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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제천 1권 (10화)
“내가 손짓만 하면 저것들이 당장에 달려들어 너희 몸을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찢어 놓을 거다.”
살기 어린 혈무악의 말에 모두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혈무악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도 나는 혼자서 너희들을 상대했다. 어때, 나 정정당당하지? 겨우 몇백 명 뒤에 두고 싸운 너희 사형보다 삼천 명 두고 싸운 내가 더 정정당당하지? 그렇지?”
혈무악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혈무악의 독설이 이어졌다.
“네놈들이 사형이 협객이라면…… 음, 그래. 나는 대막의 부처쯤이 좋으려나? 크크크. 좋은데? 대막천마 대신 대막천불(大漠天佛)이라는 별호도 괜찮겠어. 크크.”
이어지는 혈무악의 조롱에 모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뚝 하고 조롱을 멈춘 혈무악이 도를 들어 무리를 겨눴다. 무리가 움찔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내 손짓에도 놀라는 것들이 감히 정정당당?”
저벅.
혈무악이 한 발자국 내딛자 무리가 한 발자국 물러섰다.
“암기를 써라, 활을 날려라, 독을 사용해라, 암습을 해라, 함정을 파라, 동료를 방패 삼아 내 목숨을 노려라.”
저벅.
한 발짝 내디딘 혈무악이 우뚝 멈췄다.
씨익, 하고 혈무악의 새하얀 이가 보였다.
“정정당당? 그딴 건 개나 줘라. 나를 죽이지 못하면 너희가 죽는다. 죽기 싫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죽여라.”
지―잉.
혈무악의 도가 낮게 울었다.
“너희들이 마주하고 있는 남자는 너희들이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는 상대다.”
잠시 숨을 고른 혈무악이 숨을 내쉬며 자세를 낮췄다.
“그 남자가 바로 나다. 내가 바로 대막의 천마, 혈무악이다.”
선포와도 같은 혈무악의 말.
삼백 무인들의 눈에 공포가 자리 잡았다.
第三章 두 개 중 하나
“무기를 들어라!”
저벅.
흠칫.
혈무악이 또다시 한 발자국 내딛자 마찬가지로 무리가 몸을 떨며 한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죽이지 못하면 죽겠다는 각오로 덤비란 말이다!”
“흐이익.”
“크윽.”
혈무악의 몸에서 폭사된 기세에 무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비루먹은 개 같은 그 모습에 혈무악의 몸에서 뿜어지던 기세가 힘을 잃었다.
“중원의 저력, 겨우 이것이었던가…….”
혈무악의 입에서 씁쓸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빌어먹을 양반…….”
찌―잉.
조소 섞인 읊조림과 함께 도를 집어넣은 혈무악이 몇 걸음 움직여 한쪽에 멀뚱히 서 있는 광풍의 위에 올라탔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광풍에 올라탄 혈무악이 스윽 하고 시선을 돌려 무리를 주시했다.
두 명의 수장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 모두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혹시나 살 수 있을까 하는 더러운 희망.
“빌어먹을…….”
그 모습에 절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이래서 중원 새끼들을 싫어한다니까…….”
물론 따지고 들어간다면 혈무악의 뿌리 또한 중원이지만 평생을 대막에서 보낸 혈무악에게 그런 자각이 있을 리가 없었다. 가볍게 광풍의 배를 찬 혈무악이 뒤에서 대기하는 마적들을 향해 움직였다. 동시에 무리의 얼굴에 떠오른 희망이 짙어졌다.
피식.
뒤통수를 뚫을 듯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을 무시한 혈무악이 차갑게 조소를 지었다.
“쓸어버려.”
“……!”
작은 중얼거림, 하지만 결코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쪽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고 반대쪽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모두 돌겨―억!”
꾸―허어엉!
우공산의 외침과 동시에 천여 명에 가까운 혈풍대가 낙타의 배를 걷어차자 천여 마리가 넘어가는 낙타가 동시에 울음을 터트렸다. 얼얼한 귀에 살짝 미간을 찌푸린 혈무악이 정면에서 들이닥치는 천여 마리의 낙타와 그에 올라탄 마적들의 위압적인 모습에 짐짓 흥분한 얼굴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이놈들이 어딜 봐서 세외사세 중 말단이란 거야?’
