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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제천 1권 (8화)
보통 사람이라면 타는 듯한 열기에 혀를 빼어 물었을 법한 열기였다. 백랑의 호위를 받고 있는 철연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본래는 이 자리에 없어도 무방한 그녀지만 대막의 힘을 보여 주겠다는 혈무악의 억지에 불려 나와야 했다.
“흑서, 오늘 날씨 죽이지 않냐?”
입술을 말아 올린 혈무악이 대뜸 흑서를 향해 물었다.
“뭐, 나쁘지는 않네요…….”
말끝을 흐린 흑서가 백랑과 적돈, 혈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 양반 오늘 왜 저렇게 기분이 좋아?’
동고동락한 지가 어언 십 년이 넘어가는 그들이다. 흑서의 눈빛에 담긴 말뜻을 이해 못할 그들이 아니었다. 백랑, 적돈, 혈갈이 흑서와 마찬가지로 눈빛으로 답했다.
‘몰라.’
거의 동시에 이어진 세 명의 대답에 흑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요 며칠 동안 늙은이 그것처럼 축 처져 있던 양반이 저렇게 기운을 차리는데 의문이 이는 것은 당연했다.
“저, 두목…….”
“응?”
잠시 멈칫한 흑서가 조심스레 물었다.
“오늘 뭐 기분 좋은 일 있으십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아니 설령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자라도 자신을 죽이기 위해 토벌단이 왔다고 한다면 으레 긴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혈무악에게서 그런 기색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왜? 기분 좋아 보여?”
“예.”
‘그것도 무지요’라는 말은 끝끝내 하지 못한 흑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올려 자신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매만진 혈무악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너희들도 내가 기분 좋아 보이냐?”
혈무악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각 마적들의 수장들이 모여 있었다. 단 한 명, 가장 왼쪽에서 무리를 지휘하기로 한 혈살마옹만이 보이지 않았다. 혈무악의 물음에 멈칫한 수장들이 답했다.
“예.”
“좋아 보이십니다.”
수장들의 대답 또한 같았다.
“흐음. 그래.”
신음을 흘린 혈무악이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싸움이라 그런가 보지, 뭐. 하하하.”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 혈무악이 턱을 쓰다듬으며 눈앞에 볼록 솟아난 모래언덕, 그 너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저 너머에 놈들이 있단 말이지…….”
“예. 아마 이제 막 모래언덕을 지나려고 할 것입니다.”
“흐음.”
흑서의 물음에 혈무악이 신음을 흘리며 안력을 돋워 모래언덕을 주시했다.
“응?”
묘한 눈빛의 혈무악이 미간을 찌푸렸다. 모래언덕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검은 그림자 때문이었다.
“저거 뭐야?”
혈무악의 물음에 흑서가 안력을 돋워 검은 그림자를 주시했다.
“사람 같은데요?”
“사람?”
“예. 아무래도 놈들의 정찰 같은데요?”
흑서의 말에 혈무악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때쯤, 검은 그림자 또한 마적 무리를 발견했는지 주춤하고 있었다. 쩝 하고 입맛을 다신 흑서가 말했다.
“저거 저대로 보내면 골치 아플 텐데.”
“제길.”
한바탕 욕설을 내뱉으며 낙타에서 내린 혈무악이 앞으로 나서며 말을 이었다.
“야, 애들 나갈 준비 하라고 해.”
“예.”
고개를 끄덕인 흑서가 몸을 돌려 각자 마적들의 수장을 비롯한 다른 마적들을 향해 외쳤다.
“막주가 연장 들고 작업 나갈 준비 하란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던 혈무악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구겨진 얼굴 그대로 돌려 흑서를 바라본 혈무악이 살기를 흘렸다.
“저건 꼭 말을 해도…….”
“헤헤.”
애써 혈무악의 시선을 피한 흑서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피식 웃어 보인 혈무악이 허리춤에 걸린 도를 꺼냈다.
찌―잉.
맑은 소리와 함께 뽑힌 낭아도가 빛을 번뜩였다.
스윽.
한바탕 무게를 잡은 혈무악이 검은 그림자를 향해 도를 겨눴다.
휘오오오.
한바탕 불어온 모래바람이 혈무악의 몸을 휘감았다.
