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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의 대한제국 1(17화)
5장 격돌(2)


사실 상선인 척하던 배를 습격한 딕은 분명히 상선이라는 정보를 믿고 달려들었다.
물론 도중에 크리브에 의하여 약간의 정보가 조작당한 것은 몰랐지만 말이다.
반나절 거리에 미끼용으로 상선인 척하는 군함이 앞장섰고, 그 뒤에 상선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크리브는 뒤의 상선을 약탈한 다음, 느긋하게 나타나 위기일발의 딕을 구해 주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울리히는 크리브와 비슷한 수준으로 계략에 능했지만 자신의 꾀에 자신이 넘어간 경우였다.
이렇게 대부분의 해적들은 크리브의 직간접적인 계략으로 위기에 처한 과거가 있었으며, 모두 크리브에게 구함을 받은 전적이 있었던 것이다.
빚을 지게 만들어 놓고 나중에 철저하게 부려 먹겠다는 심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것이었지만 아무도 막아설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책략에 능한 만큼 싸움도 능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주변에 다른 해적들로 둘러싸여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무사히 빠져나갈 정도의 능력은 있었던 것이다.
해적들은 저마다 이를 갈면서도 달리 반박하지 못한 채 크리브를 노려봤다.
“어이, 어이.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 짓지 말라고. 남자한텐 흥미 없으니까. 그보다는 내가 왜 이 잊혀진 땅에 누군가 살고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는지 궁금하지 않나?”
“흥. 또 보나 마나 그럴듯한 사기나 치겠지.”
애꾸눈 울리히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사기라니! 내가 언제 사기를 쳤다고 그러나? 그리고 지금 죽느냐 사느냐가 달려 있는 판국에 사기 따위를 칠 이유가 어디 있다고 그러나?”
그랬다. 이들은 하나같이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애꾸 울리는 내버려 두고 설명해 봐, 크리브.”
성미 급한 딕이 크리브를 재촉하였고 크리브는 씨익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뭐, 그렇게까지 설명이 필요하다면 이 몸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지.”
― 스릉!
해적들은 슬그머니 자신의 칼을 살짝 뽑아 보였고 은근히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아무리 크리브에게서 목숨을 구한 과거가 있다고는 하나 지금의 상황에서 농담을 할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흠흠. 왜들 그렇게 살벌하나. 진정들 하라고. 그럼 바로 설명하도록 하지. 우선 잊혀진 땅에 대해 조사를 하는 과정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는데, 수천 년 전에는 고대의 제국이 있었다는 기록이지. 수천 년이 지나는 과정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지도도 남아 있지를 않았던 거야. 특히 지도라는 것은 국가에서 관리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 중요도가 높은데,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많은 것들이 바뀌면서 지도도 당연히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던 것이지. 당연히 잊혀진 땅에 대한 지도는 해안선을 제외하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야. 그럼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해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면, 왜 해안선은 남아 있느냐는 것이지. 크라켄의 등장 시점도 거슬러 올라가면 잊혀진 땅의 고대 제국이 멸망한 시점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지. 왜, 해안선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가? 이것에 대해 의문을 가진 적 없나?”
해적들은 아무런 말도 하질 못했다.
“그건 당연히 크라켄의 눈을 피해 해안선을 조사한 사람이 있으니까 남아 있는 것 아니겠냐는 것이지. 반면 내륙에 대한 지도는 없는데, 이는 내륙 전체에 넓게 퍼진 몬스터들 때문에 조사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으로 여겨진단 말이야. 그럼 여기서 어떻게 크라켄의 눈을 피해 해안선의 조사가 가능했을까. 의심스럽지 않나? 이유는 간단해. 크라켄은 단 한 마리뿐이라는 사실이지. 과거 잊혀진 땅에 그 모습을 드러낸 크라켄은 해안에 인접한 항구들을 완전히 박살을 내면서 기능을 상실하게 만들었고, 뱃길을 지나가는 배들을 습격하여 수장시켜 버렸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이야기지. 뱃길은 크라켄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순찰 돌 듯이 다녔을 것이야. 하지만 정규 뱃길이 아닌 곳으로 소규모로 침투한다면 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지.”
해적들은 어느새 그의 설명에 푹 빠져 있었다. 실제로 그 누구도 미동도 하지 않으며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렇게 각 나라들은 잊혀진 땅을 어떻게든 자신들의 땅으로 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성과가 바로 이 해안선을 표시한 지도라는 점이야. 저마다 틀리지만 여유가 있을 때마다 비정기적으로 조사를 실시해 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리고 극비에 속하는 정보이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에 한 왕국의 조사단으로부터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었지. 바로 잊혀진 땅에는 아직도 고대 제국의 후손들이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 순간 모여 있던 해적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아아, 진정들 하라고. 아직 이야기 안 끝났으니까. 잊혀진 땅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고, 그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지만, 결국 얼마 안 가서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어 버렸지. 왜냐하면 그 땅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이 너무나 많았던 탓이야. 결국 더 이상 조사단을 파견하거나 대규모로 군대를 파견할 수 없는 현실에 얼마 안 가서 잊혀진 땅은 이름 그대로 잊혀져 버렸지만 말이지.”
