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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제천 1권 (11화)
‘진심이야.’
꿀꺽.
철연화의 고운 목울대가 움직였다.
“저, 저는 두목의 손님이에요.”
“그래서요?”
말투는 존댓말이었지만 말속에 담긴 것은 조롱이었다.
스윽.
흑서가 한 걸음 더 내딛자 철연화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이내 입술을 깨문 철연화가 낙타의 배를 걷어찼다.
꾸허어엉.
배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낙타가 비명을 질렀다. 그것이 낙타가 남긴 유언이었다.
스르륵.
가죽을 베는 특유의 소리도 없이 낙타의 목이 스르륵 하고 미끄러졌다.
툭.
잔뜩 일그러진 낙타의 얼굴이 그대로 모래 위로 떨어졌다.
피는 그 다음이었다.
푸화악.
매끄럽게 잘린 낙타의 목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미적지근한 피가 철연화의 몸을 적셨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철연화가 자신의 턱선을 따라 아롱져 떨어져 내리는 피에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무, 무슨…….”
기우뚱.
머리를 잃은 낙타의 몸이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졌다. 낙타의 등 위, 철연화의 신형이 번쩍 솟구쳐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흑서의 눈이 반짝 빛났다.
“호오. 무공을 익히고 있었군요? 하긴, 사화의 일인이니 어느 정도의 무공은…….”
“광혈검마(狂血劍魔) 어르신, 어째서 저에게…….”
막 말을 내뱉던 철연화의 입이 그대로 굳었다.
철연화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움직이는 것은 단둘, 그녀의 몸에서 주륵 흘러내리는 낙타의 피와 흑서, 단둘뿐이었다.
스윽.
“너는 방금 전의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거리를 좁히는 흑서의 몸에서 섬뜩한 살기가 채찍처럼 흘러나와 철연화의 사지를 옭아맸다. 감히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살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반항이라고는 신음이 다였다.
“하악.”
그녀와 흑서의 거리는 삼 장.
“어, 어르신. 제발……!”
“네 발이 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농담.
그녀와 흑서의 거리는 이 장.
“어르신, 저에게는 가문을 살려야 하는 책임이…….”
“네 책임이지 내 책임이 아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무책임한 말.
이제 거리는 일 장.
“저는 어르신이 대모로 모시는 려화 고모님의 사촌이에요.”
철연화가 마지막 비장의 수를 꺼냈다.
우뚝.
동시에 흑서의 걸음 또한 멈췄다.
하지만 그것은 철연화의 실수였다. 철연화는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흑서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배가 되어 철연화를 덮쳤다.
뿌드득.
모래가 밟히는 소리인지, 아니면 흑서의 이가 맞물리는 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이어졌다.
“그 씹어 먹을 년의 이름 또한 내 앞에서 하지 말았어야 했다.”
흑서의 두 눈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하얀색과 검은색의 경계마저 모호해져 눈동자가 검은색 일색으로 변할 무렵, 살기로 만들어진 적막을 깨고 싸늘한 목소리가 나타났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
철연화와 흑서의 얼굴 위에 상반된 감정이 떠올랐다.
“백랑이냐.”
흑서가 몸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그래.”
대답과 함께 흑서의 등 뒤에서 백랑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잘못 들은 거냐고 물었다, 흑서.”
차가운 말과 함께 나타난 백랑이 흑서를 지나쳐 굳어 있는 철연화의 앞을 가로막았다. 백랑이 흑서에게서 철연화를 지키는 형상이 되었다. 얄팍한 흑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방금 네가 말한 씹어 먹을 년이 대모는 아니겠지?”
“비켜라.”
“내가 물었다. 방금 네가 말한…….”
“저리 비켜라, 낙웅(樂雄).”
흑서의 입에서 생소한 이름이 나왔다. 그 생소한 이름이 준 여파 또한 생소한 것이었다.
“지금 뭐라고…….”
“비키라고 했다, 낙웅.”
이어지는 흑서의 말에 백랑의 얼굴이 흑서의 그것처럼 변했다.
