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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제천 1권 (12화)


흑서의 약지가 모래바닥을 굴렀다.
“크음.”
흑서와 백랑의 입에서 시큼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혈을 눌러 손가락을 지혈한 둘이 혈무악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두목.”
“으음.”
거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혈무악의 모습에 철연화가 발끈하며 얼굴을 붉혔다.
“당신은 정말……!”
“멋진 놈이지?”
혈무악의 농에 철연화가 기도 차지 않는 듯한 얼굴로 하!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둘은 당신의 부하예요. 한 번쯤 눈감아 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이 두 놈이 내 부하들이니까 눈감아 줄 수 없는 거다.”
찡.
도갑에 도를 챙기는 혈무악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부하라고 눈감아 준다면 무슨 낯짝으로 다른 자들을 본단 말이냐.”
“그게 무슨…….”
혈무악이 번쩍 몸을 날려 어느새 나타난 낙타에 올라탔다.
“너는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거다.”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린 혈무악이 장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쯤이면 정리가 끝났을 테니 모두 집합해라.”
아차, 한 혈무악이 또다시 말했다.
“계집의 낙타가 죽었으니 할 수 없군.”
신음을 흘리며 턱을 쓰다듬은 혈무악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계집, 너는 흑서의 낙타를 타라.”
“예?”
“무슨 소립니까!”
흑서가 얼굴을 붉혔다.
“그럼 저는 어떻게 가라고요!”
“너 경공 빠르잖아.”
“저는 손가락이 잘린 환자라고요!”
“너는 손가락으로 경공하냐?”
대수롭지 않게 말한 혈무악이 씨익 웃으며 낙타의 배를 걷어차 사라졌다.
“가시죠.”
“예, 예.”
혹시 흑서의 마음이 변할까, 철연화가 흑서의 낙타를 타고 황급히 사라졌다. 백랑이 그 뒤를 쫓아 사라지자 장내에 흑서 혼자만이 남았다. 잠시 넋을 잃고 사라지는 인영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흑서가 투덜거리며 바닥을 구르는 손가락을 발로 찼다.
“에이, 시팔. 진짜 이 짓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손가락을 밟아 모래 속으로 쑤셔 넣은 흑서가 사라지는 인영들의 뒤를 쫓았다.
“나도 같이 가요!”

