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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제천 1권 (19화)
“뭐야? 무슨 일이야?”
꾸벅꾸벅 졸던 혈갈이 화들짝 놀라며 묻자 백랑이 싸늘히 답했다.
“대략 오십여 명입니다.”
“정확히 쉰여섯입니다.”
흑서가 백랑의 말에 덧붙였다.
“뭐죠? 암습인가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철연화가 물었다.
“대체 누가……!”
“객잔에서 저희를 본 자들일 겁니다.”
중간에 마을에 들르지 않았으니 추격자가 따라붙었다면 필시 고합에서 자신들을 본 자들일 것이다.
스르릉.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뽑힌 백랑의 도가 섬뜩한 빛을 머금었다.
“모두 진정해라. 암습이나 하는 쥐새끼들한테 뭘 그렇게 긴장하냐.”
여유만만한 말과 함께 몸을 일으킨 혈무악이 가볍게 몸을 풀었다.
“여자, 스스로의 몸 정도는 지킬 수 있겠지?”
“예.”
혈무악과 조장들을 상대하기는 무리지만 그녀 또한 사화에 어울리는 무위 정도는 가지고 있다. 제 한 몸 지킬 정도는 되는 것이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은 혈무악이 조장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좋아. 그럼 오랜만에 그거나 해 볼까?”
“그거요?”
적돈의 물음에 혈무악이 씨익 웃었다.
“누가 더 많이 죽이나 시합.”
第五章 이름 없는 사내
빼곡히 자란 수풀 속에 숨어 두 눈만을 번뜩이는 삼십 대 중반의 사내, 왕각(王角)이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우엉, 우엉.”
기묘하게 구부러진 그의 입에서 산새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영락없는 산새의 울음소리였다.
우엉, 우엉.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편 수풀에서 또 다른 산새 울음소리가 울렸다. 사냥을 시작하겠다는 뜻을 품은 암호였다.
‘좋아.’
저 멀리서 일렁이는 모닥불과 그 모닥불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앉아 있는 무리를 바라보는 왕각의 눈이 반짝였다. 그의 별호는 비도탈명(飛刀奪命)으로 제법 이름을 날리는 현상금 사냥꾼이다. 다섯 개의 비도를 다루는 그의 손놀림에 쓰러지지 않은 죄수들이 없었다.
그런 그가 모처럼 만의 거물의 등장에 긴장하고 있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대막 마적들의 두목인 대막광마 혈무악과 그의 네 수하들이었다. 거기에 정체를 모르는 계집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현상금 사냥꾼들이 주로 이용하는 정보단체에서 모처럼 만에 거물이 나타났다는 정보를 듣고는 부랴부랴 다른 현상금 사냥꾼들을 모아 사냥을 위해 모인 것이다.
상대가 대막광마와 그의 수하들이란 말을 들었을 때는 빠진 이들도 여럿이었지만, 상금에 눈이 멀어 모인 자들의 수가 더욱 많았다. 혈무악의 수하 중 한 명만 잡아도 몇 대가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꽈악.
다섯 개의 비도를 움켜쥔 그의 손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무슨 일인지 자리에서 일어선 사냥감들이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서 살기가 일렁였다.
‘계집 하나, 그리고 목표 한 놈, 두 놈, 세 놈, 네 놈…….’
사냥감의 수를 가늠하던 왕각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네 놈?’
왕각의 두 눈이 경악으로 일렁였다.
‘한 놈이 없……!’
두 눈을 비빈 왕각이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무언가가 그의 코앞에서 불쑥 솟구쳤다.
“숨어 있느라 힘들지?”
“뭐……!”
콰직.
신음과도 같은 왕각의 목소리가 이어지는 파육음에 먹혔다.
콰드득.
왕각의 배에 박힌 낭아도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부부부북.
촘촘히 박힌 이빨이 체내의 장기를 걸레로 만들었다.
스르륵.
저항 없이 부드럽게 빠져나오는 낭아도의 이빨에 내장들이 얽혀 나왔다.
