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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제천 1권 (9화)


끓어오르는 흥분으로 혈무악이 익힌 천잔광혈심법이 스스로 그 힘을 발휘한 탓이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한 적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속이 근질거렸다.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비릿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두근…….
“크크크.”
가슴을 간질거리게,
두근, 두근…….
“크하.”
그리고 머리를 맑게 해 주는 이것은,
두근, 두근, 두근…….
“크하하하!”
분명한,
두근, 두근, 두근, 두근!
“하하하. 죽이고 빼앗아라!”
살의(殺意)!
“우리가 바로 대막의 사나이들이다!”
꾸허어엉.
상대를 죽이고자 하는 너무나도 지독한 살의!
혈무악의 가슴 깊은 곳, 꽁꽁 숨어 있던 그 비릿한 살의가 포효를 내지르며 표면 위로 부양해 그 광포한 기운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그 섬뜩한 기운이 얼마나 대단한지 혈무악의 뒤를 따르던 마적들이 흠칫할 정도였다.
“하앗!”
부―웅.
힘찬 기합을 터트린 혈무악이 꼬나 쥔 도를 가로로 크게 휘둘렀다. 도를 따라 주욱 늘어난 도기(刀氣)가 혈무악의 도에서 뿜어져 무리를 향해 쏘아졌다. 패도적인 기세를 물씬 풍기는 부채꼴 모양의 붉은 도기에 무리가 대경실색하며 비명을 질렀다.
“피, 피해……!”
콰―르릉!
때늦은 청현의 경고가 혈무악의 도기가 만들어 낸 폭음에 먹혔다.
기폭(氣爆)의 묘리가 담긴 절묘한 수법이었다.
“으아악!”
“크악!”
비명을 배경으로 피와 육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혈무악이 뿜어낸 도기가 무리의 중앙에서 터졌다는 것이 이유겠지만 매화검수와 매화표국의 무인들이 방진을 구성하기 위해 한곳으로 지나치게 밀집해 있었기에 혈무악의 수법이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던 것이었다.
“이 정도 공격에도 쩔쩔매는 거냐, 버러지들아!”
어느새 무리의 지척에 다다른 혈무악이 성난 사자후를 터트리며 도를 들어 올렸다. 실 같은 기운이 혈무악의 도를 타고 흘렀다.
“히익.”
무리의 선두에 서 있어 졸지에 혈무악과 마주하게 된 유영철이 신음을 흘리며 주춤거렸다. 그 꼴사나운 모습에 혈무악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다 못해 작은 반항이라도 해야 하건만, 적들은 공포에 질린 돼지새끼들처럼 도살자의 손길을 기다리고만 있다. 혈무악의 가슴을 한껏 채우고 있던 살의가 차갑게 식어 분노로 변했다. 혈무악의 두 눈에서 시퍼런 귀화(鬼火)가 이글거렸다.
“버러지 같은!”
“흐에엑.”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혈무악의 기세에 미처 뒤로 피하지 못한 유영철이 비명을 지르며 양손을 마구 휘저었다.
징징.
퍼퍼―엉!
중저음의 비명과 함께 유영철의 양손에서 푸른색의 선명한 기운이 마구 뛰쳐나왔다.
화산파의 속가제자로 들어가 화산파의 무공을 익힌 형 유영혁과는 달리, 유영철이 익힌 것은 철산청호장(鐵山靑虎掌)이라는 장법이었다. 하지만 지금, 철산을 호령하던 푸른 호랑이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푸른 고양이뿐이었다.
쐐애액.
푸―웅.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에 이어 푸른색 기운을 자르는 둔중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허공에 바스러지는 푸른색 기운의 틈새로 뼈가 시릴 듯한 은광이 번뜩였다.
서걱.
“켁?”
의문 어린 단말마, 그것이 폭풍장 유영철의 마지막 한 마디였다.
투욱―
두 눈 부릅뜬 유영철의 머리가 미끄러지듯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졸지에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머리를 찾기라도 하듯 손을 휘적거리며 몇 번 휘청이다 털썩 무릎을 꿇었다.
푸화아악.
뒤늦은 피분수가 매끄럽게 잘린 목에서 뿜어졌다.
“대, 대주가 죽었다!”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못하고……!”
어느새 혈무악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무리가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그들 모두의 눈가에 경악이 떠올랐다.
