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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제천 1권 (15화)
넓디넓은 대막을 질타하는 마적들에게는 보통 ‘법(法)’이란 것이 통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마적들에게도 몇 가지 불변의 규칙이 존재하는데 그것들을 통틀어 ‘사막의 율법’이라 부른다.
그중 몇 가지가 두목의 허락 없이 동료와 싸우면 한 팔을 자르는 것, 그리고 동료를 죽이고 도망친 자는 똑같은 죽음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중 특히나 엄격한 것이 마지막 율법이다.
대막을 벗어나는 자는 모래폭풍을 뚫고 나가라!
이것이 바로 마지막 율법이다.
평생을 대막에서 살고자 하는 마적들의 각오가 만들어 낸 끔찍한 율법이었다.
역사상 이 율법을 통과한 이는 단 한 명, 전대 광풍사의 두목이었던 혈무백뿐이었다. 과거 그는 열일곱 개의 도강을 쏟아 내 거대한 모래폭풍을 잠재우고 중원으로 향했다. 그 뒤로는 그 누구도 감히 마지막 율법에 성공하지 못했다.
설령 시도를 한다 해도 모래폭풍에 먹힌다면 절정고수라 해도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겨 죽는다. 모래폭풍의 위력은 그 이상이었다.
“…….”
묘한 침묵이 장내를 맴돌았다.
“꿀꺽.”
숨 막히는 긴장으로 목울대가 움직였다.
모두가 혈무악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 하하.”
굳게 다물렸던 혈무악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까짓것, 하지요.”
씨익, 혈무악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웃음이 걸렸다.
“그 양반도 했는데 저라고 못하겠습니까?”
“허허허.”
혈살마옹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 오만함이야말로 혈무악을 지탱하는 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 오만함이 꺾일 때는 혈무악이 죽을 때일 게다.
‘아니, 죽어서도 꺾이지 않을지 모르지.’
그가 아는 혈무악은 그 누구보다 오만한 사내였고 그 오만함이 어울리는 강함을 가진 사내였다.
혈무악을 바라보는 혈살마옹의 눈빛이 인자하게 변했다.
대막마왕이라 불렸던 그답지 않은 눈빛. 마치 손자의 성장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그것과 같았다. 그 시선을 느낀 혈무악이 헛기침을 하며 혈살마옹의 시선을 피했다.
“흠흠. 나와 흑서, 백랑, 그리고 여자가 간다.”
“여자라면 백랑의 처소에 있는 그 여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혈무악이 말을 이었다.
“기간은 최소 일 년에서 최대 이 년이다.”
“만약 그 안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혈갈의 말에 혈무악이 미간을 찡그리며 답했다.
“저 아저씨, 꽤나 끈질기네. 그런 일은 죽어도 없을 테니 걱정 마쇼.”
“크윽.”
혈갈이 낮게 신음했다.
“그럼 그때까지 광풍사의 두목 대리는 누가 맡습니까?”
우공산의 물음에 좌중이 다시 침묵했다.
우공산이 언급한 것은 그만큼 예민한 사안이었다.
광풍사는 대막을 대표하는 마적단이다. 아무리 대리지만 그렇고 그런 무인이 맡을 수 있는 마적단이 아닌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혈무악이 말했다.
“혈갈에게 맡긴다.”
자신이 말해 놓고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혈무악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진심이십니까?”
“그래.”
혈무악을 향해 묻는 적돈의 목소리에 불신이 깃들었다.
언제나 혈무악의 자리를 노리는 자가 바로 혈갈이었다. 기회만 있다면 당장에 혈무악의 뒤통수를 치고 두목의 자리에 다시 앉을 자가 바로 그인 것이다. 그런 그에게 대리지만 두목의 자리를 맡긴다니? 적돈은 물론이고 다른 두목들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혈무악의 생각은 달랐다.
만약 자신이 어떠한 사고로 죽음을 앞둔 상황이 왔을 때 다음 두목을 선택해야 한다면 주저 없이 혈갈을 선택할 것이다. 사적인 감정은 뒤로 젖혀 두고 광풍사의 네 조장 중 가장 사람을 다를 줄 아는 이가 그였고 또 그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과거에 두목이었던 그라면 자신이 없는 동안 광풍사를 잘 이끌어 주리라 의심치 않았다.
