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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의 대한제국 1(10화)
3장 여기는 부산(釜山)(7)
김충렬 준장과 악수를 나눈 제라드와 참모진들은 지통실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미약하게나마 되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던 참모들은 마침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이제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상륙 일주일째. 그리고 제라드가 이곳을 찾은 지 사흘째.
경계 근무를 서는 사람들과 각 함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을 남겨 두고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해병대 700, 해군 700, 도합 천사백의 장병들이 도열한 가운데, 김충렬 준장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전 장병들에게 매우 안타까운 소식을 전한다. 우리는 우리의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가족과 친구, 그리고 연인을 남겨 두고 왔을 너희들에게 면목이 없다.”
거의 탄식에 가까운 연설이었다.
가족들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눈물이 흐를 만도 하련만, 아무도 우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똑같이 부동자세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으며, 유서도 써 놓았다. 기적과도 같이 핵 공격에서 살아남았지만 처음 보는 세상에 떨어졌다.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덮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울고 불고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마음을 굳게 다지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정훈장교를 통해 그동안 열심히 세뇌에 가깝도록 교육시킨 탓도 어느 정도 있었다.
연설 뒤에는 투표가 실시되었다.
지켜야 할 나라가 없는 시점에서 군인들만으로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가지고 있는 힘을 아무렇게나 풀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참모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내린 결론은, 민주주의에 입각하여 투표를 하는 것이었다.
1. 특정 국가에 의탁하여 그곳의 군인 혹은 국민이 된다.
2. 가지고 있는 무력을 활용하여 자치를 실시한다.
3. 희망하는 자들은 전역하여 자유롭게 이곳에서 살아가도록 한다.
4. 기타
이미 이곳의 상황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알 수 없는 세계. 수세기나 뒤떨어진 문명 수준. 그리고 몬스터라고 불리는 수많은 괴물들의 존재.
여러 봉건국가들이 곳곳에 나라를 세우고, 왕이니 귀족이니 하며 계급을 나누어 살아가는 곳.
투표 결과는 예상대로 2번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3번을 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고, 4번 기타에서 약간씩 다른 내용이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2번과 비슷한 의견을 적은 표가 나왔다.
사흘 동안 주변 마을들과 접촉을 가졌고, 각 마을들의 상황을 봐 온 장병들은 이미 모두 한마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최초 접촉을 시도했던 박 상병이 천 명이 넘는 사병들이 사열해 있는 앞으로 나섰다. 이세계로 넘어오기 전에 부사관 신청을 했었던 박 상병은 이번의 공을 인정받아 전시 특별 진급으로 하사로 임명되었다가 하루 만에 중사로 진급되었다.
“이 땅을 우리 땅으로 삼고, 이 땅에 사는 주민들을 우리의 국민으로 여기겠습니다.”
짧고 간결하게, 하지만 모두의 의지를 담은 말이었다.
비록 외모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이들은 모두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이 일병이 박 상병, 아니 박 중사 옆으로 나섰다. 이 일병은 뒤늦게 부사관 신청을 하였고 이번 공로가 인정되어 하사로 임명되었다.
“이 땅의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리 조국인 대한민국과 매우 흡사한 반도 땅입니다. 그 크기는 거의 인도에 필적할 만큼 거대하다고는 하나, 형상만큼은 한반도와 거의 같습니다. 그리고 이 땅은 이곳의 사람들에게서도 잊혀진 땅으로 불리며 접근하지 않는 천혜의 땅입니다. 우리들뿐만이 아니라 이 땅 곳곳에 수많은 주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이 땅을 개척할 힘을 가지지 못하여 천혜의 이 땅을 버려두고 있는데, 우리는 그만한 힘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디디게 된 데에는 필시 이 땅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합니다. 어차피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이곳을 조국으로 만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우리 가슴엔 태극기가 있습니다.”
이 하사가 자신의 왼쪽 가슴을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오버로크된 빨간색 이름표가 있었다.
“그리고 이 땅에, 한민족의 얼을 이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 군인으로서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어 펼쳤다.
“일제 강점기 시절, 그 꽃을 펼쳐 보지 못한 채 허물어졌던 대한제국을 다시 한 번 이곳 세상에서 그 정신을 이어 나갈 것을 저희 해병대 전 일동은 염원하고 있습니다.”