낙웅은 백랑의 본명으로, 백랑을 버린 그의 부모가 지어 준 이름이었다. 그런 것을 혈무백에 의해 거두어질 때 스스로 바꾼 것이었다. 백랑의 유일한 약점이자 또한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창―!
백랑의 도가 번쩍 뽑혔다.
“너는 지금 두 번 죽었다.”
백랑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대모를 욕되게 하는 자, 죽이겠다고.
자신의 본명을 부르는 자, 죽이겠다고.
오늘 백랑은 그 두 가지 맹세를 모두 지키지 못했다.
백랑이 차갑게 말했다.
“가라.”
“네가 가라.”
백랑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정말…….”
“내가 언제 두목에게 해가 되는 짓을 한 적이 있냐.”
흑서의 물음에 백랑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흑서는 두목에게 해가 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여자는 두목의 손님이다.”
“네가 사랑한 계집의 그림자를 쫓는 것은 아니고?”
흑서가 차갑게 냉소 지었다.
“…….”
잠시간의 침묵.
백랑의 도가 흑서를 겨눴다.
“세 번째는 없다.”
백랑의 몸에서 끈적끈적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흑서 또한 지지 않고 살기를 내뿜었다.
“네게 무공을 가르친 이가 누군지 잊은 건 아니겠지?”
백랑에게 무공을 가르친 이는 다름 아닌 흑서다.
혈무백은 백랑을 거두고 달랑 비급만 던져 줬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작 무공을 가르친 이는 바로 눈앞의 흑서였다.
“무공을 핑계로 두들겨 팬 사람이 누군지는 잊지 않았다.”
“끄응.”
흑서가 앓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살기는 지워지지 않았다.
“모, 모두 진정하세요.”
창백하게 질린 철연화가 둘 사이를 중재했다. 하지만 이미 서로를 죽이고자 마음먹은 두 사람에게 철연화의 목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다.
흑서가 기다란 검을 바닥에 끌며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총 삼백이십 전 삼백이십 승. 이게 뭘 뜻하는 건지 알고 있겠지?”
“……네가 내기에서 진 횟수?”
“너랑 내가 싸운 횟수다, 인마!”
흑서가 얼굴을 붉혔다.
뚱한 얼굴의 백랑이 답했다.
“내 기억에는 없다.”
어느 모로 보나 살기가 살을 에는 싸움에서 할 대화는 아니었지만 그 둘의 분위기는 심각했다.
오가는 말이 없자 다시금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백랑이 도를 들고 흑서를 향해 마주 걸었다.
“아무리 너라도 팔 하나 정도는 각오해야 할 거다.”
“그 정도면 싼 거지.”
흑서가 비릿하게 웃었다.
우―우웅.
키리링―키잉.
둘의 병기가 살기에 반응하듯 신음을 내질렀다.
백랑의 도가 내지르는 것이 묵직한 군자의 목소리라면, 흑서의 검이 내뿜는 것은 싸구려 창기가 내지르는 교성과도 같다. 하지만 죽음의 임박에서는 군자보다는 창기의 생명력이 긴 법이다.
“와라.”
“간다.”
의미 없는 대화.
백랑의 몸이 흐릿하게 흩어졌다.
씨―이잉.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백랑의 도가 흑서의 목을 노렸다.
쑤―아앙.
바람 찌르는 소리와 함께 흑서의 검이 백랑의 목을 노렸다.
쐐―애애액.
둘의 병기가 서로의 목숨을 향해 독니를 들이밀려는 순간, 하늘에서 번쩍 빛이 내리꽂혔다.
쿠―우웅.
흑서와 백랑의 정중앙에 떨어진 빛이 파르르 그 몸을 떨었다. 그 덕에 일촉즉발, 둘의 싸움 또한 공항으로 빠졌다.
후―우우우.
빛의 주위로 뽀얀 모래먼지가 피어올랐다. 모래먼지가 걷히며 빛의 정체가 드러났다. 동시에 모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특히나 철연화의 놀람은 더했다.
“광풍도(狂風刀)!”
흑서가 부르짖듯 외쳤다.
혈무악의 애도!
광풍도가 여기 있다는 것은 곧……!