혈갈 또한 믿기지 않는 듯, 멍한 얼굴로 혈무악을 바라봤다.
“저, 정말? 정말 내가 두목이라고?”
“두목이 아니라 두목 대리.”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두목을 맡기겠다는 소리 아니냐.”
“두목이 아니라 두목 대리라니까!”
혈무악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혈갈이 흠칫 놀라며 되받아쳤다.
“그거나, 그거나!”
“엄밀히 따지면 다르지!”
“에이, 몰라.”
고개를 저은 혈갈이 곧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크하하하. 내가 두목이다, 내가 두목이야.”
혈갈이 대소를 터트리며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가 두목이야, 내가 두목이라구. 크하하하!”
동굴 밖에서 들려오는 혈갈의 목소리에 혈무악은 물론 나머지 두목들의 얼굴마저도 구겨졌다.
“끄응. 저 아저씨 때문에 내가 못 살지.”
신음을 흘리며 관자놀이를 꾹 누른 혈무악이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두목 대리는 저 아저씨가 맡기로 하고, 이야기는 끝난 것으로 합시다.”
“두, 두목.”
벌렁 드러누우려던 혈무악이 우공산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출발은 언제…….”
“언제긴 언제야.”
혈무악이 벌렁 드러누우며 말했다.
“다음 모래폭풍이 올 때, 그때 떠난다.”
第四章 중원으로
본래 강하고 패도적인 것이 그러하듯이 모래폭풍 또한 변덕스럽기 그지없다.
짧게는 일주일을 연속으로 휘몰아치는 일도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때도 있다. 실제로 과거 어느 때에는 일 년여간 모래폭풍이 불지 않은 적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혈무악이 중원으로 떠나겠다고 선포한 다음 날, 대막 역사에 다시없을 모래폭풍이 휘몰아쳤다.
쿠―워어어어어.
소리 자체가 보통 폭풍과 달랐다.
마치 거대한 괴수의 포효와도 같았다.
“꿀꺽.”
마적 누군가가 침을 삼켰다.
그 뒤를 이어 몇 번 더 침을 삼키는 소리가 이어졌다.
일렬로 늘어선 마적들이 잔잔히 떨리는 눈으로 저 멀리서 부는 모래폭풍을 주시했다.
쿠―워어어어어.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괴수의 포효에 흑서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꿀꺽 하고 침을 삼킨 흑서가 혈무악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우리 그냥 안 가면 안 될까요?”
“……약속이다.”
혈무악이 덧붙였다.
“약속은 곧 목숨이다.”
“끄응.”
신음을 흘린 흑서가 신경질적으로 수염을 비비 꼬았다.
창백한 안색의 철연화가 말했다.
“그냥 모래폭풍이 잔잔해지면…….”
“사막에서는 사막의 법을 따라야 한다.”
“하아.”
한숨을 내쉰 철연화가 두 눈을 감았다.
그녀 또한 혈무악에게 ‘사막의 율법’이라는 허무맹랑한 율법을 들었다. 죽고 싶어 안달하는 바보들의 율법, 철연화의 생각은 그랬다.
한곳에 모인 두목들의 선두에 자리 잡은 혈살마옹이 걱정 어린 기색으로 물었다.
“정말 갈 게냐?”
“예.”
혈살마옹의 얼굴에 자리 잡은 걱정이 짙어졌다.
“죽을지도 모른다. 내가 평생을 대막에서 살았지만 저런 거대한 모래폭풍은 생전…….”
“어르신.”
혈살마옹의 말을 자른 혈무악이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언제부터 대막의 마왕께서 그렇게 겁쟁이가 되셨습니까.”
“끄응.”
혈살마옹이 혀를 차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폭풍, 그것도 대막의 모래폭풍은 무섭다.
사람 한 명?
낙타 한 마리?
우습다.
혈살마옹은 과거 낙타 칠십여 마리가 모래폭풍에 휘말려 솟구쳤던 기억을 떠올리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것도 짐을 가득 실은 낙타였다. 그런 낙타 칠십여 마리가 앗 하는 순각에 하늘로 솟구쳐 모습을 감춘 것이다.
하늘로 솟구친 낙타들은 모래폭풍을 이루는 돌, 그리고 모래에 의해 잘게 다져졌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땅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시체를 찾는 경우는 그나마 운이 좋은 게다. 몇몇 소수 부족은 모래폭풍을 신으로 숭배한다. 대막 최강의 마적단인 광풍사의 이름 또한 모래폭풍에서 따온 것이다.
