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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제천 1권 (16화)


자신만만한 혈무악의 말에 수천 마적들의 가슴이 울렁였다.
챙―!
도를 뽑아 든 혈무악이 외쳤다.
“사내의 약속은!”
“목숨이다!”
수천 마적들의 외침이 대막을 강타했다.
“하하하하하. 잘 있어라, 새끼들아!”
앙천광소를 터트린 혈무악이 낙타의 배를 걷어찼다.
꾸허어엉.
우렁찬 포효와 함께 광풍이 앞을 향해 내달렸다.
혈무악과 딸려 묶여 있던 흑서와 철연화, 백랑 또한 낙타 위에 탄 채로 그의 뒤를 따랐다.
“어? 어?”
“막주!”
마적들이 놀라 혈무악을 불렀다.
눈물이 흐르는 감동적인 이별을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저렇게 아무 말 없이 달려 나갈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멍하게 혈무악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혈살마옹이 나이답지 않은 기세로 소리쳤다.
“모두 막주는 향해 병례(兵禮)!”
쩌렁쩌렁한 그의 목소리에 마적들이 저마다 병기를 뽑아 올렸다.
채채채채채챙―!
수천 개의 병기가 대막의 태양빛을 머금고 휘황찬란한 기광을 교차했다.
“다녀오십시오, 막주!”
수천 목소리가 하나의 뜻을 품고 대막을 강타했다.
“다녀오거라, 무악아.”
혈살마옹이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작은 점이 되어 모래폭풍을 향해 나아가는 혈무악 일행을 주시하던 혈살마옹이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육포를 질겅이던 적돈과 두 눈이 마주쳤다.
“허허. 무악이도 갔으니 이제 먹을 걱정은…….”
“……렸어.”
“응?”
뜻을 알 수 없는 적돈의 중얼거림에 혈살마옹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질렸어.”
투툭.
적돈이 씹던 육포가 바닥에 떨어졌다.
주륵.
누런 육즙이 적돈의 두툼한 살을 타고 흘러내렸다.
토옥.
아롱진 육즙이 막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살 속에 파묻힌 적돈의 두 눈이 번쩍 신광을 내뿜었다.
“육포는 질렸어어어어!”
꾸허어엉.
적돈의 절규에 화답이라도 하듯, 적돈이 타고 있는 낙타가 마주 포효하려 네 다리를 놀렸다. 사람들이 미처 반응을 할 사이도 없이 적돈의 신형이 혈무악 일행의 뒤를 쫓아 점이 되어 버렸다.
“허, 허허.”
혈살마옹의 입에서 당황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내 안색을 수습한 혈살마옹이 고개를 돌려 한쪽에서 연신 대소를 터트리는 혈갈을 바라봤다.
“으하하하! 내가 두목이다! 내가 광풍사의 두목 혈갈이다!”
“끄응.”
잘만 처먹던 육포가 질렸다며 뛰쳐나간 놈도 놈이지만, 여기 이놈도 정상은 아니었다.
“혈갈아.”
“으하하하. 이제 광풍사의 두목 혈갈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혈살마옹의 얼굴이 구겨졌다.
“……광풍사의 두목 혈갈아.”
“으하하하. 예, 왜 그러십니까.”
혈갈이 진득하게 흐르는 땀을 닦으며 답했다.
“적돈이 막주를 쫓아갔다.”
“예?”
“적돈이 막주를 쫓아갔다고!”
혈살마옹이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혈갈이 웃음을 멈추고 점이 된 적돈의 뒤를 쫓았다. 곧이어 혈갈의 입에서 전보다 배는 더 커다란 대소가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하. 놈도 제가 무섭긴 무서운가 봅니다. 저렇게 내빼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
“이제 혈무악 그놈이 없으니 제 세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잔소리를 하던 흑서 놈도 없고, 항상 토를 달던 백랑 놈도 사라졌고, 처먹기만 하고 답답하게 만들었던 적돈도 없으니 이제 제 세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으하하하!”
혈갈의 웃음이 점차 힘을 잃었다.
“이제 제가 광풍사의 두목이 되었으니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해야지요. 여자도 다시 취급하고, 또, 또…….”
한참을 ‘또, 또’ 하던 혈갈이 저 멀리 점이 된 혈무악 일행과 적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 꺼지면 나는 누구랑 싸우란 말이냐…….”
한참 점들을 주시하던 혈갈이 곧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에이, 시팔.”
한바탕 질펀한 욕을 내뱉은 혈갈이 낙타의 고삐를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혈살마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가 없는 동안 광풍사 좀 잘 부탁드립니다.”
“뭐, 뭣?”
“하―아!”
넋을 빼놓은 혈살마옹을 뒤로한 혈갈이 낙타의 배를 걷어차 앞을 향해 질주했다.
“나도 같이 좀 가자, 이 개아들놈아!”
혈갈의 목소리에는 전에 없던 즐거움이 가득했다.

