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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의 대한제국 1(18화)
5장 격돌(3)


“그런데 크리브. 묘∼한 녀석이 있던데 말이지.”
애꾸눈 울리히가 고조된 분위기를 단번에 가라앉혔다.
“응? 묘한 녀석이라니?”
한바탕 술을 마신 다음이라서 그런지 불그스름한 얼굴에 눈은 게슴츠레하게 뜬 크리브가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쳐다봤다.
“아아, 별거 아니야. 그저 모 왕국의 끄나풀이 끼어든 듯해서 말이지. 자네가 크게 신경 쓸 건 없어. 다만, 크리브 네가 가장 후미로 배치되는 날 밤에는 이상하게 한 사람씩 없어지더라고. 아마 누군가 크리브 너를 모함하려는 듯한데, 내가 그런 것에 속을 위인이 아니지. 흐흐흐.”
그리고 주변의 다른 해적선장들 모두가 음흉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크리브는 전혀 알 바 아니라는 듯이 고기를 들고 게걸스럽게 뜯었다.
“우물우물. 구런데 구게 나랑 뭔 상관이야? 우물우물.”
너무나 태연해서였을까, 다른 선장들이 반대로 약간 움찔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울리히는 그런 것에 속지 않는다는 듯이 마주 앉아서 탁자 위에 다리를 걸쳐 올렸다.
“아니, 뭐. 그냥 그렇다고. 별다른 건 없어. 다만 도망치는 그놈들 모두 이렇게 잡아 오긴 했지.”
― 우르르르.
울리히가 눈짓하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밧줄에 꽁꽁 묶인 채 등장했다.
그들을 본 크리브는 약간은 동요한 듯이 눈썹을 움찔했으나 여전히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꿀꺽꿀꺽. 크아∼하. 뭐야 저것들은? 하나, 둘, 셋…… 다섯 명씩이나 있네? 울리 네놈 배에 있던 노예냐?”
태연하게 받아치는 크리브였고 다른 해적선장들은 너무나도 태연한 크리브의 반응에 오히려 갈피를 못 잡은 채 두 사람의 행동을 그저 잠자코 지켜만 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이놈들 전부 다 네놈 배에서 나왔다고. 그것도 크리브 네가 가장 뒤에서 경계하는 날 밤에만. 그리고 잡아내서 이것저것 좀 알아봤지. 결과부터 말하자면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이더군. 이 중에 한 사람이 알테인 왕국의 문장을 가지고 있더란 말이지. 해적인 네가 알테인 왕국과 연줄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궁금해서 말이야. 뭐 본인들은 벙어리 뺨치게 말이 없더군. 내 그래서 진짜로 벙어리인가 확인하려고 혀를 잘라 봤는데 목소리는 잘 나오더군.”
묶여 있는 한 사람이 해적의 손에 턱을 잡히자 입이 자연스레 열렸고, 혓바닥이 잘린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다시금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는 크리브였으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어이, 울리. 식사중에 저런 거 눈앞에 들이대면 밥맛 떨어지잖아? 그만하지그래?”
그러나 미미하지만 변화를 눈치챈 울리히는 재미있다는 듯이 킬킬거리며 크리브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크크크. 아아, 끝까지 들어 봐. 아직 이게 다가 아니야. 너도 이제 적당히 먹고 이야기를 좀 들어 보라고. 저놈이 잡힌 게 보름 전이란 말이지. 그 뒤로 사흘 만에 다음 놈이 잡혔는데, 저놈이 바로 알테인 왕국의 문장을 가지고 있더란 말이야. 그것도 왕가의 문장을 말이지. 이거 참, 우리 해적들이 얼마나 유명해졌으면 일국의 국왕께서 관심을 가지실 줄이야 꿈에나 알았겠냔 말이지. 저놈도 말을 안 하던데, 의외로 힘이 대단히 좋더란 말이지. 덕분에 내 부하들이 좀 고생했지만 가만 놔뒀다간 나도 벅차겠더라고. 그래서 양 손목의 힘줄을 좀 끊어 줬어. 손목 자체를 자를까도 했지만 그랬다간 묶기가 너무 힘들어서 말이야. 크크크.”
묶여 있던 사람들 중 두 번째의 덩치 큰 사내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만 있을 뿐이었다.
“뭐 그다음 사흘 뒤에는 저 가운데 놈이 잡혀 왔지. 순둥이처럼 생긴 게 잡히자마자 계집애마냥 울더라고. 그래서 그걸 잘라 줬지. 어차피 필요 없을 테니까. 크크크크. 그리고 네 번째 놈이 또 자네 배에서 나오길래 냉큼 잡아다가 끌어올려 봤는데, 어이쿠 이게 웬일인지. 죽었다고 알려진 자네 부하가 아닌가 말이야. 이거 귀신이 되어서 달라붙어 다니는 거 아닌가 하고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몰라. 그래도 온몸에 난 상처에다가 소금을 잘 뿌려 놨으니 제아무리 귀신이라도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할 것 아니겠냔 말이야.”