* * *

스윽.
혈무악이 나타나자 몰려 있던 무인들이 반으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었다. 걸음을 옮기는 혈무악의 뒤를 따라간 마적단 두목들이 걸음을 옮겼다. 무심한 얼굴의 혈무악이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사상자는?”
물음에 답한 자는 우공산이었다.
“예, 놈들의 대부분이 죽었고 열 명 정도는 생포…….”
우공산의 말이 거의 끝나갈 때쯤 마침내 혈무악이 생포된 무인들의 앞에 도착했다.
수는 겨우 열 명 남짓이었는데 그중에는 혈무악과 검을 겨룬 천리화향검 청현도 있었다. 살아남는 자들 대부분이 화산파의 도사들이었다. 모두가 재갈이 물린 채 사지가 결박되어 무릎이 꿇려 있었다.
와락 인상을 구긴 혈무악이 말을 이었다.
“저따위 놈들이야 죽든 말든 상관없고, 우리 애들이나 불러 봐.”
“아, 예.”
고개를 끄덕인 우공산이 답했다.
“부상자는 삼십여 명입니다. 그중 평생 검을 잡을 수 없게 된 자는 두 명이고 사망자는…….”
“죽은 놈도 있어?”
“예.”
혈무악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우공산이 흠칫 몸을 떨었다.
“몇 놈이나 죽었냐.”
“하, 한 명입니다.”
붉게 충혈된 혈무악이 도를 빼어 들었다.
“이깟 새끼들 작업하는데 한 놈이나 죽었단 말이야?”
“……죄송합니다.”
우공산을 뒤로한 혈무악이 바닥에 쓰러진 도사들에게 다가갔다.
“우리 대가리 한 개는 저 새끼들 대가리 다섯 개다.”
“으읍, 읍.”
“흐읍.”
혈무악이 다가옴에 따라 도사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재갈 물린 그들의 입에서 공포에 질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마침내 도사들의 앞에 도착한 혈무악이 도를 치켜올렸다.
“피는 피로써!”
섬뜩하게 외친 혈무악이 들었던 도를 휘둘렀다.
푸―확.
“끅.”
“켁.”
새빨간 피보라와 함께 정확히 다섯 도사의 머리가 떨어졌다.
주르륵.
그들의 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모래에 스며들어 굳었다.
살아남은 다섯 도사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찡.
혈무악이 굳어 있는 우공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친 놈들한테는 돈을 더 주고 검을 못 잡게 된 놈들은 마을에다가 쓸 만한 가게를 열어 줘라. 뒤 봐주는 것도 잊지 말고.”
“예.”
“그리고 죽은 놈에게 가족이 있으면 가게를 열어 주고 잘 챙겨 줘라.”
“예.”
우공산이 거듭 고개를 조아렸다.
“너에게 맡기겠다.”
혈무악이 어느새 준비된 의자에 앉아 오만한 얼굴로 도사들을 굽어봤다.
그의 뒤로 흑서와 백랑을 비롯해 나머지 두목과 간부들이 나란히 모였다. 철연화는 혹시나 도사들이 그녀를 알아볼까 오지 않은 상태였다.
도사들을 굽어보던 혈무악이 말했다.
“적돈, 저 새끼들 재갈 풀어.”
“예.”
적돈이 뒤뚱거리며 앞으로 나가 도사들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 던졌다. 동시에 그들의 입에서 봇물 터지듯 말이 튀어나왔다.
“흐에엑.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신다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애원하는 도사들의 모습에 혈무악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청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 또한 비굴한 얼굴로 혈무악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혈무악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맺혔다.
“흑서, 저게 그 양반이 말한 중원의 가능성이냐?”
“…….”
전대 두목이었던 혈무악의 아버지는 가끔 말하곤 했다.
중원의 가능성이란 것을.
하지만 지금 혈무악의 눈앞에 있는 도사들은 중원의 가능성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었다.
“하하하하하하!”
도사들을 굽어보는 혈무악의 입에서 앙천광소가 터져 나왔다.
한참 동안 앙천광소를 터트리던 혈무악이 대뜸 입을 열었다.
“살고 싶냐?”
“무, 물론입니다.”
“살고 싶습니다.”
도사들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무악의 입가에 맺힌 비릿함이 짙어졌다.
“몸뚱이에서 두 개 달린 것들 중 한 개만 떼어 놓고 가라. 그럼 살려 주마.”