“꾸르륵.”
왕각의 입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쩡그랑.
다섯 개의 비도가 하늘도 갈라 보지 못한 채 바닥에 떨어졌다.
“한 놈…….”
바닥에 널브러져 경련을 일으키는 시체의 뒷목을 지그시 밟은 혈무악이 작게 중얼거렸다.
“꼴찌 안 하려면 열심히 해야지.”
흥건히 피에 젖은 도를 고쳐 잡은 혈무악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꺼으…….”
어둠 속에 녹아들듯 사라지는 혈무악의 등을 좇던 왕각의 두 눈이 점차 빛을 잃었다.
‘사냥감은 그들이 아니었어.’
바글바글.
숲 속의 벌레들이 왕각을 향해 몰려들었다.
몰려드는 벌레들에게 살이 뜯어먹히는 왕각의 두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우리가 바로 사냥감이었어!’
* * *
“으아아악!”
“크아악!”
“사, 살려 줘!”
가장 먼저 혈무악이 사라지고 그 뒤를 이어 흑서, 혈갈, 적돈 사라진 지 열 호흡도 되기 전에 사방에서 비명이 난무했다. 피와 살, 그리고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 절망과 공포에 전 비명소리뿐이었다.
“으아아악! 사, 살려 줘!”
수풀을 헤치고 이십 대 중반의 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공포에 질려 나타난 그가 백랑과 철연화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 제발 살려……!”
덥석.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손이 무인의 목을 움켜잡았다.
“살려 줘어어!”
촤르르륵.
튀어나온 손에 잡혀 수풀 속으로 끌려가는 그의 입에서 절망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콰드득, 콰득.
“끄아악!”
수풀 속에서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부스럭.
이내 수풀을 헤치고 다른 인영이 나타났다.
혈갈이었다.
“퉤, 새끼가 죽으려면 곱게 죽지 피를 튀기고 지랄이야.”
입 안에 피가 튀었는지 한가득 침을 모아 뱉은 혈갈이 투덜거렸다. 흥건히 피에 젖은 그의 양손이 번들거렸다.
“다섯 놈, 다섯 놈.”
작게 중얼거린 혈갈이 우두커니 서 있는 백랑을 향해 물었다.
“너는 안 죽이냐?”
“나는 참가한다는 말 따위 한 적 없다.”
“흥. 그 여자가 그렇게 걱정되냐?”
혈갈의 말에 백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백랑의 손이 도로 향했다.
“너를 죽이면 꼴찌는 면하겠군.”
“뭐라고!”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장내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하자 철연화가 황급히 둘 사이를 중재했다.
“두 분 다 그만 하세요.”
“흥.”
철연화의 제지에 콧방귀를 뀐 혈갈이 말했다.
“네놈도 언젠가 여자에게 크게 당할 날이 있을 거다.”
스르륵.
혈갈의 신형이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휴우.”
몸을 옥죄는 살기가 사라지자 철연화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예? 아니에요.”
철연화가 고개를 저었다.
“으아아아!”
이내 수풀을 가르고 한 무리의 무인이 장내에 들이닥쳤다.
혈무악과 조장들을 피해 도망친 것인지 그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공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내 한 무리의 무인이 백랑과 철연화를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무리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대머리 거한이 백랑과 철연화를 향해 도끼를 겨누며 외쳤다.
“사내놈을 죽이고 계집을 인질로 잡아라!”
백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모두 한꺼번에 달려들어서 사내놈을 죽여라!”
“우와아아!”
“죽여라!”
대머리 거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몇 명의 무인들이 병기를 꼬나 쥐고 백랑과 철연화를 향해 들이닥쳤다.
그들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흉흉한 살기가 두 사람을 집어삼키려는 순간, 백랑의 손이 움직이며 흐릿한 은광이 번뜩였다.
스―컥.
이질적인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을 향해 들이닥치던 살기가 주인과 함께 반으로 갈라졌다.
