌀 만큼 불이 나지는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묘하게 건물들이 무너지면서 불길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오크들은 불길에 둘러싸여 버렸고, 불길 바깥에는 소수의 오크만이 남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얼굴을 온통 검게 칠한 이상한 복장의 인간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미처 대응도 하기 전에 오크 둘이 그의 손에 들려진 박도에 의해 목이 잘려졌다.
“취익! 인간이다! 저놈이 불을 질렀다!”
“잡아라! 취익!”
불길 속에 갇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오크들을 남겨 두고 안전한 곳에 있던 오크들은 한 마리도 남김없이 위장 크림으로 시커먼 얼굴을 한 박 상병을 향해 달려들었다.
비록 소수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오십은 넘는 숫자였다.
박 상병은 오크들이 우르르 달려들자 뒤도 안 돌아보고 마을 바깥으로 쌩하니 도망치기 시작했고, 분노에 가득 찬 오크들은 놓칠세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쪽 구석의 건초 더미가 꿈틀거리더니 이 일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통돼지 바비큐를 해 보자고∼ 우히힛!”
이 일병과 박 상병은 그동안 오크 마을 주변에 부비 트랩을 설치한 뒤, 은밀하게 마을 안으로 침투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불길이 쉽게 번지도록 건초를 준비하고, 건물이 무너지는 방향을 적절히 조절하여 땅을 파 두거나 나무들을 잘라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곳곳에 갑자기 발생한 불은 이 일병이 가지고 있던 고체 연료가 원인이었다.
취사용 군용 고체 연료를 쪼개어 불을 붙여 건초 더미 깊숙이 집어넣자, 화력 좋은 고체 연료가 순식간에 불을 키웠던 것이다.
그렇게 불을 질러 대부분의 오크들을 유인하고 주변에도 불을 놓아 대부분의 오크들을 불 속에 가두어 둔 다음, 나머지 오크들은 박 상병이 나타나 유인하여 마을 바깥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인질로 잡혀 온 사람들은 다행히도 불길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구석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이 일병은 그들을 풀어 주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마을 바깥으로 나간 오크들에게 풀어 준 사람들이 발각되어 버리거나, 박 상병과 함께 만든 부비 트랩에 다칠 것을 염려한 것이었다.
그리고 갇혀 있던 사람들도 이상한 복장을 한 사람이 온통 시커먼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웃는 모습을 보이자 마치 지옥의 악마와도 같았기에 차마 살려 달라는 말조차 나오질 않았다.
이 일병은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며 불길 속에 땔감을 던져 넣었다.
워낙에 거센 불길이어서 안쪽 상황조차 잘 보이지 않았지만 능숙하게 불붙은 나무들을 집어 들어 깊숙이 던져 넣었다.
몇 바퀴 돌면서 그렇게 불붙은 나무들을 안으로 계속 집어넣자 안쪽에서는 오크들의 비명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오크들도 보이지 않는 불길 너머에서 불붙은 통나무가 날아들자 그 공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마침내 불길이 가운데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탈 것이 없는 바깥보단 탈 것이 있는 안쪽으로 불길이 번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오크들도 가능한 한 불길이 자신들에게 오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거센 불길 속에서 그 노력은 허사였다.
불길 주변을 다섯 바퀴째 돌 무렵, 박 상병이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헥, 헥. 박 해뱀. 통돼지 바비큐 만드는 것도 힘든데 말입니다. 이거 장난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도 잘하고 있네. 사람들은?”
“아직 저기 구석에 갇혀 있는 채로 냅 뒀지 말입니다. 괜히 저 사람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면 더 힘들지 말입니다. 근데 유인해 간 오크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보같이 부비 트랩에 너무 잘 걸리더라고. 차라리 멧돼지 잡는 게 더 어려웠던 것 같더라니까. 줄줄이 따라오다가 줄줄이 걸려서 한 놈도 안 남기고 다 해치웠지.”
“헥, 헥. 박 해뱀도 돼지 구이 같이 하시지 말입니다. 아직 범위가 넓어서 불길이 약해지면 안에 있는 놈들이 빠져나오게 될 텐데, 그럼 곤란하지 말입니다.”
“오냐, 이놈아. 나무 해 올 테니 마을 사람들을 풀어 줘라. 부비 트랩 남은 것도 없고, 불길 안에 있는 놈들 만 해치우면 안전하니까.”
박 상병은 신속하게 움직여 적당한 크기의 나무들을 잘라 내기 시작했다.
이 일병은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해 내고서는 한마디 말도 없이 돌아섰다. 어차피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해도 못 알아들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유롭게 풀어 준 다음에는 그저 말없이 박 상병이 구해 놓은 땔감들을 열심히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기 바빴다.
마을 사람들은 시커먼 얼굴을 한 두 명의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구해지자 어리둥절한 모습이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박 상병 일행을 돕기 시작했다.
서로 간에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마음만은 한결같았다. 불구덩이 속에 갇혀 있는 오크들을 모조리 통구이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일념은 이들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 주었다.
밤새도록 마을 사람들과 함께 불을 지르고 또 질렀고, 어스름이 밝아 올 무렵에는 불길 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던 오크의 비명 소리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비명 소리가 그치고 불길도 캠프파이어 수준까지 작아지자,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들을 괴롭혀 오던 오크 마을 하나가 이 정체 모를 두 명에 의해 완전히 박살 나고, 오크들 또한 싹쓸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환호성을 지르면서 기뻐할 무렵, 박 상병과 이 일병은 열심히 세수를 하고 있었다.
“비누 없냐? 위장 크림 더럽게 안 지네.”
“가지고 있을 리 없지 말입니다. 아, 박 해뱀. 아직 귀밑에 남았슴다.”
한참 동안 세수를 하고 겨우 위장 크림을 지운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위장 크림을 지우기 전의 자신들과 똑같이 검댕으로 온통 새까만 모습의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
한 사람이 나서서 뭐라고 말했지만 역시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박 상병과 이 일병은 서로를 마주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야, 네가 이 분야 전문이잖아? 어떻게 좀 해 봐라.”
“저도 이곳 사람들의 말은 모르지 말입니다. 혹시나 반지 같은 거나 목걸이 같은 거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건 또 뭔 소리냐?”
“아티팩트라고, 언어를 알아듣게 해 주는 그런 마법 도구 같은 거 말입니다. 이런 산간벽지에서 구하기는 힘들 텐데 말입니다.”
“그딴 게 어디 있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놈아.”
“판타지 세계에서 없을 리 없지 말입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하는 동안, 뭐라고 말이라도 건네 보려던 사람들은 이 두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복장을 한 젊은이가 앞으로 나섰다.
“저기……. 제 말은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일단 만국 공통어인 바디 랭귀지로 어떻게…… 응?”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렸고, 약간은 난처한 모습으로 자신들에게 말을 거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우리말 할 줄 아십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제 스승님이 남겨 주신 마법 물품 덕분에 대화가 가능한 것 같습니다, 아하하.”
그 청년은 자신의 귀걸이를 보여 주었고, 이 일병은 환성을 질렀다.
“역시! 통역 마법이 들어 있는 아이템이 있었어! 거 보시라니까 말입니다. 박 해뱀, 걱정할 것 없지 말입니다.”
반면 박 상병은 갑자기 한국어를 유창하게 쏟아 내는 이 정체불명의 남자가 몹시 의심스러워졌다.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용사님들. 저는 수습 마법사 제라드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