“이 연놈들, 여기서 뭐 하는 짓거리들이야?”
* * *
휘―오오오.
우뚝.
강렬한 모래바람과 함께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살기등등한 표정의 혈무악이었다.
“뭐 하는 짓거리냐고 물었잖아.”
장내에 나타난 혈무악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태를 수습하고자 철연화가 나섰다.
“두목, 그것이…….”
“나는 지금 두 놈에게 물었다, 계집.”
단칼에 철연화의 말을 자른 혈무악이 싸늘한 시선으로 흑서를 바라봤다.
“흑서, 무슨 짓거리들 하고 있었냐.”
“…….”
흑서가 입을 열지 않자 혈무악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백랑, 네가 말해라.”
“…….”
혈무악이 백랑을 향해 물었지만 그 또한 입을 열 리가 만무했다.
“이것들이…….”
미간에 자리 잡은 골이 깊어졌다.
스윽.
“오냐, 다 죽여 달라 이거지?”
혈무악이 살기를 흘리며 도를 뽑자 그를 중심으로 주변의 모래가 파도치듯 밀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가공할 살기가 모두의 피부를 찌르르 울렸다.
몸을 옥죄는 살기를 애써 떨쳐 낸 철연화가 입을 열었다.
“두목, 일단 제 말을…….”
“한 번만 더 입을 열면 죽이겠다, 계집.”
혈무악의 두 눈에 붉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 모습이 흡사 갓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와도 같아 철연화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흐윽.”
살기를 피해 주춤 물러서는 철연화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진심이야!’
흑서의 살기가 몸을 적시는 비라면 혈무악의 살기는 존재 그 자체를 집어삼키는 홍수다. 그녀로서는 감히 항거할 수 없는 힘인 것이다.
보다 못한 백랑이 철연화의 앞을 막아섰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으음.”
낮은 신음과 함께 혈무악의 몸에서 용솟음치던 살기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안도하는 철연화의 얼굴을 뒤로한 백랑이 짧게 말했다.
“흑서와 싸웠습니다.”
“이유는?”
“…….”
“이유는?”
재차 이어지는 혈무악의 물음에 백랑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혈무악의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돌린 혈무악이 흑서를 향해 물었다.
“이유는?”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낸 흑서가 답했다.
“……제가 철 소저를 죽이려고 했고 백랑이 저를 말리려다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흑서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잠시 침묵하던 혈무악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흑서가 왜 계집을 죽이려고 했는지, 그리고 백랑이 왜 그걸 말렸는지 이유는 묻지 않겠다. 단……!”
혈무악의 시선이 흑서와 백랑을 향했다.
“마땅한 처벌은 받아야 할 것이다.”
처벌에 대한 정도를 모르는 철연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흑서와 백랑은 아니었다.
흑서가 황급히 앞으로 나섰다.
“두목,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흑서, 율법에서 동료끼리 싸우면 어떻게 처벌한다고 나와 있지?”
사정하던 흑서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물었다.
“백랑, 네가 말해라.”
잠시 말이 없던 백랑이 잔뜩 굳은 얼굴로 답했다.
“……한 팔을 자릅니다.”
“그럴 수가!”
철연화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터트렸다.
씨익, 하고 비릿하게 웃어 보인 혈무악이 말을 이었다.
“본래는 한 팔을 잘라야겠지만 이곳에 다른 놈들은 없는 점, 그리고 본격적으로 싸우지 않은 점을 감안해서 손가락 하나로 봐주겠다.”
철연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두목, 차라리 저를……!”
“한 번만 더 입을 열면 죽이겠다고 했을 텐데.”
혈무악이 손아귀에 쥔 도를 곧추세워 철연화를 겨눴다.
저벅.
스걱.
전보다 몇 배는 증폭된 살기가 막 철연화의 몸을 휘감으려는 순간, 혈무악의 발소리에 맞춰 이질적인 소리가 이어졌다.
투툭.
백랑의 손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모래를 굴렀다.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그의 약지였다.
“백 대협!”
화들짝 놀란 철연화가 백랑에게 다가가려 할 때 또다시 이질적인 소리가 이어졌다.
투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