주륵.
“어?”
“흐윽.”
가장 선두에서 들이닥치던 두 무인의 목 위로 붉은 선이 둥그렇게 그어졌다.
스르륵.
퉁.
그들의 머리가 미끄럽게 흘러내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푸―화아악.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밤하늘을 적셨다.
치―링.
“다가오면 죽는다.”
맑은 도명이 일어나는 도를 늘어트린 백랑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이, 이놈이.”
무인들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무인들이 나타났던 수풀이 이내 들썩이며 또 한 명의 인영을 뱉어 냈다. 바로 혈무악이었다.
“이 새끼들이 도망을 가고 지랄들이야. 남자답게…… 응?”
날카로운 낭아도와 함께 장내에 나타난 혈무악이 장내의 광경에 고개를 갸웃했다.
“으아아악! 나타났다!”
“대막광마 혈무악이다!”
혈무악이 나타나자 무인들이 발작을 일으키며 소란을 피웠다.
“대막광마가 아니라 대막천마라니까!”
쩌렁쩌렁한 노호성을 터트린 혈무악이 힐긋 백랑과 철연화를 바라봤다.
“어떻게 된 거냐?”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아아.”
고개를 끄덕인 혈무악이 겁에 질려 주춤거리는 무인들을 향해 도를 겨눴다.
“뭐 해? 우리는 하던 거 계속 해야지.”
무인들의 얼굴 위로 절망이 떠올랐다.
* * *
“살려 주십시오.”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무인들이 병기를 떨어뜨리고 고개를 처박았다. 그들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혈무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럴 거면 애초에 건드리질 말았어야지.”
“저, 저희는 왕가 놈의 말만 믿고 온 겁니다.”
“예. 저희는 한탕 크게 하자는 왕가 놈의 말 때문에…….”
대머리 가득 흙먼지를 묻힌 거한이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만약 이렇게 강하신 분인 줄 알았다면 결코 공격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말은 만약 내가 약했다면 건드렸을 거라는 소리로 들리네?”
“예?”
무인들은 일이 틀어졌음을 눈치 챘다.
“그냥 덤볐더라면 팔 하나씩만 가져가려고 했는데, 그렇게 비굴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제, 제발.”
무인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가슴팍까지 도를 올리며 슬쩍 자세를 낮춘 혈무악이 기세를 일으켰다.
“어쩌겠어. 너희가 약한 걸 탓해야지.”
“빌어먹을!”
푸슛―!
욕설과 함께 대머리 거한의 소매에서 은빛 섬광이 번쩍였다.
그대로 허공을 가른 은빛 섬광이 혈무악의 미간을 노렸다.
“건방진!”
쩌―엉.
혈무악이 도를 흔들자 그를 노리던 은빛 섬광이 도면(刀面)에 튕겨 바닥에 박혔다. 암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거한이 바닥에 뉘어 둔 도끼를 주워 들고 외쳤다.
“모두 덮쳐라!”
파밧.
거한의 외침을 신호로 고개를 처박고 있던 무인들이 저마다 병기를 주워 들고 혈무악을 향해 몸을 날렸다.
“좋아, 진작에 이랬어야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은 혈무악이 무인들을 향해 마주 달렸다.
“백랑, 너는 나서지 마라!”
치리링.
주인의 기분이 전염된 것인지 광풍도가 기분 좋은 도명을 내질렀다.
쑤―아앙.
어느새 면전에 들이닥친 거한의 도끼가 허공을 찢어발기며 묵직한 파공음을 터트렸다. 그 뒤를 이어 두 자루 창이 거한의 양 옆구리에서 불쑥 나타나 혈무악의 요혈을 노렸다.
“흡.”
짧게 숨을 들이쉰 혈무악이 도와 함께 허리를 젖혔다. 절묘한 철판교의 수법이었다.
씨―잉.
반으로 접힌 혈무악의 몸을 스쳐 세 자루 병기가 애꿎은 허공을 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