잠자코 구경하던 흑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 양반 저거 폼은 왜 잡는 거야?”
흑서의 말에 얼굴을 찌푸린 백랑이 의문 가득한 얼굴로 혈무악을 바라봤다. 잠자코 혈무악을 주시하던 백랑의 얼굴이 새하얗게 굳었다.
“서, 설마!”
탄식과도 같은 외침을 토해 낸 백랑이 경악 어린 눈으로 혈무악을 바라봤다.
“뭐야, 왜 그러는데?”
“두목이 무슨 짓을 하기에 그러는 거야?”
흑서와 적돈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다른 수장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어지는 물음에 굳은 얼굴의 백랑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살기(殺氣), 살기만으로 상대를 해하려 하고 계신다.”
“뭣!”
“그런!”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휙 소리 나게 고개를 돌려 혈무악을 바라봤다. 자세히 보니 혈무악의 손에 쥐어진 도를 중심으로 주변의 풍경이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어마어마한 살기로 인한 현상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저, 저놈!”
혈풍검 우공산이 두 눈을 치켜뜨며 검은 그림자를 가리켰다. 모두가 내력을 끌어올려 안력을 돋워 검은 그림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검은 그림자는 흉한 외모의 꼽추 사내였는데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쿠르륵.”
부들부들.
눈은 허옇게 뒤집어져 있었고 입에서는 게거품이 솟구쳤으며 사지는 덜덜 떨려 그 기능을 상실했다. 저 상태로 조금만 시간을 지체한다면 필사(必死)였다.
“살기만으로 상대를 죽이려 하시는 건가……!”
“저게 말이 되는가!”
모두가 탄식하고 또 경악했으며 끝내는 경외했다.
‘막주의 무공은 이미 전대 막주를 뛰어넘었다!’
모두의 눈이 들끓었다.
이내 경련을 일으키는 검은 그림자 뒤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또다시 솟구쳤다. 아마 검은 그림자가 연락이 없자 데리러 온 자들인 듯했다.
‘설마…….’
새롭게 나타난 두 명 또한 살기로 해할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모두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것도 잠시, 곧 혀를 차며 몸을 돌리는 혈무악의 행동에 모두의 얼굴이 멍하게 풀렸다.
“의형살인의 경지는 조금 멀었군.”
혈무악의 입에서 나온 작은 중얼거림에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의형살인(意形殺人).
문자 그대로 의지로 사람을 죽인다는 경지다. 그 경지가 많이도 아니고 ‘조금’ 멀었단다. 모두가 얼이 빠지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이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제자리로 돌아와 낙타에 올라탄 혈무악이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오현, 오칠.”
“예!”
오현, 오칠 형제가 황급히 혈무악의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너희 화살에는 눈이 하나 더 달렸다지? 한번 보고 싶군.”
혈무악의 말에 멀뚱히 있던 오현, 오칠이 곧 아! 하는 탄성을 터트렸다.
막주는 자신들을 시험하는 것이다!
자신들은 둘!
솟구친 인영들 또한 둘!
“보여 드리겠습니다!”
오현, 오칠이 동시에 답하며 재빨리 시위에 철시를 먹였다.
키―잉.
철시가 토해 내는 작은 비명.
터―엉.
시위가 그 몸을 희생하여 철시를 쏘아 보냈다.
피릿.
퍽.
아무런 소리 없이 허공을 가른 두 대의 화살이 거의 동시에 두 개 인영의 머리에 박혔다. 제법 먼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화살에 눈이 달린 양, 화살은 정확히 목표를 관통했다.
“과연!”
혈무악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오현, 오칠 형제를 향해 고개를 돌린 혈무악이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너희 별호는 삼안신궁(三眼神弓)이다!”
“가, 감사합니다, 막주!”
혈무악이 직접 자신들의 별호를 지어 줬다는 사실에 오현, 오칠이 오체투지(五體投地)했다.
“하하하!”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 혈무악이 도를 들어 모래언덕 너머를 겨눴다. 거칠게 경련하던 검은 그림자는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도망가는 모습이 꼴사납기 그지없었다.
“삼안신궁! 놈들에게 대막의 화살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 줘라!”
“예!”
