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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제천 1권 (18화)


잠자코 있던 흑서가 말했다.
“본래 한 명의 미친놈이 정상인 열 명의 힘을 내는 법이죠.”
“무슨 소리야, 그건.”
혈무악이 얼굴을 찌푸리자 흑서가 에잇 하며 답했다.
“한 마디로 미친놈들이라고요. 태양을 신으로 모시는 거 보면 모르겠어요? 그냥 또라이들이에요. 특히 그 빌어먹을 탁가 놈은……!”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흑서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입을 막았다.
모두의 시선이 흑서를 향했다.
철연화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탁가 놈……이라고 하셨죠, 지금?”
“내, 내가 언제 그랬습니까. 잘못 들은 거겠지요.”
혈무악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입을 열었다.
“흑서 너, 그놈을 알고 있냐?”
“제가 그런 놈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지만 방금 전에 분명 탁가 놈이라고 했다.”
“안 그랬습니다!”
흑서가 발악하듯 외쳤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랑이 재빨리 말했다.
“분명히 탁가 놈이라고 했습니다.”
“우물우물. 저도 들었습니다.”
“나도 들었다.”
적돈과 혈갈이 거들었다.
이내 안색을 수습한 흑서가 철연화를 향해 슬쩍 기세를 일으켰다.
“자, 나머지 한 곳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지요.”
“예? 예…….”
몸을 옥죄는 섬뜩한 기운에 흠칫한 철연화가 창백히 질린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다음은 서장(西藏)의 포달라궁(布達拉宮)이에요.”
흑서를 노려보던 혈무악이 쩝 입맛을 다시며 철연화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포달라궁?”
“예. 서장의 승려들이 모여 만든 사찰로 서장에서는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곳이죠.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말이지요. 자세한 것은 밝혀지지 않은 곳이지만 가끔 나타나는 서장의 승려들만 보아도 그들의 힘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곳이에요.”
음식을 삼킨 혈무악이 말했다.
“중놈들이 절간에서 염불이나 욀 것이지 무슨 무공을 익히고 지랄들이야.”
“두, 두목!”
혈무악의 말에 철연화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대막에서는 모르지만 중원에서는 절대 승려를 욕하면 안 돼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혈무악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지?”
“소림사(少林寺) 때문이에요.”
“소림사?”
“예. 중원 승려들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사찰이죠. 그곳에 있는 승려들의 무공은 포달라궁의 승려들에 비해 처지지 않아요. 더군다나 현 소림사의 방장(方丈)은…….”
“여자.”
철연화의 말을 자른 혈무악이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씨익 웃었다.
“어차피 칠십 년 남짓 사는 게 사람이다. 겨우 칠십 년 사는데 조심해야 할 게 뭐가 그리 많냐. 그냥 편하게 사는 거다, 편하게.”
“하지만…….”
“그리고 내가 욕하면 제깟 놈들이 어쩔 거야? 오면 한번 붙으면 되는 거지, 안 그러냐?”
혈무악이 한쪽에 있는 조장들을 향해 물었다.
“그렇습니다.”
“쩝쩝, 중놈들은 풀만 먹고 산다면서요? 그래서 힘이나 쓰겠습니까?”
“중이든 뭐든 오기만 하면 오체분시를 해 주마.”
흑서를 제외한 세 조장들이 살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너는 왜 대답이 없어?”
혈무악의 지목을 받은 흑서가 헤헤 웃으며 수염을 꼬았다.
“저는 좀……. 소림의 땡중들이라면 지긋지긋하게 당해 봐서 말입니다.”
“그래서 혼자만 도망치시겠다?”
“왜 또 말이 그렇게 됩니까.”
“다 싸우는데 너 혼자 싫다면 당연히 도망치는 것밖에 더 있냐.”
혈무악의 말에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한 흑서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소림의 땡중들이 오면 저도 한몫 거들겠습니다.”
“진작에 그래야지. 자식이 쓸데없이 힘 빼게 만들고 있어.”
“끄응.”
수염을 꼬는 흑서의 손이 빨라졌다.
자신만만한 그들의 모습에 철연화의 얼굴에 황당함이 서렸다.
천하의 그 누가 소림사의 승려들을 땡중이라 부르겠는가. 저들이 아니라면 절대 불가능했다.