마적 무리에서 튀어나온 삼백 개의 핏빛 덩어리가 아우우우 하는 울음을 터트리며 무리를 향해 쇄도했다. 혈랑대가 이끄는 혈랑들이었다.
“흐에에엑. 사, 살려 줘!”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
“마, 만화천검진을…… 아니, 옥청검진(玉淸劍陳)을!”
“모두 모여!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무리의 반응은 혈무악과 대치할 때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았다.
그나마 청현이 무리를 제어하고 있지만 상처 입은 그가 할 수 있는 제어란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매화검수들이 매화표국의 무인들보다는 훨씬 더 침착하게 청현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현란한 움직임으로 금세 대열을 바꿔 또 다른 검진을 구성 한 매화검수들은 각자의 검을 통해 시퍼런 검기를 뽑아냈다. 동시에 지독한 매화향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크와아앙!
컹컹!
역시나 대막 동물들의 먹이사슬의 정점에 군림하는 혈랑들답게 몇 호흡도 지나지 않아 무리의 면전에 나타난 혈랑들이 침을 흘리며 아가리를 열고 무리에게 들이닥쳤다.
크와앙.
우드득.
“으아악!”
번뜩이는 송곳니는 물리면 뜯기는 것이 살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실제로 혈랑의 이빨과 전율스러운 턱 힘은 살이 아니라 뼈를 뜯는다. 물리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산진(散陳)!”
촤르르륵.
매화검수들이 둥그렇게 흩어지며 공간을 만들자 그 안으로 혈랑들이 들이닥쳤다. 한 자루 검에 의지해 후방에서 명령을 내리던 청현이 힘차게 외쳤다.
“합진(合陳)!”
우르르르.
둥그렇게 퍼져 있던 매화검수들이 검을 세우며 한곳으로 모였다.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는 혈랑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푸푸푸푹.
깨깽갱!
깨깽!
사방에서 들이닥친 검들이 수십 마리 혈랑들의 목숨을 끊었다. 대막에서는 마적들 다음으로 공포의 대명사라 불리는 혈랑들치고는 어이없는 최후였다. 제아무리 혈랑이 강하다고 하지만 검기를 수족처럼 다루는 매화검수들의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하지만 매화표국의 무인들은 아니었다.
컹컹!
크와앙!
“으아악!”
“크악!”
짐승들로 이루어진 핏빛 파도가 매화표국의 무인들을 덮쳤다.
표국의 정예무인들이라고 하지만 애초에 이류에서 일류 사이의 무인들이다. 매화검수들과 비교해서는, 아니 비교 자체가 부끄러운 무인들이었다.
크와앙!
“크아악!”
한 명의 무인이 쓰러지면 어느새 나타난 혈랑이 무인의 다리를 물어뜯는다. 애초에 도망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그 무섭고도 섬뜩한 조치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혈랑들의 공격, 아니 사냥이 시작된다.
한 명의 위로 수 마리 혈랑이 달라붙어 무작정 물어뜯는 것이다. 살은 물론 근육과 뼈마저 뜯어 버리는 턱뼈는 웬만한 병기 그 이상의 힘이었다.
그 전율스러운 짐승들에 반격하는 무인들이 있는 한편, 언제 어디에나 있듯, 도망치는 이들 또한 존재했다.
“저걸 어떻게 상대하란 거야! 모두 도망쳐!”
“흐에엑. 살려 줘!”
주로 후방에 있던 매화표국의 무인들이 허둥거리며 경공을 발휘해 도주했다.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혈랑들을 따돌리기에는 충분한 속도였다.
하지만 그들 또한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바―알!”
두 개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우렁찬 외침.
그것은 곧 그들의 목숨을 종지부 찍는 외침이었다.
쐐―애애애액.
고막을 때리는 거조의 울음소리.
모두가 저 소리의 정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창공을 가로지른 화살들이 무리를 건너 정신없이 도망치는 무리들을 노렸다.
푸―푸푸푸푹!
“크아악!”
