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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제천 1권 (13화)
잠시간의 침묵.
“계집이 있을걸?”
한가득 음식을 쑤셔 넣던 적돈이 우물거리며 답했다.
휙 소리가 나게 고개를 돌린 흑서와 백랑의 두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설마…….”
둘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흑서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저 양반 오늘 사고치는 거 아니야?’
* * *
“아, 취한다.”
위태위태한 걸음으로 가까스로 거처의 입구에 도착한 혈무악이 시큼한 신음을 흘리며 흐릿하게 보이는 눈을 쓰다듬었다.
“으으.”
척.
거처의 벽에 도를 기댄 혈무악이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모처럼 만에 마신 술이라 거하게 취한 탓이었다.
‘술이 어디 있더라…….’
저번에 흑서 몰래 숨겨 둔 술을 기억해 낸 혈무악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거처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스럭.
“누구시죠?”
거처 안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철연화였다.
혈무악의 거처 안에서 따로 식사를 하고 있던 철연화는 누군가 나타나 인기척을 내자 놀라 물은 것이었다.
평소의 혈무악이었다면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겠지만 이미 얼큰하게 취한 상태에서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으응? 너야말로 누구야? 누군데 감히 내 거처에서…….”
흐릿한 시야를 애써 추스른 혈무악이 목소리의 근원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혈무악의 모습이 그제야 시각에 잡히자 철연화가 경계를 풀고 고개를 갸웃했다.
“두목?”
“응?”
익숙한 단어에 잠시 멈칫한 혈무악이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어……?”
동시에 혈무악의 눈이 잘게 떨렸다.
“어, 엄마……?”
“예?”
난데없는 혈무악의 말에 철연화가 흠칫 놀랐다.
난데없이 ‘엄마’라니?
그가 말하는 엄마라면 철려화였다.
철연화가 황급히 말했다.
“저는 철연화예요.”
“……!”
천천히 다가오던 혈무악의 신형이 그 자리에 멈췄다.
“……그, 그렇군.”
그제야 철연화의 정체를 인식한 혈무악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치이이이.
혈무악의 손바닥 위로 투명한 액체가 뭉클뭉클 솟구쳤다. 체내를 맴돌던 주독이었다.
쪼로로.
손바닥에 고인 주독을 흘려보낸 혈무악이 전과 다름없는 얼굴로 철연화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전의 비틀거리는 걸음이 아닌 정상인과 다름없는 걸음이었다.
“내가 추태를 부렸군.”
“아니에요.”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린 혈무악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비밀이다.”
“예?”
“방금 전의 내 행동은 다른 놈들한테는 비밀이다.”
“아.”
철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흠흠. 그런 난 나가 보겠다.”
헛기침을 한 혈무악이 자리를 피하고자 몸을 돌렸다. 흑서 몰래 숨겨 둔 술 따위는 이미 그의 생각 밖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픈 생각뿐이었다.
그때였다.
“두목?”
철연화의 미성에 혈무악의 신형이 그 자리에 굳었다.
뻣뻣한 고개를 돌린 혈무악이 애써 안색을 수습하며 말을 이었다.
“무, 무슨 일이지?”
“이제 대답을 해 주실 수 있나요?”
“대답이라니?”
“저희 가문의 일이요.”
“아.”
혈무악이 탄성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자신은 그녀에게 사흘 후, 그러니까 오늘 대답을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흐음.”
혈무악이 애매모호한 의미의 신음을 흘리자 철연화가 긴장된 얼굴로 황급히 말했다.
“만약 두목이 이번 한 번만 저희를 도와주신다면 향후 삼 년간 광풍사의 의식주는 저희 가문에서 책임지겠습니다. 또…….”
“그런 것 말고 다른 건 없나?”
“예?”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어 보인 혈무악이 철연화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여인이라든가. 그래, 너 같은 미인 말이야…….”
움찔.
가녀린 철연화의 몸이 살짝 떨렸다.