* * *

“두목, 뒤에서 누가 오는데요?”
“응?”
흑서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돌려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을 뚫고 접근하는 두 인영을 주시했다. 마침내 두 인영이 모래바람을 뚫고 나타나자 일행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하! 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린 혈무악이 입을 열었다.
“적돈?”
“혈갈도 있습니다.”
혈갈과 적돈이 일행 앞에 도착했다.
“에이, 퉤퉤. 망할 놈의 모래바람.”
입 안 가득 씹히는 모래를 뱉어 낸 혈갈이 곧 고개를 올려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을 향해 툭 말을 던졌다.
“뭘 봐?”
너무나 당당한 그 모습에 일행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을 때, 적돈이 혈무악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두목 밑에서 살아온 저희가 어떻게 두목을 두고 대막에 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는 저희의 의리가…….”
“적돈 너 이 새끼, 중원 음식이 먹어 보고 싶다고 두목 따라가는 거라며!”
“그걸 말하면 어떡해, 이 아저씨야!”
“뭐? 아저씨? 내가 이래 봬도 광풍사 두목 대리야!”
“두목 대리가 뭐야, 대리가. 나 같으면 시켜 줘도 안 한다.”
“그러는 너는 두목 대리 해 봤어? 해 봤냐고! 해 보지도 않은 새끼가 입만 살아서는 나불거려, 나불거리긴.”
“시켜 줘도 안 한다니까.”
혈갈과 적돈이 일행을 앞에 두고 투닥거렸다.
한참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혈무악의 입술이 열렸다.
“크, 크하하하하!”
유쾌함 가득한 웃음이 혈갈과 적돈의 싸움을 저지했다.
이내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린 적돈과 혈갈이 입을 열었다.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두목. 중원의 음식, 아니 두목과의 의리를 생각해서…….”
“두목 대리는 혈살마옹 그 영감한테 맡겼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될 거다.”
혈무악의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크, 크큭.”
이내 얼굴에 묻은 모래를 털어 낸 혈무악이 환히 웃으며 답했다.
“짐이나 되지 마라.”
“고, 고맙습니다, 두목!”
“흥. 누구한테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두 사람이 각자의 방식대로 재회의 기쁨을 표현하는 그때, 굳은 얼굴의 철연화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저기…… 지금 재회의 기쁨을 나눌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쿠―워어어어어어.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래폭풍이 우렁찬 포효를 터트렸다.
쿠―구구구궁.
멀리서 그 형체만이 보이던 모래폭풍이 이제는 면전에 들이닥친 상태였다.
“백랑, 저놈들한테도 줄을 줘라.”
“예.”
짧게 고개를 끄덕인 백랑이 혈갈과 적돈에게도 검은 줄을 건넸다.
이내 혈갈과 적돈 또한 일행과 마찬가지로 몸을 묶어 하나로 연결되자 혈무악이 면전에 들이닥친 모래폭풍을 향해 도를 겨눴다.
“……도와드릴까요?”
어느새 검을 뽑아 든 흑서가 물었다.
그의 뒤로 각자의 병기를 든 일행이 혈무악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피식 웃어 보인 혈무악이 답했다.
“쫓겨나기 싫으면 당장 그 연장들 집어넣어라.”
“끄응. 곧 죽어도 자존심은…….”
무심코 중얼거린 흑서가 아차 하며 혈무악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흑서를 떠난 뒤였다.
쿠―워어어어어.
혈무악의 두 눈이 면전의 모래폭풍을 향했다.
그의 안색이 잘게 떨렸다.
‘그 양반도 이걸 깨트렸단 말이지?’
꾸욱.
도병을 쥔 혈무악의 손등 위로 푸른 힘줄이 불거졌다.
“그 양반이 했는데 내가 못할 리가 없지……!”
혈무악의 목소리에 힘이 감돌기 시작했다.
“모래폭풍……!”
파멸을 상징하는 대막의 진정한 마왕!
그 마왕을 바라보는 혈무악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한번쯤 붙어 보고 싶었지!”
우―우우웅.
혈무악의 도에서 삼 장에 가까운 도강이 번쩍 솟구쳤다.
“받아랏!”
쿠―워어어어어.
대막 전설의 한 편을 장식한 십팔로광풍도법이 다시 한 번 그 모습을 드러냈다.