크리브는 연신 얼굴근육을 움찔거렸으나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울리히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였다. 이미 식욕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고, 그간 마신 술로 취기가 올라올 만도 했지만, 그의 모습에서 취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방금 전에 또 하나 건졌는데 말이지. 이게 어쩐 일인가. 여자가 아니겠냐고. 배에 여자가 타면 불운을 불러온다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 그래서 부하들이 냉큼 버리자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왜인지 이 아가씨는 자네한테 보여 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기왕 버릴 것 여기 모인 다른 선장들의 쌓인 것이라도 좀 풀어 주고 버리는 게 좋지 않겠냐 싶어서 말이지. 크흐흐흐.”
“흐흐흐흐흐.”
“히히히히히.”
해적들은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울리히는 탁자에서 발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잡혀 온 사람들 중 유일하게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자에게 다가가 후드를 확 젖혔다.
후드 속에서 드러난 얼굴은 놀랍게도 아름다운 얼굴에 금발 머리를 소유하고 있는 여성이었다.
울리히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며 고개를 강제로 들게 했다.
“뭐, 여러모로 알아봤는데 재미난 걸 알아 버렸지 뭔가. 크리브 네가 단독으로 해적질할 때는 반드시 알테인 왕국의 상선을 대상으로 잡았다는 것. 그리고 다른 왕국의 상선을 해적질할 때는 네놈 혼자서 먹는 경우가 없다는 것도 말이지. 아마 일전에 말한 상선으로 꾸민 조사단을 털었다는 것도 알테인 왕국의 것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말이야.”
울리히는 눈앞의 여성을 자세히 뜯어보듯이 한쪽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살펴보았다.
“그리고 저기 왕가의 문장을 가진 덩치 큰 놈이 아마 그때 털었다고 하는 배에 있던 기사가 아닐까 싶은데 말이지. 아무튼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알겠는데…….”
잠시간의 뜸을 들인 울리히는 나머지 한 손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이 아가씨만큼은 도저히 모르겠단 말이야.”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 앞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그리고 옷을 움켜쥐고 찢어 내려는 찰나, 크리브가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싼 해적들이 일제히 자신들의 허리에 찬 칼을 움켜쥐며 경계를 했다.
뚜벅뚜벅 걸어서 울리히의 등 뒤에 선 그의 표정은 그림자가 져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상당히 굳어 있다는 것은 잡혀 있는 다섯 사람들의 눈에는 확실하게 보였다.
울리히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앞섶을 움켜쥐었던 손을 천천히 이동시켜 자신의 품속으로 옮겼다.
“이야∼ 울리히, 너무 고마운데? 사실 저 아가씨 내 마누라 삼으려고 데려왔었는데, 어지간히 저항이 심해야지. 아하하하. 대신 잡아 줘서 너무 고마운걸?”
한쪽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크리브가 환하게 웃으며 고마워하자 울리히는 휙 돌아섰다.
돌아선 그의 손에는 어느 사이엔가 단검이 하나 들려져 크리브의 목에 겨눈 상태였다.
“연기 따위 적당히 하시지! 이 마당에 네놈한테 더 이상 속아 넘어갈 놈은 한 놈도 없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달려드는 울리히였고, 그저 웃고 있는 상태에서 여전히 표정 하나 바꾸지 않는 크리브였다.
“그러니까 오해라니까. 확실히 그 당시 약탈을 하면서 저기 저치들을 포로로 잡았긴 했지. 워낙에 내 부하들의 손실이 커서 대신 내 부하로 삼아 볼려고 끌고 다녔단 말이지. 그리고 울리히 네가 염장질을 확실히 쳐 놓은 녀석이 잃어버린 내 부하랑 닮기는 한데, 잘 보라고. 그 녀석은 왼쪽 턱 부분에 점 세 개가 삼각형으로 나 있다고. 나도 처음 저 녀석을 잡을 당시엔 내 부하랑 너무나 똑같이 생겨서 놀랐다니까. 어째 한 놈 한 놈 사라진다 싶었는데, 도망치던 걸 네가 잡아 줬군. 아니, 어쩌면 일부러 그렇게 몰래 잡아간 건 아냐?”
크리브가 눈을 빛내며 잠깐 울리히를 노려보았다.
움찔하는 울리히는 자신의 가슴에 뭔가 딱딱한 것이 압박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슬며시 눈을 굴려 내려다보았고,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단검이 자신의 심장을 노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싹 붙어 있는 두 사람이어서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눈앞의 크리브는 태연하게 그리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단검을 꺼내 들어 자신을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 크크크크. 내가 설마 그럴 리 있겠나. 진작 포로가 있었다고 알려 줬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 아닌가. 크흐흐흐.”
울리히는 자연스레 한 발짝 물러섰고 크리브도 똑같이 물러섰다.
울리히의 단검은 크리브의 목을 노리고 있었기에 누구에게나 보였지만, 크리브의 단검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한 발짝 물러서면서 누군가 눈치채 주길 바란 울리히였지만 귀신같은 빠르기로 단검을 숨긴 크리브였고, 주변의 누구도 크리브가 단검을 꺼내 울리히를 위협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칼을 잡았던 해적들은 칼집에서 손을 놓고는 다시금 상황을 지켜보았다.