폭풍장이라고 하면 화산파가 있는 섬서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고수고, 손가락까지는 아니지만 손가락에 발가락까지 꼽는다면 그 안에 들어가는 고수였다. 그런 그가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못하고 일도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모두가 겁에 질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청현은 그가 한눈에 마적 무리의 수장임을 눈치 챘다.
“네놈이 광풍사의 두목인 대막광마(大漠狂魔) 혈무악이로구나!”
“대, 대막광마?”
살기등등하던 혈무악의 얼굴이 멍하게 풀렸다.
대막광마라니? 자신의 별호는 대막천마, 하늘의 마귀였지 대막광마(大漠狂魔), 미친 마귀가 아니었다.
“이 미친놈아, 대막광마? 내 별호는 대막천마다!”
“천마?”
혈무악의 말에 잠시 멈칫한 청현이 곧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옳아, 네놈이 마교와 한패였구나. 어쩐지. 네놈들 같은 마적단의 손에 대사형께서 쓰러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네놈은 마교에서 보낸 고수였구나!”
동문서답이라고,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는 청현의 말에 혈무악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냐. 마교라니, 왜 내가 그런 칙칙한 놈들하고 한패란 말이냐!”
“시치미 떼도 소용없다. 한낱 마적 따위가 어떻게 그런 무공을 소유한단 말이냐!”
“한낱 마적?”
혈무악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오냐, 이 새끼야. 한낱 마적한테 어디 한번 죽어 봐라!”
한바탕 욕설을 내뱉은 혈무악이 무리를 향해 멈췄던 질주를 이었다.
“놈들은 더러운 마교의 주구들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놈들을 처단해 정도의 빛을 밝히자!”
낯간지러운 소리를 지껄인 청현이 선두로 나서 검을 휘둘렀다.
촤르릉―!
동시에 메마른 대막 모래 위에 촉촉한 매화꽃이 하나 둘 만개하기 시작했다.
매화검수들만이 익힐 수 있다는 이십사수매화검(二十四手梅花劍)이었다.
“음?”
코를 찌르는 달콤한 향기에 살기등등한 혈무악이 고개를 갸웃했다.
피비린내 말고는 아무 향기도 나지 않는 대막에서 달콤한 꽃향기라니?
혈무악의 의문이 깊어질 무렵, 어느새 다가온 혈살마옹이 입을 열었다.
“당황하지 말거라. 본래 화산파의 무인들은 일정 경지를 넘어서면 검향(劍香)이라는 것을 내뿜을 수 있다고 하더구나. 네가 흔들리지만 않는다면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게다.”
“한 마디로 꼼수군요.”
피식 웃은 혈무악이 광풍의 배에 박차를 가했다.
“받아라, 마교의 악적!”
“계집처럼 꽃향기나 내뿜는 놈이 말이 많구나!”
걸죽한 욕설을 교환하고 그 뒤를 이어 병장기가 부딪쳤다.
채―앵.
날카로운 쇳소리와 노란 불꽃이 번쩍였다.
“크읍.”
주륵.
검째로 짓누르는 혈무악의 힘에 청현이 신음을 삼키며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낙타 위에서 도를 내리쳤다는 위치적 장점도 있었지만 본래 부드러움을 중시하는 화산의 검이 패도적인 혈무악의 도를 버틸 리가 만무했다.
“이익.”
팟―!
잇소리와 함께 가볍게 검을 튕겨 뒤로 몸을 날린 청현이 무릎을 굽혔다 튕기듯 솟구쳐 혈무악을 향해 쇄도했다.
“받아라! 매화만개(梅花萬開)!”
칭칭칭칭칭―
낭랑한 외침과 함께 쏘아진 청현의 검이 낭창낭창 휘어지며 현란하게 움직였다. 코를 찌르는 짙은 향기와 함께 사방에서 매화꽃이 들이닥쳤다.
겉모습은 아름다운 꽃이지만 본능적으로 매화꽃 하나하나가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을 담고 있음을 느낀 혈무악이 광풍의 등에서 번쩍 솟구쳐 무차별적으로 도를 휘둘러 거센 도풍을 뿜어냈다. 세찬 도풍에 들이닥치던 매화꽃이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그 힘을 잃지 않고 허공의 혈무악을 향해 쇄도했다.
“하앗!”
탁.
기합과 함께 오른발을 이용해 왼 발등을 밟아 한층 더 높은 허공으로 솟구친 혈무악이 방향을 바꿔 바닥을 향했다.