* * *

감숙성(甘肅省) 끄트머리에 있는 고합(高合)은 지리적 조건 때문인지 몽고인은 물론 대막의 사람들, 그리고 중원인들까지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는 곳이다.
물론 내륙과 거리가 제법 떨어져 무림인들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지만 외륙으로 가기 위해서는 꼭 거치는 곳이 바로 고합이기에 항상 사람들이 들끓었다.
지리적 이점 때문인지 고합에는 여행객을 위한 객잔들이 특히나 많았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은 고합의 외곽에 위치한 천상루(天上樓)였다.
“농땡이 피우는 놈들에게 줄 돈은 없다!”
점소이들을 독촉한 육현이 어기적어기적 거구를 옮겼다. 돈이 한가득 쌓인 입구 부근의 계산대였다. 계산대 뒤에는 수많은 종이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는데 바로 현상금이 걸린 죄수들의 얼굴 그림과 그 죄목, 그리고 액수였다.
근 백여 개의 종이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다섯 개의 종이가 있었는데 몇 번을 덧칠하고 덧붙인 것인지 낡다 못해 해져 있었다.
너덜거리는 종이짝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죄수들의 이름은 혈무악, 흑서, 백랑, 혈갈, 적돈, 바로 광풍사의 두목과 네 조장들이었다.
“에잉, 대체 이 짓을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건지.”
불만을 토해 낸 육현이 그 거구를 움직여 계산대 밑에서 종이 쪼가리를 꺼냈다.
관에서 새롭게 내어준 종이들이었다.
“잡힐 놈들이었으면 진작 잡혔지.”
투덜거린 육현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종이를 거칠게 찢었다.
이내 광풍사의 네 조장들의 종이를 찢고 마지막 혈무악의 종이를 찢으려던 육현의 손이 멈칫했다. 과연 거물답게 혈무악에 걸린 현상금은 돈이 아닌 관직과 넓은 토지였다.
“이놈만 잡으면 그냥 단숨에 팔자를 피는 건데.”
찌―익.
혈무악의 얼굴이 무참히 찢겨 나갔다.
이내 육현이 찢긴 종이 위에 새롭게 꺼낸 종이들을 다시 덧붙였다.
또 무슨 사고를 친 것인지 현상금이 두 배 가까이 올라 있었다. 더군다나 혈무악이란 놈을 잡는 자는 황제를 알현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이 정도라면 보통 사람이라도 한 번쯤 혹할 만한 조건이었다.
육현이 무릎을 두드리며 쩝 입맛을 다셨다.
“내 앞에만 나타나면 그냥 한주먹에…….”
끼이이익.
살집 두둑한 주먹을 쥐고 폼을 잡던 육현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입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옵…… 허억!”
친절한 영업용 웃음을 머금은 육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혀, 혈무…… 헙.”
저도 모르게 이름을 중얼거린 육현이 재빨리 자신의 입을 막았다.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선 사내, 혈무악이 고개를 갸웃했다.
“주인장, 뭐라고?”
“아, 아닙니다, 혈무악 님.”
육현이 재빨리 수습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부추기는 꼴이 되었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야?”
‘아차!’
육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육수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주인장, 내가 지금…….”
“아씨, 두목, 지금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 안 보이십니까? 그렇게 입구를 막고 있으면 저희는 어쩌라고요. 거기다 두목이 좀 유명합니까. 알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렇게 예민하게 따집니까.”
육현에게는 구세주와도 같은 목소리가 입구 밖에서 울렸다. 막 육현을 추궁하려던 혈무악이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돌렸다.
“뭐?”
“천천히 이야기 나누시라고요. 헤헤.”
짜증 섞인 혈무악의 목소리에 입구 밖, 구세주의 목소리가 금세 꼬리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