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천마제천 1권 (17화)
힐긋 육현을 쳐다본 혈무악이 천상루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이어 육현을 살린 구세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매일 나한테만 지랄이야, 지랄이.”
질펀한 욕설과 함께 등장한 중년인에 육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소면살 흑서!’
광풍사 네 두목 중 한 명이자 웃으면서 사람을 죽인다는 마귀!
“퉤퉤, 빌어먹을 모래폭풍. 아직도 입 안이 까칠하네.”
‘독수혈마 혈갈!’
잔인한 손속으로 사람의 심장을 빼먹는다는 악귀!
“투덜거리자 마라, 혈갈.”
‘독행혈랑 백랑!’
자비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는 잔인한 살인귀!
“두목, 여기가 바로 천상루입니다. 음식으로는 감숙에서 여기를 따라올 곳이 없다고 소문이 자자한 곳입니다.”
‘단창마웅 적돈!’
죽인 사람의 생살을 뜯어먹는다는 식인귀!
광풍사의 네 조장들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내자 육현의 얼굴이 푸르르 떨렸다.
그 뒤를 이어 마지막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여유롭게 식사할 시간이 없어요.”
‘이 여자는……!’
청초한 얼굴의 여인을 보는 육현의 눈이 반짝였다.
‘……누구지?’
현상금이 걸린 죄수들 중에는 여자도 여럿 있었지만 눈앞의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육현이 여인의 정체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어느새 자리를 잡은 흑서가 탁자를 치며 소리 질렀다.
“어이 주인장, 여기 주문 안 받아?”
“예? 예. 갑니다, 가요.”
화들짝 놀란 육현이 점소이들을 제치고 황급히 발을 놀렸다.
이내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일행의 앞에 도착한 육현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무,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육현의 거구가 애처롭게 떨렸다.
눈앞의 자들은 실질적인 대막의 지배자들이다.
실상 삼층, 아니 후원의 별채로 안내해서 융숭한 대접을 해야 했다. 뒤의 현상금 종이만 없었더라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여기는 뭐가 맛있지?”
“예, 예. 저희 가게는 다 맛있습니다.”
“그래? 그럼 술은 뭐가 괜찮지?”
“두강주(杜康酒)가 있습니다.”
부인 몰래 애지중지 아껴 둔 두강주까지 꺼냈다.
입맛을 다신 혈무악이 손을 휘휘 저었다.
“술은 두강주로 내오고 나머지는 주인장이 알아서 푸짐하게 차려 와.”
발끈할 만한 하대였지만 그가 하니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아,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육현이 거구답지 않은 움직임으로 재빨리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관에 신고하면 사지를 잘라 주마.”
“……!”
귓가에 들리는 섬뜩한 목소리에 육현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전음.
언젠가 어디선가 들었던 전음이란 것이 분명했다.
이내 육현이 주방으로 사라지자 혈무악이 흑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무슨 짓 했냐?”
“무슨 짓이라뇨?”
“그럼 괜히 비틀거렸단 말이야?”
혈무악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흑서가 혀를 차며 답했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가 보죠. 제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사람 잡는 것도 유분수지. 이제는 트집 잡을 핑계가 없으니 괜히 그러네.”
“끄응.”
앓는 소리를 낸 혈무악이 일행을 살폈다.
혈갈과 백랑은 또 쓸데없는 것으로 말싸움 중이었고 적돈은 벌써부터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흑서는 괜히 검을 꼼지락거리면서 주변의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고 있었고 철연화는 뭐가 불만인지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여자, 뭐가 불만이냐.”
혈무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철연화가 답했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지금 이 시간에도 가문은……!”
“흑서.”
“예?”
난데없이 흑서를 부른 혈무악이 두 눈을 철연화에게 고정한 채 물었다.
“여기서 사천까지의 거리가 얼마냐.”
“낙타 판 돈으로 말을 사서 밤낮으로 말을 바꿔 가며 달리면 삼십 일 정도 걸릴 겁니다. 물론 중간에 마을에 들러 식량을 조달하는 시간까지 포함해서입니다.”
말 그대로 중간중간 마을에 들러 말을 바꿔 가며 밤낮으로 쉬지 않고 달렸을 때야 가능한 날짜였다.
“여자, 비무가 언제냐.”
날짜를 가늠한 철연화가 답했다.
