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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제천 1권 (14화)


“네 말이 사실이라면 내 아버지인 그 양반도 교주 후계자라는 소리냐?”
“전해지는 말이 사실이라면요.”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철연화의 태도에 혈무악이 신음을 흘렸다.
“좋아. 네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내력을 일으키면 이 문신이 움직이겠지?”
“예.”
“큭.”
낮게 웃어 보인 혈무악이 철연화를 등지고 선 채 서서히 내력을 일으켰다.
우―우우웅.
낮은 진동과 함께 혈무악의 몸을 중심으로 붉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자신만만한 얼굴의 혈무악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어때, 움직이냐?”
“……아.”
작은 탄성.
철연화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 말이 사실이었다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혈무악의 물음에 철연화가 날카롭게 답했다.
“문신이 움직여요!”
“뭐!”
혈무악이 화들짝 놀라 황급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을 보고자 애썼다. 하지만 등이 보일 리 만무했다. 그저 어깻죽지가 조금 보일 뿐이었다.
“제기랄, 왜 안 보이는 거야.”
욕설을 내뱉은 혈무악이 걸음을 옮겨 한편에 있는 물웅덩이에 다가가 다시 한 번 내력을 일으켰다.
우―우우웅.
혈무악의 기세에 물웅덩이가 작게 파도쳤다.
고개를 돌린 혈무악이 파도치는 물 엉덩이에 비친 자신의 등짝을 바라봤다.
“문신이 움직일 리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을 내뱉던 혈무악의 얼굴이 멍하게 풀렸다.
“있네?”
그의 말대로 물웅덩이에 비친 혈무악의 등짝에 새겨진 검은 불꽃 문신이 마치 진짜 불꽃처럼 마구 일그러지며 등짝에 너울거리고 있었다.
“하, 하하.”
혈무악의 입에서 얼빠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짜 움직이잖아?”
혈무악 자신 또한 내력을 일으키며 자신의 등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싸움할 때 웃통을 벗어젖히고 싸움을 하는 열혈남아도 아니었고, 홀로 운기할 때 자신의 등을 보며 할 리도 만무했다.
한참을 물웅덩이를 보던 혈무악이 곧 내력을 가라앉히며 철연화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제기랄. 빌어먹을 양반, 대체 내 몸에 무슨 짓을…….”
“마교의 후계자를 나타내는 문신…….”
“나도 알아!”
혈무악이 노호성을 터트렸다.
“뿌드득. 빌어먹을 양반, 감히 내 몸에 개수작을 부려 놨다 이거지……!”
세차게 이를 가는 혈무악의 두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번뜩였다.
“흑서!”
혈무악이 거처 입구를 향해 날카롭게 외쳤다.
난데없이 흑서를 찾는 혈무악의 모습에 철연화가 고개를 갸웃할 때, 혈무악이 다시 외쳤다.
“거기 있는 거 다 아니까 나와라.”
“…….”
“셋 셀 동안 안 나오면 무슨 짓 할지 모른다.”
혈무악이 어둠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동시에 거처 안 어둠이 울렁이며 한 인영을 뱉어 냈다.
바로 흑서였다.
“부르셨습니까.”
“말해!”
혈무악이 흑서를 향해 다가가며 거칠게 소리쳤다.
“그 양반이 문신을 새길 때 분명 너도 있었다. 그 양반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말하란 말이다!”
흑서의 면전에 들이닥친 혈무악이 성난 포효를 터트렸다.
“당장 말하지 않으면 네놈을……!”
“무악아.”
“……!”
흑서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단어에 혈무악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무악, 바로 혈무악의 이름이었다.
“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네 수하인 흑서가 아니라 네 숙부인 위군풍(偉君風)이다.”
“크윽.”
이어지는 흑서의 말에 혈무악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본래 흑서는 혈무악의 숙부였다.
실제로 피가 이어진 숙부가 아니라, 혈무악의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어 숙부가 된 것이다. 그리고 흑서가 지금껏 숙부를 자처한 적은 단 두 번뿐이었다. 그가 말한 위군풍이란 이름은 흑서의 본명이기도 했다.
갑작스레 돌아가는 상황에 철연화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혈무악과 흑서를 바라봤다.
흑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진실을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더러운 싸움에 네가 끼어들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렇기에 네 아버지가 너를 이곳에 두고 중원으로 간 것이다.”
‘계집이랑 눈 맞아서 도망간 게 아니었어?’
혈무악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포로로 잡힌 중원 계집과 눈이 맞아 중원으로 도망가는 뒷모습이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흑서의 진지한 모습에 혈무악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하나만 묻지. 내 등에 있는 이 문신, 정말로 저 여자가 말하는 문신이냐?”
“……그래.”
“하.”
혈무악의 입에서 짧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혈무악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걸렸다.
“더러운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고? 그 더러운 싸움이란 게 혹시 마교 교주 자리를 놓고 벌이는 싸움은 아니겠지?”
“…….”
“더러운 싸움을 바라지 않는다는 양반이 어린애 등짝에 문신을 새겨 놔? 그럼 애초에 문신 따위를 새기지 말았어야지!”
쿠―웅.
혈무악의 성난 외침에 거처가 들썩였다.
“씨익, 씨익.”
혈무악이 입술 사이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침묵하던 흑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이 어째서 무악(無握)인지 아느냐?”
없을 무(無), 쥘 악(握).
아무것도 쥐지 말고 자유롭게 살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 바로 혈무악의 이름이었다.
“네가 진실을 알기 위해 중원으로 간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하나, 그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진실을 알아내야 한다. 그것이 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다.”
“…….”
숨을 고른 혈무악이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또 그 양반이 만든 판에서 놀라고?”
“그것이…….”
“좋아.”
혈무악이 몸에서 섬뜩한 살기가 봇물처럼 터져 나와 거처를 집어삼켰다.
“중원으로 간다. 가서 여자를 도와주고 그 양반을 찾아내서 멱살을 잡고 물어봐 주지.”
빠드득.
혈무악의 이가 맞부딪쳤다.
“진실이라는 것을 말이야!”
키―이잉.
거처 입구에 기대어진 혈무악의 도가 날카로운 도명을 토해 냈다.
“흐윽.”
혈무악의 살기에 철연화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여자, 네 가문을 돕고 싶다면 내 문신에 관해서는 입도 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아, 알겠어요.”
철연화가 가까스로 답했다.
흑서가 착잡한 얼굴로 혈무악을 바라봤다.
“다녀오너라.”
흑서의 말에 혈무악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무슨 개소리야?”
“예?”
어느새 평소의 흑서로 돌아온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혈무악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가는 길에 너도 가는 건 당연하잖아?”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인 혈무악의 말에 흑서가 얼굴을 붉혔다.
“내가 왜요!”