“그건 그렇고…….”
흑서가 넌지시 운을 띄웠다.
“호칭부터 좀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호칭? 무슨 호칭?”
혈무악이 묻자 흑서가 답했다.
“이제 중원에 왔는데 계속해서 두목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도적들이란 거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백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적이 아니라 마적이다.”
“업어치나 메치나.”
백랑을 향해 이죽거린 흑서가 수염을 꼬았다.
잠자코 있던 혈무악이 말했다.
“두목이란 게 뭐 어때서 그래? 그리고 마적이 어때서. 너희는 스스로가 마적이란 게 창피하냐?”
혈무악의 물음에 음식을 먹던 조장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마적이 된 걸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지겨운 육포 먹을 때만 빼고요.”
백랑과 적돈이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혈갈을 향해 시선이 모였다.
“나도 후회하지 않는다. 설령 죽는다 해도 말이야.”
혈갈이 그답지 않게 엄숙히 말했다.
“하하하.”
만족스럽게 웃은 혈무악이 말했다.
“봤지? 그러니까 호칭은 변함없이 두목이다. 알겠냐?”
“끄응. 마음대로 하세요, 마음대로.”
신음을 흘린 흑서가 음식을 깨작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 위에 차려졌던 음식들이 사라지고 점소이가 모락모락 김이 솟아나는 차를 내왔다. 척 봐도 고급이란 것이 느껴지는 차였지만 차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일행이 알 리가 없었다. 그나마 차에 대해 아는 철연화만이 맛을 음미하며 마실 뿐, 나머지는 거의 들이켜다시피 차를 마시고 있었다.
탁.
“이제 슬슬 가자.”
찻잔을 내려놓은 혈무악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조장들과 철연화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행이 입구를 향해 걸어가자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육현이 헐레벌떡 다가왔다.
“여기 얼마지?”
“아이고, 그냥 가셔도 됩니다.”
“그래도 그게 아니지. 흑서, 계산해라.”
혈무악의 낙타인 광풍을 제외한 나머지 낙타를 팔고 말을 사고도 제법 돈이 남았기에 음식값을 치를 돈은 충분했다.
“협객 나셨네, 협객 나셨어.”
“죽을래?”
눈을 부라리는 혈무악을 피해 육현에게 다가온 흑서가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며 물었다.
“주인장, 여기 얼마요?”
“정말 안 주셔도 되는데…….”
“나도 안 주고 싶은데 안 주면 저 인간이 난리칠 테니 그냥 받는 게 좋을 거요.”
흑서의 시선을 따라 혈무악을 쳐다본 육현이 눈을 부라리는 혈무악의 얼굴을 보고는 흠칫하며 고개를 처박았다.
“은자 닷 냥만…….”
흑서가 건네는 은자를 받아 든 육현이 거듭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일행의 뒤를 따라 천상루를 나서던 혈무악이 육현 앞에 멈췄다.
“아, 주인장.”
“예?”
갑작스런 혈무악의 부름에 육현이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혈무악이 자신의 눈썹을 톡톡 치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내 눈썹을 조금 진하게 그리라고 해.”
“예?”
씨익 웃어 보인 혈무악이 육현을 지나쳐 천상루를 나섰다.
‘눈썹을…… 진하게?’
“헉.”
혈무악의 말을 곱씹던 육현이 숨을 집어삼키며 고개를 돌려 현상금 종이가 붙은 벽을 바라봤다. 가장 위에 있던 다섯 장의 종이는 찢어 버린 상태였기에 혈무악이 봤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 * *

“뭐 하다 오셨어요?”
혈무악이 천상루에서 나오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흑서가 물었다.
“그냥 인사 좀 하고 나왔다.”
낮게 웃어 보이는 혈무악의 모습이 불만인지 가볍게 인상을 찡그린 흑서가 그에게 광풍을 넘겼다.
꾸허어엉.
광풍이 낮게 울며 혈무악의 몸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다른 조장들의 낙타와는 달리 혈무악의 광풍은 영물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만큼 혈무악이 아끼는 낙타였다. 본래는 혈무악의 아버지인 혈무백이 키우던 것을 이어받은 것으로, 그에게는 가족과도 같았다.
광풍을 팔아 버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나머지 조장들과 철연화의 낙타를 팔아 말을 살 돈을 마련했다.