“왜 초식명은 외치고 지랄이냐!”
슈―웅.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는 혈무악이 도로 일신의 기운을 집중했다.
쿠르르릉.
혈무악의 도신을 따라 흉포한 광풍이 일었다.
“어디 이것도 한번 받아 봐라!”
버언―쩍.
혈무악의 도에서 뿜어 나온 적광이 세상천지를 밝혔다. 마주한다면 실명할 것만 같은 빛의 세기에 모두가 눈을 감았다.
살형도법의 두 번째 초식인 ‘광은살(光隱殺)’이었다. 그 무지막지한 빛 속에서 오직 한 명, 그 빛을 마주한 청현만이 그 빛 속에 숨겨진 실체에 이를 꽉 물고 검을 곧추세웠다.
“크윽. 천리매화향(千里梅花香)!”
츙츙츙츙츙―
곧게 뻗은 검이 방금까지의 곧음은 거짓이었다는 듯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매화의 꼬리를 만들었다. 청현이 알고 있는 초식 중, 가장 강맹한 초식이며 또 지금의 청현을 있게 만든 한 수이기도 했다.
우르르릉.
콰―앙!
적광 속에 숨겨진 힘의 실체가 매화로 이루어진 고리를 때렸다.
천지를 뒤흔드는 거센 폭음과 함께 청현의 입에서 검은 피가 푸확 하고 터졌다. 방금 전의 격돌로 인해 입은 내상의 결과였다. 그에 비해 혈무악은 가볍게 바닥에 착지하며 여유롭게 몸에 묻은 모래를 털기까지 하고 있었다.
“사형!”
“청현 사형!”
넋 놓고 구경하던 매화검수들이 화들짝 놀라며 청현을 향해 달려갔다.
“모두 멈춰라!”
비틀거리며 신색을 수습한 청현이 다가오는 매화검수들을 향해 손을 뻗어 제지했다. 입가에 묻은 피를 닦은 청현이 검을 들어 혈무악을 겨누며 입을 열었다.
“비록 흉악한 마교의 악적이라고 하지만 나는 대화산파의 무인이다. 나는 정정당당한 대결을 원한다. 화산파의 무인들이 한 명을 상대로 비겁한 짓을 했다는 소리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
“사, 사형……!”
“흐윽. 사형이……!”
비장함이 느껴지는 청현의 말에 매화검수들은 물론 매화표국의 무인들 또한 눈을 빛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정파의 무인이다!’
청현을 바라보는 모두의 가슴속에 공통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단 한 명, 황당한 얼굴의 혈무악은 제외였다.
“이 미친놈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비아냥거리는 혈무악의 말에 모두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검을 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사형을 비웃지 마라! 저분이야말로 진정한 정도 무림의 협객이시다!”
“네놈 같은 마적과는 질적으로 다른 분이다!”
모두가 분기탱천해 혈무악을 헐뜯었다.
모두의 분노가 점차 거세질수록 혈무악의 입가에 자리 잡은 미소가 짙어졌다.
“풋.”
마침내 혈무악의 입술을 비집고 거센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하!”
실소로 시작된 웃음은 결국 그를 한참이나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리게 만들었다.
“아이고 웃겨, 크큭.”
“우, 웃지 마라!”
챙.
보다 못한 매화검수 한 명이 날카롭게 외치며 검을 꺼내 혈무악을 겨눴다. 동시에 혈무악의 웃음이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이내 그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정정당당? 네놈들이 지금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지금 네놈들이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혈무악이다. 비겁하고 난폭한 마적들을 이끄는 막주 혈무악이란 말이다!”
혈무악의 두 눈에서 붉은 번개가 요동쳤다.
“감히 나에게 정정당당? 하하하. 중원의 놈들은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는 병신들이라고 하더니, 역시 백랑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군.”
“네놈 같은 마적이 정정당당이란 말이 무엇인 줄 알고는 있느냐!”
“몰라.”
단칼에 매화검수의 말을 자른 혈무악이 씨익 웃었다.
“모른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고 말이야. 아, 그래.”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혈무악이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자신의 뒤편을 가리켰다.
“저것들 보이냐?”
혈무악의 손을 따라 시선을 이동한 무인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저럴 수가.”
“대체 몇 명이…….”
혈무악의 손이 가리키는 곳에는 삼천 남짓한 마적들이 저마다 흉흉한 살기를 내뿜으며 언제라도 진격할 듯 각자 병장기를 꼬나 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