* * *

“나, 중원 간다.”
단순한 한마디였지만 그 여파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상황을 인지한 자는 그나마 냉정한 판단력을 가진 우공산이었다. 그가 혈무악을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말했다.
“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십시오.”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떨렸다.
다른 두목들 또한 잔뜩 굳은 얼굴로 혈무악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이것들이 다 귀가 먹었나.”
미간을 찌푸린 혈무악이 말을 이었다.
“나 중원 간다고.”
“막주님!”
우공산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후, 후하하하!”
혈갈이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꾸역꾸역 육포를 처먹던 적돈 또한 육즙이 흘러내리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혈무악을 바라봤다. 다른 두목들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은 반응들이었다.
난데없이 중원을 간다니?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린 혈살마옹이 나직이 물었다.
“진심이더냐?”
“제가 언제 허튼소리 하는 거 보셨습니까?”
“허허.”
수염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빨라졌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러십니까.”
꿀꺽 하고 입 안의 육포를 삼킨 적돈이 물었다.
“바람은 무슨. 유람 겸, 그 양반도 찾으러 가는 길이다.”
“그 양반이라 하시면…….”
“내가 말하는 그 양반이 그 양반 말고 누가 있겠냐.”
애매한 말이었지만 모두가 혈무악이 말하는 그 양반의 정체를 알아챘다.
털썩 자리에 앉은 우공산이 물었다.
“전대 두목을 찾으러 가십니까?”
“그래. 해결해야 할 일도 있고 말이야.”
“해결해야 할 일이란 게 무엇입니까.”
우공산이 끈질기게 물었다.
혈무악의 얼굴에 짜증이 서렸다.
“내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너희에게 말해야 하는 거냐.”
지―잉.
태사의에 걸쳐진 혈무악의 도가 낮게 울었다.
숨 막히는 기세가 혈무악의 몸에서 뿜어져 나와 거처를 집어삼켰다.
“꿀꺽.”
두목들이 흠칫 놀라며 침을 삼켰다.
기세를 거둔 혈무악이 태사의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아, 흑서도 가니까 그렇게들 알고 있어라.”
모두의 시선이 흑서에게 향했다.
“크음.”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흑서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힐긋 혈무악의 눈치를 본 흑서가 자신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혈무악의 얼굴을 보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사실이냐, 흑서?”
“그, 그래.”
백랑의 싸늘한 물음에 흑서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백랑이 핏발 선 눈으로 혈무악을 바라봤다. 갑작스레 중원으로 떠나겠다니. 필시 어젯밤, 거처에서 혈무악과 철연화, 흑서 사이에 무언가 일이 있었던 게 확실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질끈 입술을 깨문 백랑이 말했다.
혈무악은 물론 나머지 두목들 또한 의외라는 얼굴로 백랑을 바라봤다.
흑서야 평생을 혈무악의 옆에서 살았으니 그럴 수도 있다지만 일생을 대막에서 살아갈 것이라 의심치 않았던 백랑의 행동은 의외였다.
“흐음.”
묘한 의미가 담긴 신음을 흘린 혈무악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감사합니다.”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혈갈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흐흐흐. 그럼 이제 두목이라 부르지 않아도 상관없겠군.”
승리자의 웃음을 흘리는 혈갈을 보는 혈무악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어이, 아저씨. 무슨 헛소리야.”
“으응?”
“내가 중원에 가서 평생 살겠다고 했어?”
혈갈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무, 무슨…….”
“내가 하는 말 못 들었어? 그냥 유람 겸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나간다고 했잖아. 이 아저씨가 벌써 치매가 오나.”
“크으윽.”
혈무악의 조롱에 혈갈이 발끈해 외쳤다.
“허, 헛소리하지 마라! 말만 그럴듯하게 해 놓고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느냐!”
“하하하.”
혈무악이 기도 차지 않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어이, 아저씨. 내가 뭐 좋은 꼴을 보자고 중원에 남아 있겠어. 여자와의 약속하고 그 양반만 아니라면 애초에 중원에 나가는 일도 없을 텐데.”
“여자와의 약속?”
혈갈의 반문에 혈무악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황급히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적어도 일이 년 안에는 대막으로 돌아올 테니 걱정 마쇼.”
“으윽.”
승리자의 그것이었던 혈갈의 얼굴이 패배자의 그것으로 변했다.
“헐헐.”
너털웃음을 지어 보인 혈살마옹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네가 나가겠다는데 말리지는 않겠다만 아무리 너라고 해도 사막의 율법은 치러야 할 게다.”
“……!”
혈살마옹의 말에 두목들이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지금껏 잊고 있던 ‘사막의 율법’이 그제야 두목들의 머리에 떠올랐다.
“후, 후후. 그래. 사막의 율법이 있었지.”
혈갈이 낮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