그렇게 한 단락이 마무리되자 애꾸눈 울리히가 눈을 빛냈다.
“대단한 이야기였어, 크리브. 한데 너는 어떻게 그러한 것들을 다 알고 있는 것이지?”
모두가 크리브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었지만 울리히는 날카롭게 허점을 파고들었다.
크리브의 눈썹이 약간 움찔했으나 어두운 실내에서 그러한 변화를 알아채기란 매우 힘들었다.
“하하하하. 그야 얼마 전에 한 건 건졌던 배에서 우연히 이러한 정보들을 입수했기 때문이지. 왜 있잖나. 보름 전 한 건 했던 것. 그거 알고 보니 상선으로 위장하고 은밀하게 잊혀진 땅으로 조사단을 파견하던 배였더라고. 덕분에 기사들도 타고 있던지라 내 부하들 절반 정도는 잃어버렸지만, 그 덕분에 이만한 성과가 있었다고나 할까.”
미심쩍었지만 확실히 보름 전 크리브는 약탈에 성공하여 돌아온 전적이 있었다.
그의 부하가 줄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확하게는 모르는 상황이었고,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이었기에 울리히는 눈을 가늘게 뜨며 크리브를 노려보고선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자자, 그럼 계속 이야기를 이어 가 보자고. 어찌 되었든 잊혀진 땅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조사가 실시되어 왔던 것은 사실이야. 크라켄의 존재도 명확하지. 조사단들도 여러 차례 크라켄을 목격했으니 두말할 필요가 있겠나? 한데 추측컨데, 지금으로부터 1년에서 2년 전에 그 크라켄이 잊혀진 땅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이지. 크라켄의 최후 목격이 약 2년쯤 전이고, 정체불명의 대상단 40척이 사라진 시점이 1년 전이니까, 그 사이로 추측하고 있는 것이야.”
“어째서 그 사이에 크라켄이 사라졌다고 단정할 수 있지?”
딕이 말을 자르고 중간에 끼어들자 크리브는 한숨을 푹 쉬었다.
“후우, 딕. 네가 머리 나쁜 건 익히 알고 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한 줄은 몰랐다. 잘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줄 테니 잘 들어 봐. 크라켄의 마지막 목격 시점은 2년 정도 전이야. 그리고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나타나 틸트항을 싹쓸이하고 사라진 시점이 1년 전. 2년 전에는 최후 목격 시점이었고, 그 이후에 조사단 파견이나 목격된 사실이 없었기 때문에 공백이 있지. 하지만 1년 뒤인 지금으로부터 1년 전에 40척의 대규모 선단이 잊혀진 땅으로 향했고, 그들이 사라졌어. 이게 무슨 뜻일까?”
“그 40척이 크라켄의 공격을 받아 모조리 가라앉았을 수도 있지 않나?”
“아아, 딕. 그래서 네가 머리가 나쁘다는 거야. 냉정하게 생각을 해 보라고. 크라켄의 밥이 될 것을 뻔히 알면서 그렇게 대규모 선단을 만들어 잊혀진 땅으로 향했을 리가 없잖아? 크라켄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쪽으로 갈 미친놈은 없지. 물론 나라에서 목숨 걸고 조사하라고 보낸 사람들을 빼놓곤 말이지. 안 그래?”
“오호, 그렇군. 즉 크라켄은 그사이의 기간에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대신하는 바다 괴물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선단을 만들어야 했다. 그런 건가?”
울리히가 날카롭게 핵심을 파고들자 크리브는 무릎을 팍 치며 일어났다.
“그래! 바로 그거야. 새로이 나타난 바다 괴물은 한두 척의 소수로 이루어진 조사단을 철저히 찾아내 박살 낸다는 점이지. 놀라운 점은 어떤 경로로 들어간다고 해도 이 바다 괴물은 그야말로 괴물답게 알아내서 철저하게 가라앉힌다는 점이지만, 1년 전 40척의 대선단은 분명히 이 바다 괴물의 공격을 피해 잊혀진 땅으로 무사히 들어갔을 것이란 말이지.”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제야 제각각 따로 놀던 톱니바퀴가 제자리를 찾아가 맞물려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봐, 크리브. 상당히 그럴듯한 이야기였는데 마지막으로 의문이 있군. 잊혀진 땅에서 도대체 어떻게 그만한 자금력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지? 그리고 네가 설명하기로는 잊혀진 땅 전체에 걸친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에 의해 조사단조차도 내륙으로는 발을 들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지 않았나?”