― 척!
팔각모를 쓴 해병대 700명이 모두가 하나된 동작으로 발을 굴렀다.
나란히 서 있던 해병 700명들도 앞에 선 장교 한 명이 손짓을 하자 발을 굴렀다.
― 척!
“이 땅에 다시금 대한제국의 위상을 떨치는 것을 저희 모두가 바라고 있습니다. 대한제국 만세!”
이 일병, 아니 이 하사가 태극기를 높이 꺼내어 들어 만세를 외쳤다.
― 만세! 만세! 만세!
천사백의 장병들이 모두가 하나되어 만세 삼창을 하였고, 박태성 대령이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이 하사가 태극기를 박태성 대령에게 건네자 박 대령은 태극기를 받아들고 김충렬 준장 앞에 섰다.
“제독님. 급작스럽겠지만 부하들에게 이리하라고 제가 지시하였습니다.”
너무나 잘 도열해 있고, 마치 정말로 짜 맞춘 듯한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던 김 준장이었다. 모든 것이 참모 박 대령의 소행임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 같은 사람이 나라를 세워 어쩌라는 건가? 군사정권의 독재자라도 되란 말인가? 동포에게 총을 겨누던 수십 년의 세월이 바로 그 군사정권의 독재자로 인한 것임을 모르나?”
“저는 사령관님이 김일성이나 김정일 같은 독재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럼 자네 목적이 뭔가?”
“필요에 따른 임시방편입니다. 이 일병, 아니 이 하사가 상당히 박식하여 도움이 되었습니다만, 시대에 맞춘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먼저 설립하여 빠른 발전을 도모하고, 민주주의의 안착을 서서히 유도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 하사가 제출한 국가 설립 3단계 중 1단계로, 향후 20년에 걸쳐서 뼈를 깎는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당장은 힘을 한곳에 모을 구심점이 필요하니, 사령관님이 그 역할을 맡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른 참모들도 사전에 이야기가 진행이 되었는지 그저 가만히 서서 지켜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김충렬 준장은 이들의 의지가 확고함을 느끼고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겠네. 이 땅에 태극기를 높이 들고 조국의 이름을 외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사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
박 대령이 건넨 태극기를 김 준장이 받아들었다.
그러자 가장 앞 열의 해병대와 해군 들이 대열에서 앞으로 척척 걸어 나왔다.
“앞에∼총!”
― 척!
박 중사가 구령을 외치자 열네 명의 사병들은 절도 있는 모습으로 각자의 소총을 꺼내어 앞에 들었다.
― 삐익!
이 하사가 호각을 불자 소총 사열을 받듯이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착착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 총 쏘아!”
― 타앙!
“둘 총 쏘아!”
― 타앙!
“셋 총 쏘아!”
― 타앙!
…….
구령에 맞추어 공포탄이 일제히 발사되었다.
총 여섯 발의 공포탄이 쏘아졌으며, 귀빈석으로 마련된 자리에 유일하게 앉아 있던 이방인인 제라드는 총이 발사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했다.
잘 정렬되어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어떤 나라의 기사단도 따를 수 없을 기개를 느꼈다.
하지만 공포탄이 발사되는 소리에는 깜짝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소리였다.
태극과 건곤감리를 뜻하는 여섯 발의 총성이 그렇게 이세계의 땅에서 울려 퍼졌다.
많은 것이 순식간에 바뀌기 시작했다.
박 중사 일행이 주축이 되어 근처에 있는 마을들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일곱 개 마을 약 4천 명에 달하는 주민들이었다.
워낙에 넓은 지역에 산개하고 있었던 이들은 오크들이 사라져 당분간은 안전한 상황이었지만, 얼마 안 가서 새로운 몬스터들이 나타날 것을 알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바로 상륙군 진영이 있는 곳이었다.
말이 안 통하는 이들에게 장교들은 언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글은 굉장히 과학적인 문자였고, 어린아이들은 금세 글을 쓰고 읽을 줄 아는 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한국어 자체의 의미를 배우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적어도 발음을 표기하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한글의 우수성이 확실히 드러났다.