“저, 저희는 친척이에요.”
“생전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친척도 있던가?”
혈무악의 말대로 이름만 친척일 뿐, 한 번도 보지 못해 남이나 마찬가지였다.
“하, 하지만…….”
철연화가 주춤거리자 혈무악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이 짙어졌다.
‘이것도 나름대로 재미있군.’
혈무악 역시 그녀를 안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그녀를 당황하게 하고 싶은 마음에 장난을 치는 것뿐이었다. 웃음을 지운 혈무악이 발길을 돌리려 슬쩍 몸을 비틀었다.
침묵하던 철연화가 입을 열었다.
“……좋아요.”
“……뭐?”
“두목이 원하신다면 제 몸, 드리겠어요.”
철연화의 예상 밖의 말에 혈무악이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계집, 너…….”
“두목께서 저희 가문을 돕겠다고 약속만 하신다면요.”
스윽.
결연한 표정의 철연화가 혈무악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스르륵.
그녀의 겉옷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뽀얀 어깨와 매끄러운 목의 윤곽이 드러났다.
“꿀꺽.”
혈무악이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철연화는 중원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사화의 일인이다. 강함은 물론 지혜, 그리고 미까지 겸비한 여인인 것이다. 거기에 그녀는 한 가지 더, ‘신념’까지 갖췄다.
‘가문을 위해서라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은 철연화가 스르륵 옷을 벗었다.
그녀의 나신이 동굴을 비추는 빛에 몸을 맡겼다.
보통 남자였다면 당장에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겠지만 혈무악은 그런 보통 남자와 달랐다.
“하.”
짧은 웃음을 터트린 혈무악이 철연화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스르륵.
질끈.
혈무악의 옷이 벗겨지는 소리에 철연화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파르르.
나신을 핥는 차가운 바람에 그녀의 몸이 살짝 떨렸다.
스윽.
웃통을 벗어젖힌 혈무악이 철연화를 향해 다가갔다.
꾸욱.
지그시 입술을 깨문 철연화가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잡았다.
‘가문을 위해서라면!’
아직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몸이지만 가문을 위해서라면 순결쯤은 내어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철연화의 생각이었다. 마침내 철연화의 앞에 도착한 혈무악이 스윽 손을 뻗어 철연화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움찔.
딱딱한 굳은살이 가득 잡혀 있는 혈무악의 손이 만드는 기묘한 감촉에 질끈 눈을 감은 철연화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예.”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플까?’
문득 몇 년 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친분이 있던 검화(劍花)와 함께 기방에 숨어들었다 여자가 지르던 비명을 생각해 낸 철연화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플 거야!’
자신을 키우던 유모가 말하길, 첫 경험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황홀하고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고통스럽다고 했다. 어렸을 적에는 ‘뭐야, 그게’라고 말했던 것이 지금 자신의 앞에 닥친 것이다.
스르륵.
혈무악의 손이 어깨를 타고 올라와 목, 그리고 턱선을 따라 올라와 얼굴을 쓰다듬었다.
귀, 이마, 눈, 그리고 마지막은 조각과도 같은 코였다.
부르르.
애무하듯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혈무악의 손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나신이 긴장으로 떨렸다. 한가득 차오르는 긴장을 애써 참아 낸 그녀가 막 눈을 뜨려는 순간, 그녀의 코를 쓰다듬던 혈무악의 손이 흐릿하게 흩어졌다.
핑.
“꺄―악!”
코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통증에 철연화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하하하하!”
찡하니 울리는 코를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이는 철연화의 모습에 혈무악이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자신이 나신이라는 것도 잊었는지, 철연화가 붉게 달아오른 코를 쓰다듬으며 날카롭게 외쳤다. 그녀의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하하하.”
낮게 웃어 보인 혈무악이 말을 이었다.
“일단 옷부터 걸쳐라.”
“으윽.”