여전히 울리히는 냉정하고 날카로웠다.
“아아, 물론 그렇지. 그런데 생각을 해 보라고. 20년 전 이야기야. 20년 전. 그 20년 동안 어쩌면 잊혀진 땅 내부에도 변화가 생겨 몬스터들을 몰아내고 다시금 고대 제국의 후손들이 힘을 합쳐 모이기 시작했을 수도 있지. 그리고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크라켄도 수명이 다해 죽어 버렸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을 테고. 오히려 사람이 발도 못 디딜 정도로 몬스터가 판을 치는 땅이라는 사실이 신용이 떨어진단 말이지. 반대로 크라켄이 늙어 죽었을 가능성이 오히려 높은 것이, 바로 바다 괴물의 존재가 역설해 주고 있다는 것이야. 생각을 해 봐. 크라켄이 어떤 존재인가. 물속에서라면 드래곤이라도 고스란히 먹이 신세를 면할 수 없다고 하는 최상위급의 몬스터라고. 그런 몬스터가 바다를 점령하고 있는 판국에, 다른 대형 몬스터가 크라켄의 영역에 쉽사리 들어갈 수 있을까?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 한데 크라켄이 사라졌다고 생각되는 시점에서 약 1년 정도의 공백이 있은 다음에 정체불명의 바다 괴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야. 크라켄보다는 약하지만 분명히 위협적인 바다 괴물이. 어때? 이제 납득할 수 있겠나?”
울리히는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크리브의 설명은 어느 것 하나 빈틈이 없었다. 아니 너무나 완벽할 정도로 모든 정황을 꿰뚫어 이어 나가고 있었다.
완벽한 추론이었으며 앞뒤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자 아무리 머리 좋은 울리히라도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크리브?”
“어쩌긴. 해적답게 털러 가야지. 잊혀진 땅을.”

* * *

건국 2년 8월. 판테아 대륙력 4271년.

해적들이 뭉쳤다.
하나로 뭉친 해적들은 크리브를 일시적인 우두머리로 삼고 잊혀진 땅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였다.
그 숫자가 무려 천오백에 달했으며, 해적선의 숫자만 하여도 30척이 넘었다.
그들이 합치게 된 원인으로는 두 가지가 있었다. 자신들을 이렇게까지 몰아넣게 만든 장본인인 사라진 40척의 대선단에 대한 원한과 그들의 자금원인 마나석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마나석을 길가에 자갈 뿌리듯이 뿌려 대었으니, 찾아내기만 하여도 엄청난 마나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세부적인 계획은 크리브가 세웠다.
잊혀진 땅에서 몬스터가 사라졌다고는 하더라도 원래 해적인 이들이 육지로 뛰어들어 싸우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다는 판단이었기에, 해안선을 따라서 이동하며 사라진 40척의 배를 찾는 것을 우선시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렇게 배를 찾아내면, 그곳을 중심으로 본거지를 알아내 본격적인 약탈을 한다는 것이 구체적인 계획이었다.
그렇게 대함대를 이끌고 나선 해적들은 크라켄의 영역에 들어온 지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런 공격을 받지 않자 크리브를 상당히 신뢰하는 상황이 되었다.
낮에는 산개하여 이동하고, 밤에는 되도록 밀집한 상태로 횃불을 환하게 밝혀 천천히 이동한다는 작전이었는데, 의외로 그 작전이 성공적인지 잊혀진 땅의 해안선까지는 이제 하루 거리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바다 괴물의 공격이 없자 일부 해적들은 벌써부터 약탈에 성공한 것마냥 즐거워하며 웃어 대고 있었다.
내일이면 잊혀진 땅의 해안선에 도착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해안선을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밤이었기에 해적선들은 모두가 다닥다닥 붙은 채 횃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지금 다른 해적선장들은 모두 크리브의 배에 모였다.
“크크크. 크리브. 역시 네놈 말대로 바다 괴물이 안 오는군. 내일이면 해안선에 도착하니 벌써부터 좀이 쑤시는구먼.”
딕이 푸르스름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해적들의 경우에는 워낙에 이를 닦지 않아서 누렇다 못해 푸른빛이 날 정도로 변해 있는 경우가 허다했고 해적선장이라고 해서 다를 바는 없었다.
“하하하. 내 뭐랬냐고. 다 방법이 있다고 그랬잖아? 이제 잊혀진 땅 어딘가에 숨어 있을 그놈들을 찾아다가 마나석을 몽땅 털어 오는 일만 남았지. 안 그래? 하하하하하!”
크리브도 덩달아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하!”
해적들 모두가 한바탕 크게 웃었고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