대막에서 모래폭풍이란 파멸의 상징이다.
쿠―워어어어어어.
저 멀리 모래폭풍이 다시 한 번 포효를 터트리자 모여 있던 마적들이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끄응, 끙.
끼잉.
혈랑들은 땅바닥에 코를 박은 채 신음을 흘리기에 바빴다.
히이잉.
히잉.
적혈마들 또한 이성을 잃고 거품을 물었다.
낙타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직 한 마리, 혈무악이 타고 있는 낙타 광풍만이 두 눈을 부릅뜨고 모래폭풍을 주시하고 있었다.
“후후. 광풍, 너도 느끼는 거냐?”
낮게 웃어 보인 혈무악이 광풍의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놈이…… 나를 부르고 있다.”
모래폭풍을 주시하는 혈무악의 두 눈이 뜨겁게 이글거렸다.
저 멀리서 백랑이 한 아름 짐을 들고 나타났다.
약간의 식량과 식수, 그리고 기다란 검은색 줄이었다.
백랑에게 검은 줄을 받아 든 혈무악이 허리춤에 검은 줄을 몇 번 돌리고는 철연화에게 건넸다.
“허리춤에 이 줄을 묶어라.”
“예.”
허리춤에 몇 번 줄을 돌린 철연화가 흑서에게 건네자 흑서 또한 혈무악과 마찬가지로 허리춤에 줄을 돌리고 백랑에게 건넸다. 줄을 받아 든 백랑 또한 허리춤에 줄을 묶었다.
모래폭풍에 휘날리는 것과 혹시나 있을 사고를 방지하려는 작은 방법이었다.
“두목, 정말 가실 겁니까?”
입 안 가득 육포를 질겅이던 적돈이 물었다.
“그냥 다음 모래폭풍…….”
“적돈.”
“예?”
“사내의 약속은?”
꿀꺽 입속의 육포를 삼킨 적돈이 답했다.
“목숨이죠.”
“그래. 후후.”
낮게 웃은 혈무악이 고개를 돌려 한가득 웃음을 지어 보인 혈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이, 아저씨, 내가 없는 동안 잘 좀 부탁합시다.”
“으하하하. 걱정 말아라. 진짜 두목이 무엇인지 내가 보여 줄 테니.”
“두목이 아니라 두목 대리.”
“으하하. 그래. 이제 내가 광풍사의 두목이다.”
“말을 말아야지, 말을.”
설레설레 고개를 저은 혈무악이 몸을 돌려 저 멀리 모래폭풍을 바라봤다.
짐을 정리하던 흑서가 다가와 물었다.
“뭘 그렇게 보십니까?”
“저놈이 나를 부르고 있다.”
혈무악의 시선을 따라 모래폭풍을 본 흑서가 얼굴을 찡그리며 답했다.
“귀에 모래라도 들어가셨어요?”
“크윽. 준비나 해!”
낮게 신음을 한 혈무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흠칫한 흑서가 고개를 돌려 구시렁거렸다.
“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지랄이…….”
“뭐!”
“준비 다 했다고요. 헤헤.”
찔끔한 흑서가 헤프게 웃었다.
“저도 다 했습니다.”
“저도 끝났어요.”
그에 맞춰 백랑과 철연화가 다가와 말했다.
“좋아.”
이내 혈무악에게 혈살마옹이 다가왔다.
“무악아.”
“무슨 일이십니까, 어르신.”
혈무악의 물음에 혈살마옹이 품에서 한 장의 서찰을 꺼내 건넸다.
“만약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이 닥친다면 그때 이 서찰을 열어 보거라.”
서찰을 건네는 혈살마옹의 모습이 사뭇 진지해 혈무악은 조심스레 서찰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이 무에 있느냐. 그저 너를 걱정해서 그런 것인데.”
“하하하. 그것이 감사하다는 것이지요.”
호탕하게 웃은 혈무악이 수천의 마적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 년!”
짧고 굵은 목소리가 마적들의 귀를 강타했다.
“늦어도 일 년 안에 대막천마를 부르짖는 중원 놈들의 울음소리가 이곳 대막까지 들릴 것이다! 대막천마 혈무악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