비록 말이 통하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지만, 글을 익히는 것에는 그다지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고, 제라드와 함께 사람들에게 언어를 가르치고, 또한 이곳의 언어를 배우는 장교들은 하루하루가 힘들었지만 언제나 밝은 표정을 지었다.
바다는 크라켄이라는 거대 괴물이 먹이사슬의 정점에 서 있는 동안, 거대 육식 어류는 거의 존재하지 않으니 일반 어종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베어 낸 나무로 배를 만들어 띄워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사병들은 각자의 지식을 살리며 여러 가지 기반을 갖추는 것에 전력을 기울였고, 병역의 의무를 주민들에게도 주어 20대 전후의 남녀 모두가 군인으로서 훈련을 받게 하였다.
건축학과 출신의 한 사병은 토목 기술이 있는 부사관과 힘을 합쳐 여러 가지 건물을 지어 올렸다.
가장 먼저 마을 주민들이 살 집을 짓는 것이 우선시되었고, 군인들은 여전히 천막 속에서 지내게 되었다.
또한, 마을 사람들에게 각종 지식을 습득한 이들은 모든 것을 자급자족이 가능하게끔 차츰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숲을 개간하고 건물을 지으며, 점점 하나의 소규모 영지 규모까지 발전하기에 이르자, 지휘부에서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고 있었다.
광활한 이 땅을 타국이 먼저 알아차리기 전에 점령하여 하나의 강대한 국가를 세우자는 의견이었고, 그러기에 앞서 이 넓은 땅의 수도를 삼을 만한 곳도 필요하다는 의견이었다.
당장은 이 이름 모를 해안가에 정착하고 있지만, 수도로 삼기에는 너무 구석진 자리에 위치해 있었으며, 주민들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알아낸 이 땅 곳곳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통합하기에는 부적합한 위치였다.
무엇을 해도 당장은 인력이 너무 모자란 상황이었으며, 가지고 있는 군사 장비들을 제외하면 21세기 문명을 상징하는 것들은 많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바다 위에 떠 있는 수십 척의 고깃배들도 나무로 만든 목선이었다.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러운 것이 없는 상황에서, 먹고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기에 우선적으로 자원 확보를 실시하였다. 지질학에 재능이 있는 사병들은 모조리 차출되어 지질조사를 위한 조사 임무에 파견되어 위험이 도사리는 숲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군사작전의 일환으로 정식 분대 단위의 인원 편성에 개인화기도 만전을 기하여 투입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곳에 살고 있는 몬스터의 종류와 특성은 제라드와 이 하사가 잘 정리하여 탐사대에게 전달되었고,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분대 단위의 화력 앞에서 별다른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리고 병력의 질적인 면에서도 최강 해병대가 투입되었기에 걱정은 그다지 크지 않은 편이었다.
특이하게도 지형적 특성이 한반도의 확장판이라고 생각되어질 정도로 흡사하고 규모가 거대했던지라, 과거 한반도 땅에서 채취된 여러 가지 지하자원도 유사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도 있었다.
한편, 설령 자원이 발견된다고 할지라도 문제는 여전히 산재했다. 21세기를 살아온 이들이었기에 각종 지하자원을 이용할 경우, 어떤 식으로 자연환경에 영향이 발생할지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화석연료의 무분별한 사용은 심각한 환경 파괴를 가져다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심각하게 고려되는 사안이었다.
일반 사병들과 주민들, 그리고 일선 장교 및 부사관들은 당장 눈앞에 주어진 토목공사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바쁜 상황이었다. 특히 유류 부족으로 모두 인력으로 충당하고 있었기에 장병들의 피로도는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한편 제라드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과학적 지식과 장비 들을 갖추고 있는 이들이 너무나 놀랍고 대단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쇠 덩어리로 이루어진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배가 무려 세 척이나 바다 위에 떠 있었고, 노를 젓지 않고도 굉음을 내며 엄청난 속도로 바다를 가로지르는 보트는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 어느 것도 마법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는 점에서 혀를 내둘렀다.
모두가 가지고 있는 총이라는 것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그 정밀성은 드워프라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어서 이들이 인간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리저리 다니면서 보고 듣고 그의 궁금증을 해결해 오던 제라드는 지휘부 막사로 걸음을 되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