울리히가 물러서자 크리브가 방금 전의 금발 머리 여성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의 손이 들려 방금 전 울리히가 움켜쥔 그녀의 턱을 가만히 쓰다듬었지만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모습이었다.
“어이, 울리히.”
“왜 그러나, 크리브.”
“이 녀석들 나한테 넘기지 않겠어?”
“그건 곤란한데.”
“생각해 보라고. 내 배에서 감히 도망친 놈들이야.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넘기지?”
“그리 간단하게는…….”
“에잇! 애꾸 울리! 역시 네놈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 뭐라고? 크리브가 알테인 왕국의 왕자라고? 처음부터 울리 네가 하는 헛소리에 귀 기울인 놈은 하나도 없었다고. 생각해 보면 일국의 왕자님씩이나 되는 사람이 해적질해 먹으면서 사냐고. 그리고 우리가 크리브를 알게 된 지 벌써 4년이 넘었어. 생각해 보면 울리 네놈은 크리브가 나타날 당시부터 매우 싫어했지. 확실한 증거라기에 뭔가 했더니, 이게 뭐냐고. 난 더 이상 울리 네놈이 잔머리 굴리는 데 배우가 될 생각이 없어.”
딕이 화를 내며 끼어들자 여러 선장들이 딕의 말에 동조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휘익! 딕의 말이 맞아! 크리브나 울리나 둘 다 밥맛이지만 둘끼리 싸우는데 우리는 끼워 넣지 말아 줘! 샌드위치마냥 끼여서 잡아먹히고 싶진 않거든!”
“크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한 해적이 외치자 다른 해적들도 크게 웃었다.
분위기가 이렇게 되자 울리히는 자신의 뜻대로는 힘들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의 표정은 뭐 씹은 것마냥 일그러졌다.
“그래, 알았으니까 넘겨주지. 포로 관리 좀 잘해, 크리브. 쓸데없이 오해를 사잖나. 혹시나 네놈 말대로라면 사라진 40척의 배들도 있을 테지. 그 배들과 맞붙을 때는 크리브 네가 선봉에 서 줘야겠어. 그러기로 하겠다면 이 녀석들을 다 넘겨주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울리히였다.
“어, 그러지. 대신 울리히 너는 제일 뒤에 있어 주면 고맙겠군. 내 목에 칼을 들이대는 놈이 등 뒤에 있는 게 영 찜찜해서 말이야. 어느 순간에 내 등짝에 칼침 놓으려 들지 모르니까 말이지.”
“네가 선봉에 서 준다면야 그 정도야 쉬운 일이지. 크크크크.”
잠시 뒤 모였던 해적들은 각자 자신의 배로 하나둘씩 떠났고, 울리히도 그들 틈에 섞여 사라졌다.
다섯 명의 포로들 앞에 주저앉은 크리브의 등 뒤로 딕이 다가왔다.
“애꾸 울리가 너를 죽어라 싫어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는 너를 믿는다, 크리브.”
그는 크리브의 어깨를 툭툭 쳐 주고는 자신의 배로 돌아갔다.
주변을 가득 메우던 사람들이 사라지자 주변이 급격히 어두워졌으며, 크리브의 뺨에는 한 줄기 빛이 흘러내렸다. 어두워서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눈물이라는 이름의 빛이.

* * *

“율곡 이이함으로부터 30척가량의 대함대가 본국으로 향하고 있다는 전문입니다.”
“이제 슬슬 우리들 순서인가? 그동안 김유신함 혼자서 막아 내느라 힘들었을 테지. 1함대는 34. 22 지점에서 저들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대한제국 건국 이래, 해군 함대 편성이 이루어지고 첫 전투였다.
소규모로 침범하는 이들에게는 중형 잠수함인 김유신함만으로도 간단히 처리가 가능했으나, 이번은 이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무려 30척의 대함대가 밀고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포인트 지점의 연락에 따르면, 특정 국가의 함대가 아닌 해적들이 뭉쳐서 오는 것이라고 했다.
국가 간의 충돌이라면 상당히 신중해야 했지만, 상대는 사정 따윈 봐줄 필요가 없는 해적이었다. 다만, 아무리 해적이라고 할지라도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것은 최대한 억제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21세기의 과학과 마법이 융합하여 그 어느 나라에도 없는 훌륭한 문명을 이룩하고 있는 대한제국이지만, 근본적으로 인력 부족 국가였다.
1개 분대가 투입되면 1개 사단을 상대할 수도 있을 만큼의 화력이 있지만, 그만큼 한 명 한 명의 인력 손실이 크게 작용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1함대는 예정된 지점에서 해적선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고, 아침 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수평선 너머로부터 해적선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삼각형으로 편대를 꾸려 돌진해 오는 해적선을 상대로 10척의 1함대는 U자 형태로 길게 늘어선 상태였다.
해적들은 자신들이 잊혀진 땅에 도착하자마자 10척의 배가 맞이하는 것을 보았고,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파수꾼은 앞을 살폈지만 마스트 위에 휘날리는 깃발은 지금껏 본 적도 없는 깃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