“……삼십오 일 후예요.”
“좋아. 시간이 딱 맞는군.”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혈무악을 향해 입 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킨 적돈이 물었다.
“어디 들르실 데라도 있습니까?”
“영강(寧强)에 들른다.”
“영강이라면 분명…….”
영강을 곱씹던 백랑이 눈썹을 꿈틀 하며 말했다.
“매화표국에 들르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네 조장들은 물론 철연화 또한 화들짝 놀랐다.
“너 제정신이냐? 달랑 우리 네 명이서 그놈들 작업하러 가자고?”
“정확히는 썰러 가는 거지.”
“하!”
혈갈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씨익 웃은 혈무악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아저씨, 받았으니 당연히 되갚아 줘야지.”
“하지만…….”
혈무악의 말에는 동감하는 혈갈이었기에 마땅히 할 말을 못 찾고 우물거렸다.
“저는 맛있는 걸 먹을 수만 있다면 어디든 환영입니다.”
“두목의 뜻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적돈과 백랑이 혈무악을 거들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흑서가 수염을 비비 꼬며 간사하게 웃었다.
“개인적으로도 그곳에 들러야 할 이유가 있으니 저도 찬성입니다.”
“이런 미친놈들…….”
얼굴을 구긴 혈갈이 뚜두둑 손가락을 풀며 말을 이었다.
“나 없이 너희가 가능할 것 같으냐? 흥.”
네 조장이 모두 찬성하자 홀로 남은 철연화가 기도 차지 않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모두 제정신이세요? 영강은 섬서성에 있어요. 섬서성에는 화산파가 있구요.”
“화산파라면 저번에 털린 그놈들?”
혈갈이 킬킬 웃으며 말했다.
“그놈들, 그게 한쪽밖에 없는데 밤일은 잘하나 모르겠네. 낄낄.”
“푸하하하하.”
“크하하하.”
일행이 침을 튀기며 웃었다.
그들에게 앞으로 닥칠 걱정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해 보였다. 낙천적인 그들의 모습에 철연화가 헛웃음을 짓다 곧 그녀 또한 시원스레 웃었다. 과거의 그녀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혈무악, 그리고 네 조장들과 오랜 생활을 하며 영향을 받은 탓이었다.
화산파 무인들을 이야깃거리 삼아 수다를 떨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육현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술병을 들고 나타났다. 그의 뒤로 양손 가득 음식을 든 점소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 음식이다, 음식.”
하나 둘 상 위에 차려지는 음식에 적돈이 호들갑을 떨었다.
호화스러운 요리들이 한상 푸짐하게 차려졌다.
“저…….”
육현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제가 특별히 아끼는 두강주입니다.”
‘특별히 아끼는’이라는 말을 강조한 육현이 말을 이었다.
“이건 그냥 제가 드리는 싶어 대접하는 것이니 맛있게 드십시오.”
적돈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주인장이 뭘 아네. 으하하하.”
“음식에 침 튄다, 인마.”
적돈을 향해 일침을 가한 혈무악이 육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잘 먹지.”
“가, 감사합니다.”
대체 무엇이 감사하다는 것인지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육현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다행히 눈앞의 악마들은 계산대 뒤의 수배자 종이를 보지 못한 듯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진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다섯 장의 종이를 찢어 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육현의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의 양이 많아졌다.
“그,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육현이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육현의 뒷모습을 멀뚱히 보던 흑서가 입을 열었다.
“저 양반 왜 저럽니까? 무슨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어쩌면 귀신보다 더한 인간들을 본 것일지도 모르지.”
젓가락을 집어 든 혈무악이 비릿하게 웃었다.
“예?”
“음식이나 먹어라.”
흑서의 반문을 무시한 혈무악이 푸짐하게 한상 차려진 음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고합에서 제일가는 곳답게 음식 또한 먹기가 아까울 정도로 화려했다. 혈무악이 살면서 생전 보지 못한 음식들까지 향을 뽐내고 있었다. 적돈은 벌써 음식에 머리를 처박고 쩝쩝거리고 있었다.
“천천히 먹어라, 천천히. 누가 보면 대막에서 너 굶긴 줄 알겠다.”
작게 웃어 보인 혈무악이 육현이 가져온 술병의 뚜껑을 열었다.