힘찬 대답을 터트린 오현, 오칠이 통천대 백여 명의 선두에 서서 시위에 세 대의 화살을 먹였다.
“삼시(三矢)!”
처처처척.
백 명의 궁사가 대열을 갖췄고 백 개의 활이 그 자태를 뽐냈으며 그 활에 걸쳐진 삼백 개의 핏빛 철시가 형형한 살기를 내뿜었다.
끼―이익.
통천대의 힘을 이기지 못한 활이 비명을 질렀다. 통천대 모두의 팔뚝 위로 푸른 힘줄이 불거졌다.
“바―알!”
피―피피피피핑.
시위에 걸쳐진 삼백 개의 화살이 허공을 찢어발기며 모래언덕 너머를 향했다.
쐐―애애애액.
전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괴수의 울음소리.
잠시간의 고요.
이어지는 비명!
퍼퍼퍼퍽!
“크아아악!”
“아아악!”
화살이 박히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살을 꿰뚫는 소리가 언덕 너머에까지 들렸다.
채―앵.
혈무악의 낭아도가 태양빛을 받아 그 빛을 번뜩였다.
“우리는 대막의 사내들이다! 중원의 조무래기들에게 대막 사내의 맛을 보여 주자!”
팍.
꾸허어엉.
혈무악의 낙타인 광풍이 배에 가해진 혈무악의 발길질에 비명을 지르며 모래언덕을 향해 내달렸다.
“제기랄. 누가 그 아비에 그 아들 아니랄까 봐 혼자 튀어 나가는 저 지랄은 똑같네. 뭣들 하냐! 우리도 대막의 사내들이다! 놈들에게 대막 사내의 맛을 보여 주자!”
투덜거리며 불평을 토해 낸 흑서가 낙타의 배를 차고 혈무악의 뒤를 따랐다.
“우와아아아!”
“죽여라!”
혈무악의 뒤를 따라 흑서가, 흑서의 뒤를 따라 삼천의 무인들이 모래먼지를 피워 올리며 진격했다.
그 모습이, 그 기세가 흡사 사막의 모래폭풍과도 같았다.
“크하하하하!”
매화검수와 매화표국의 무인들을 향해 질주하는 혈무악이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저, 저게 뭐야!”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검은 물체에 청현이 경악 섞인 비명을 터트렸다. 청현의 두 눈이 찢어질듯 부릅뜨였다. 겨우 낙타 한 마리와 그 위에 올라탄 사람 한 명이었지만 풍기는 기세만큼은 수만 마리 야생마가 질주하며 만들어 내는 그것과 같았다.
“모, 모두 자리를 고수해라!”
“대열을 구성해라!”
청현과 유영철이 외치자 무인들이 우왕좌왕하며 자리를 찾았다. 그 모습이 흡사 호랑이 떼를 보고 경기를 일으키는 사슴 무리 같았다. 혈무악이 새하얀 이가 보이도록 웃었다.
꽈악.
도병을 움켜쥔 혈무악의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하하하하!”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에 혈무악이 다시 한 번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흉흉한 살기가 혈무악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 기세가 얼마나 섬뜩한지 매화검수 여럿이 검을 떨어트리는 추태를 부릴 정도였다.
광풍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주인의 흥분이 그대로 전해진 것인지 질펀한 침을 한가득 입에 문 광풍이 우렁찬 포효를 터트렸다.
꾸허어엉!
“크윽.”
“무, 무슨…….”
한낮 미물이 터트릴 수 없는 포효에 모두가 귀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하, 하, 하!”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혈무악이 웃음을 지우지 않고 광풍의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우와아아! 막주를 따라라!”
“중원의 조무래기들에게 대막 남자들의 힘을 보여 주자!”
“놈들의 목을 따 줘라!”
우르르르르.
일진광풍과 함께 모래언덕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삼천의 마적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기세가 겨우 한 명인 혈무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매화검수와 매화표국 무인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거, 겁먹지 마라. 그래 봤자 제대로 된 무공도 익히지 못한 마적들이다!”
독려하는 청현의 목소리 또한 은은하게 떨리고 있었다.
“크크크.”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기묘한 기분에 혈무악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비릿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할짝.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할짝이는 혈무악의 두 눈동자 위로 붉은 기운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