“하하. 간지럽다, 이 녀석아.”
광풍의 콧잔등을 매만진 혈무악이 몸을 날려 광풍의 등에 걸터앉았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광풍의 모습이 신기한지 힐긋힐긋 쳐다보았다.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함께 여러 신기한 것들이 모이는 감숙이지만 낙타는 그들로서도 생소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이 불쾌한지 콧잔등을 찌푸린 혈무악이 광풍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가자.”
꾸허어엉.
우렁찬 포효를 터트린 광풍이 앞을 향해 내달렸다.
“어이쿠.”
“피해라.”
광풍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며 흩어졌다.
“우리도 가죠.”
철연화가 가볍게 기합을 터트리자 그녀를 태운 백마가 혈무악의 뒤를 따랐다.
“끼리끼리 노네, 끼리끼리 놀아.”
가볍게 혀를 찬 흑서가 말의 배를 걷어차자 그를 태운 말이 놀라며 내달렸다. 그 뒤를 이어 나머지 조장들 또한 말을 타고 뒤를 쫓았다.
스―스슥.
이내 혈무악 일행이 사라지자 천상루에서 제법 많은 수의 사람들이 빠져나왔다.
이제는 제법 멀리 떨어진 혈무악 일행을 눈여겨보던 사람들이 각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 * *

거칠 것 없던 질주가 멈춘 것은 이틀 후, 임택(臨澤)을 지나 장액(張掖)을 지나칠 때였다.
“워워, 멈춰라.”
선두에서 광풍을 몰던 혈무악이 광풍의 고삐를 잡아 올렸다.
꾸허어엉.
진득한 침을 길게 늘어트린 광풍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뒤따라오던 철연화와 조장들 또한 고삐를 잡아끌었다.
“무슨 일입니까?”
“잠깐 좀 쉬자. 광풍이 녀석이 힘들어 한다.”
본래 모래 위를 뛰게 자란 광풍이었기에 중원의 평평한 땅은 아직 익숙지 않아 체력 소모가 심했다. 더군다나 제대로 된 길이 아닌 산이나 들판의 험한 땅을 달렸기에 그 정도가 더 심했다.
꾸허엉.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아는지 광풍이 포효를 터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뭐, 그렇게 하죠.”
고개를 끄덕인 흑서가 뒤에 대기하던 조장들을 향해 외쳤다.
“여기서 잠깐 쉰다!”
말에서 내린 흑서가 굳은 목을 주무르며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바라봤다.
“하―아.”
뽀얀 입김이 나왔지만 춥지는 않았다.
낮에는 지옥처럼 덥고 밤에는 지옥처럼 추운 대막과는 달리 중원의 날씨는 따듯하기 그지없었다. 간간이 떠 있는 별들이 흑서의 마음을 자극했다.
“야, 분위기 잡지 말고 와서 불이나 피워라.”
“에이, 씨.”
혈무악의 목소리에 밤하늘을 감상하던 흑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런 건 백랑이나 다른 놈들 시키면 되잖아요!”
“하라면 하는 거지 뭔 말이 많아.”
“예, 예.”
어느새 동그랗게 모여 있는 일행의 모습에 흑서의 입이 한 자나 튀어나왔다.
숲인지라 장작으로 쓸 만한 것들은 지천에 깔렸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커다란 불이 일어나 주변을 밝혔다. 적돈은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육포를 불에 구워 먹고 있었다.
양손을 모닥불에 쬐던 철연화가 입을 열었다.
“밤……이네요.”
매일을 말 위에서 지내다 보니 시간관념은 물론 낮과 밤의 경계가 모호해져 밤이 되어도 별 감흥이 오지 않았다.
우엉, 우엉.
어디선가 이름 모를 산새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래, 밤이군.”
나무막대기를 불쏘시개 삼아 모닥불을 들쑤시던 혈무악이 말을 이었다.
“암습을 하기에는 아주 좋지. 특히나 이런 숲 속에서는 말이야.”
“예?”
난데없이 암습 운운하는 혈무악의 말에 철연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무슨…….”
“적돈, 그만 처먹고 연장이나 준비해 둬라.”
불쏘시개로 사용하던 막대기를 바닥에 내려놓은 혈무악이 싸늘하게 말하자 각 조장들이 각자의 병기를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