“커억.”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핏빛 철시들이 십수 명으로 이루어진 비겁자 무리의 몸을 꿰뚫었다. 수백 대의 화살은 도망치는 자들을 한 명도 제외하지 않고 모두 꼬치처럼 만들었다.
푸들푸들.
두텁고 기다란 철시에 꿰뚫린 무인들의 시체가 작은 경련을 일으켰다. 비겁한 도망자들은 죽어서도 편히 바닥에 몸을 누이지 못했다.
“우―와아아!”
“죽여라―아!”
두두두두두.
어느새 무리의 전면에 들이닥친 폭풍대가 살기 어린 함성을 지르며 병장기를 꼬나 쥔 손에 힘을 줬다. 푸른 핏줄이 불뚝 불거졌다. 폭풍대의 뒤로 나머지 마적들이 각자의 함성을 내지르며 쇄도했다.
“바―알!”
투―투투투퉁.
쐐―애애애애액.
두 개의 고함, 그리고 탄력 있는 소리, 또다시 이어지는 악몽의 울음소리!
“하하하하하!”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에 혈무악의 입에서 앙천광소가 터졌다.
두두두두두!
삼천에 가까운 마적들이 질주하며 만든 모래먼지가 가득했지만 혈무악의 얼굴에 서린 자부심을 가리지는 못했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웃음에 혈무악이 연이어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하하……?”
웃음소리가 점차 작아지는가 싶더니 마침내 혈무악의 입이 굳게 닫혔다.
부리부리한 두 눈이 빠르게 전장을 뒤졌다. 익숙한 인물들이 혈무악의 두 눈에 잡혔다. 하지만 단 두 명, 너무나 익숙한 두 명이 보이지 않았다.
“흑서? 백랑?”
이 자리에 없는 두 명의 이름을 중얼거린 혈무악이 고개를 쳐들었다.
“철연화!”
그녀 또한 이 자리에 없었다.
혈무악의 시선이 자연히 모래언덕 너머를 향했다.
* * *
“아…….”
홀로 질주하는 혈무악의 모습에 철연화의 입에서 기묘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과거 삼국시대의 장군이었던 장비가 다리 위에서 조조의 대군과 대립했을 때나 나타났을 일기당천의 기세가 혈무악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철연화의 몸을 자극했다. 혈무악의 뒤를 따라 움직이는 마적들의 모습 또한 장관 중의 장관이었다.
그 모든 것이 철연화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과연…….’
한낱 마적 집단인 그들이 어째서 세외사세라는 호칭을 받는 것인지 그제야 납득이 갔다. 처음에는 그녀도 납득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모습은 중원의 구파일방, 오대세가와 비교해도 처지지 않았다.
“응?”
잠자코 마적들을 주시하던 철연화가 자신과의 거리가 좁혀지는 검은 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내 점이 점차 가까워짐에 따라 철연화의 안색 또한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처음에는 의문이었던 것이 놀람, 경악, 그리고 갈등으로 변했다.
검은 점의 정체는 바로 흑서였다.
“하하. 소저, 여기서 뭐 하고 계셨습니까?”
어느새 철연화의 면전까지 다가온 흑서가 웃으며 물었다.
“아…….”
철연화가 주춤하며 흠칫 몸을 떨었다.
“응? 왜 그러십니까?”
수염을 비비 꼬던 흑서가 낙타에서 내려 철연화를 향해 한 발자국 내디뎠다.
“다가오지 마세요!”
낙타 위의 철연화가 날카롭게 외쳤다.
동시에 흑서의 몸을 중심으로 일렁이던 기묘한 살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
찌릿찌릿.
옷 밖으로 드러난 피부가 지릿하게 저려 왔다.
흑서가 철연화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머, 멈추세요!”
철연화의 외침에 흑서가 정말로 발걸음을 멈췄다.
대신 검을 꺼냈다.
스르릉.
흑서의 검이 고아한 자태를 드러내며 반짝였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철연화가 혹했지만 잠시였다.
‘나를 죽이려 하고 있어.’
철연화의 얼굴이 위기감으로 물들었다.
지금 그는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말로 하지 않아도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살기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