그제야 자신의 상황을 깨달은 철연화가 황급히 옷을 주워 들어 몸을 가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혈무악의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한 여자가 자신의 순결을 바친다는 결심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도 명문세가의 여인이 투박한 마적에게 몸을 바치는 것이야 오죽할까. 그녀는 가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한 것이다. 그런 그녀의 결심이 혈무악을 감탄시켰다.
씨익 웃은 혈무악이 말했다.
“각오가 제법 대단하구나, 여자.”
철연화에 대한 호칭이 ‘계집’에서 ‘여자’로 바뀌었다.
그것은 곧 혈무악이 그녀를 조금이나마 인정했다는 말과 같았다.
“그럼……?”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 위로 희망이 떠올랐다.
“뭐, 한 번은 도와주도록 하지.”
“아.”
그녀의 입에서 낮은 감탄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한 번뿐이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철연화가 고개를 숙였다.
비록 한 번뿐이라고 하지만 그 한 번의 도움으로 가문은 한 번의 위기를 벗어날 것이고, 그리고 그 위기만 벗어난다면 가문은 사천의 강자로 떠오를 것이다. 그녀에게 혈무악은 구원의 손길이나 다름없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혈무악이 등을 돌렸다.
“정말 감사해요, 두……?”
안면 한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가던 철연화가 돌연 말끝을 흐렸다.
“두, 두목?”
“으응?”
자신을 부르는 철연화의 목소리에 혈무악이 고개를 돌렸다.
“그, 그게 어째서 두목의 등에 있는 거죠?”
“뭐가 말이냐, 여자.”
시큰둥한 표정의 혈무악이 되물었다.
지금 철연화의 표정은 방금 전보다 더 파랗게 질려 있었다.
잔뜩 질린 얼굴은 수시로 떨리고 있었고 그녀의 두 눈동자에 자리 잡은 것은 지독한 혼란이었다.
푸르게 질린 그녀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그 문신이, 그 저주 받은 흑화(黑火) 문신이 어째서 두목의 등에 새겨져 있는 거죠?”
“아, 이거?”
철연화가 말한 문신을 쓰다듬은 혈무악이 답했다.
“이건 내 아버지라는 양반이 내가 어렸을 때…….”
“그건 그렇게 단순한 문신이 아니에요!”
철연화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건 마교의 교주 후계자들만 새길 수 있는 문신이에요!”
“……뭐?”
“검은 불꽃은 마교의 상징이에요. 그 문신을 새겼다는 것은 두목이 교주 후계자라는 말과 같아요!”
잔뜩 날이 선 그녀의 말에 혈무악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자세히 말해라, 여자.”
굳은 얼굴의 철연화가 말을 이었다.
“마교는 이십 년 전, 혈교(血敎)가 일으킨 혈교지란(血敎之亂) 때 모습을 드러내고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 단체예요. 그 존재만으로도 마도(魔道)의 중심인 단체죠.”
“그런데?”
“그 마교의 상징이 바로 검은 불꽃이에요. 다른 말로는 성화(聖火)라고 하는 불이죠. 아무리 마교가 강자존의 세계라고 하지만 그래도 그곳에도 막강한 힘을 가진 가문들이 존재해요. 그들은 우선적으로 교주가 될 수 있는 권한을 받을 수 있는데 그 증표로 등에 성화 문신을 새겨요.”
철연화의 말에 혈무악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만약 여자 네 말이 사실이라면 세상천지 등짝에 검은 불꽃 문신을 가진 놈들은 다 마교의 교주 후계자들이겠군.”
철연화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그건 그렇게 단순한 문신이 아니에요.”
“단순한 문신이 아니라고?”
“예. 아마 두목이 내력을 일으키면 등에 새겨진 문신이 진짜 불꽃처럼 타오르듯 움직일 거예요.”
“문신이 진짜 불꽃처럼 움직인다고? 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저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런 비법이 교주 후계자들에게 전수된다고 했어요.”
철연화의 말에 혈무악이 얼굴을 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