* * *

광풍처가 때 아닌 잔치로 들썩였다.
화산파와 매화표국의 무인들을 일망타진한 것을 기념하는 잔치였다. 삼천여 명의 마적들이 모인 자리이니만큼 음식과 술의 양이 상상을 초월했고 그 소란함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으하하하. 마셔라, 마셔.”
“이 새끼, 안 마시고 뭐 하는 거야?”
“여기 술 좀 더 가져와, 고기하고.”
삼천여 명의 마적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부딪쳤다. 한쪽 천막에는 다른 두목들이 모여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정작 막주인 혈무악은 술병을 손에 쥔 채 공터 중앙에 그려진 원 안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자자, 도전할 놈들은 다 나와라!”
가로세로가 일 장 남짓한 원은 마적들이 주로 벌이는 힘겨루기의 판으로 원 안에서 두 사람이 내력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순수한 근력으로 상대를 원 밖으로 밀어내는 힘 겨루기 판이다. 마적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이기도 했다.
혈무악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술판을 가르고 거대한 덩치가 앞으로 나섰다.
술잔을 부딪치던 마적들이 술렁였다.
“저놈, 혈살단의 철탑마(鐵塔魔)잖아?”
“맨손으로 사람을 찢어 죽인다는 그놈?”
“오오. 누가 이길까?”
마적들이 저마다 긴장된 얼굴로 술을 들이켰다.
거하게 취한 혈무악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원 안에 들어온 철탑마를 올려다봤다.
“네놈이 철탑마냐?”
“예!”
철탑마가 힘차게 답했다.
키만 해도 혈무악보다 머리 세 개는 더 높았고 허벅지는 그의 허리 두께와 같았다. 목소리는 얼마나 쩌렁쩌렁한지 술을 마시던 마적들이 귀를 막을 정도였다.
“크하하하. 남자라면 이놈 정도는 되어야지.”
호탕하게 웃어 젖힌 혈무악이 병 주둥이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투명한 술이 혈무악의 입에서 흘러나와 턱선을 따라 흘러내려 혈무악의 몸을 적셨다.
“크으.”
한차례 신음을 흘린 혈무악이 손에 들린 술병을 원 밖으로 내던지고는 철탑마를 향해 호기롭게 외쳤다.
“와라!”
“우어어어!”
우렁찬 함성을 터트린 철탑마가 혈무악을 향해 몸을 날렸다.
꽈―앙.
살과 살이 부딪치며 커다란 소리를 터트렸다.
“우와아아. 막주님 이겨라!”
“철탑마 이겨라!”
흥이 오른 마적들이 술잔을 내팽개치고 원을 중심으로 모여 두 명을 응원했다.
“힘이 남아도네, 힘이 남아돌아.”
천막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흑서가 혀를 차며 미간을 찌푸렸다. 흑서의 왼손 약지 부분이 붕대로 감겨 있었는데 그건 백랑 또한 마찬가지였다.
덜그덕, 덜그덕.
몇 번 더 음식을 깨작거린 흑서가 젓가락을 내던지고는 술잔을 기울였다. 백랑 또한 묵묵히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기울였다. 철연화는 혈무악의 거처에서 따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나머지 두목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혈무악과 철탑마의 힘겨루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랏차!”
철탑마의 허리를 잡은 혈무악이 커다란 기합을 내지르며 철탑마의 몸을 들어 올렸다.
“어? 어?”
동시에 철탑마의 거체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와아아. 철탑마를 들어 올렸다!”
“역시 막주님이다.”
마적들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으워어어!”
혈무악의 손에 의해 허공에 뜬 철탑마가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혈무악의 팔뚝 위로 푸른 힘줄이 불끈 불거졌다.
“하―압!”
휙.
혈무악의 힘찬 기합과 함께 철탑마의 신형이 원 밖으로 날았다.
쿠―웅.
“으악!”
미약한 진동과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진 철탑마가 비명을 질렀다.
“철탑마가 나가떨어졌다.”
“우와아아! 막주님이 이겼다.”
“역시 대막의 왕이다.”
마적들이 저마다 술잔을 들고 혈무악을 칭송했다.
“하하하하. 남자라면 이 정도는 거뜬하지.”
우쭐한 얼굴로 대소를 터트린 혈무악이 곧 옷을 추스르고는 원 밖에 뉘어 둔 도를 들고 천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걷는 도중에도 몇 번 마적들의 술잔을 받아 술을 들이켠 혈무악이 천막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눈이 반쯤 풀린 상태였다.
“하하, 모두 잘들 먹고 있냐?”
혈무악의 물음에 흑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주독(酒毒) 정도는 내력으로 몰아 놓고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술 마시는 사람의 태도냐, 이 자식아!”
발끈한 혈무악이 버럭 외치고는 자리에 앉아 또다시 술병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참을 들이켜던 혈무악은 더 이상 술이 나오지 않자 미간을 찌푸리며 술병을 내던졌다.
“술 더 없냐?”
“없습니다.”
재빨리 술병을 감춘 흑서가 답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한 병만…….”
“진짜 없다니까요.”
“진짜?”
“진짜.”
“진짜, 진짜?”
흑서가 ‘이 양반이 오늘따라 왜 이래’ 하는 시선으로 마지못해 답했다.
“진짜, 진짜.”
“끄응.”
한차례 신음을 흘린 혈무악이 비틀거리는 몸을 애써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거처에 가서 내가 직접 찾아 먹고 만다.”
“그러시든가요.”
“쳇.”
가까스로 몸을 추스른 혈무악이 질질 도를 끌며 거처를 향해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혈무악의 뒷모습을 보던 흑서가 아차, 하며 황급히 물었다.
“지금 저 양반 거처에 누가 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