뽕―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닫혔던 뚜껑이 열리며 알싸한 냄새가 혈무악의 코를 간질였다.
“음.”
코끝을 스치는 술 냄새를 음미하는 혈무악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과연 육현이 특별히 아꼈던 술이라고 할 만큼 두강주의 향은 뛰어났다.
“자, 한번 마셔 볼까?”
쩝쩝 입맛을 다신 혈무악이 두강주를 따랐다.
쪼―로로로.
영롱한 빛을 머금은 두강주가 한 잔 가득 채워졌다.
적돈을 제외한 조장들의 시선이 두강주에 홀렸다. 그들 또한 혈무악만큼이나 술을 좋아하는 자들이었다.
“꿀꺽.”
혈갈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우, 우리도 한입 먹어 보자.”
“누가 먹지 말랍니까?”
혈무악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혈갈이 허겁지겁 자신의 잔에 두강주를 따랐다. 그 뒤를 이어 흑서와 백랑 또한 한 잔 가득 두강주를 따랐다. 마침내 조장들의 잔이 다 채워지자 혈무악이 번쩍 잔을 치켜들며 외쳤다.
“한쪽 불알로 열심히 밤일을 할 놈들을 위하여!”
“위하여!”
쩌―엉.
조장들이 잔을 치켜올려 혈무악의 잔에 힘껏 부딪치고는 한입에 두강주를 털어 넣었다.
“꿀꺽, 꿀꺽.”
순식간에 두강주 한 병을 네 등분한 일행의 목울대가 쉴 틈 없이 움직였다. 철연화가 기가 질렸다는 얼굴로 다섯 명의 사내들을 바라봤다.
두강주라면 상당히 독한 술이다.
그걸 한 번에 다 마시는 짓은 바보짓이나 다름없었다. 당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쓴맛이 느껴지는 듯해, 철연화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크―으.”
탕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은 혈무악이 얼굴을 찌푸리며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나머지 조장들 또한 입가에 묻은 두강주를 닦으며 저마다 얼굴을 찌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좋다! 하하하.”
호기롭게 외친 혈무악이 음식을 한 점 집어 삼켰다.
꿀꺽 음식을 씹어 삼킨 후, 조신하게 식사를 하는 철연화를 향해 불쑥 말을 걸었다.
“이봐, 여자.”
“예?”
갑작스런 혈무악의 부름에 음식을 먹던 철연화가 답했다.
얼마 남지 않은 두강주를 잔에 따른 혈무악이 말을 이었다.
“저번에 말했던 세외사세에 대해 자세히 말해 봐라.”
“아.”
짧게 탄성을 터트린 철연화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혈무악의 눈치를 살폈다.
저번 이야기 때, 광풍사를 세외사세의 가장 하위라고 한 것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 그런가 걱정이 되었지만 그것은 아닌 듯했다.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은 듯했다. 내심 안도한 철연화가 말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세외사세란 중원 밖의 강력한 네 개의 세력들을 칭하는 말이에요. 그중에는 여러분이 계신 광풍사도…….”
한 잔 들이켠 혈무악이 신음을 흘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자잘한 것은 됐고, 우리 말고 나머지 세 놈들에 대해서나 말해 봐라.”
“예. 일단 북해(北海)의 북해빙궁(北海氷宮)이 있어요. 특별히 여인들로만 이루어진 단체로, 철저한 금남(禁男)을 신조로 삼는 곳이죠. 그곳의 수장은 냉심빙모(冷心氷母) 몽적화(夢赤花)라는 분으로, 젊었을 적에 중원에서 활동했던 경력 덕에 세외사세 중 그나마 중원과 잦은 교류를 갖는 곳이에요.”
“그리고?”
“그리고 남림(南林)의 태양신교(太陽神敎)가 있어요. 태양을 신으로 모시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죠.”
“태양이라면 하늘에 떠 있는 그것 말인가?”
“예.”
“미친놈들, 모실 게 없어서 태양을 모셔? 왜, 집에 있는 쥐새끼를 신으로 모시지.”
혈무악이 냉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그들의 수장은 태양신마(太陽神魔) 탁대붕(卓大鵬)이라는 자로 성격이 잔혹하고 악랄하다는 평이 있는 이예요. 이들이 바로 세외사세 중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들이에요.”
“그 미친놈들이?”
혈무악이 얼굴을 구기며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