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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전 1권(8화)
第三章 재회(4)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그 목소리는 잡음과 달리 확실히 내 귀에 꽂혀 들어왔다. 더불어 기이하게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뜨겁게 달궈지던 속이 가라앉았다. 서늘한 바람이 이마를 훔치고 지나갔다.
목소리의 주인은 류진룡. 그가 여전히 입에 풀잎을 문 채 한 폭의 그림처럼 나무둥치 아래 앉아 있다.
“왜 그러나 진룡?”
류진룡의 열렬한 신봉자인 제갈기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른 놈들도 류진룡의 처음 있는 반대에 의구심을 갖는 것 같았다.
“난 분명 말했다.”
그것으로 끝.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 류진룡은 고개를 돌림으로써 처음의 그 자세로 돌아갔다. 다른 녀석들이 몇 번이나 물었으나 류진룡은 무시로 일관했다.
비록 류진룡이 그렇게 말했으나 다른 녀석들마저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다. 류진룡의 저런 태도에 대한 불만을 풀 곳을 찾은 듯 나를 노려본다.
“아무튼 네놈은 마음에 들지 않아!”
행동대장인 하북팽가의 팽도현이 씩씩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녀석과 거리가 좁혀질수록 아까 식어졌던 그 뜨거움이 다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비켜.”
“뭐? 비켜어? 이 자식이 대낮부터 술을 쳐먹었…….”
팽도현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날아갔다. 류진룡의 옆으로 그의 거구가 처박혔다. 나는 뻗었던 발을 내렸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다른 녀석들이 믿겨지지 않는다는 표정과 눈으로 나와 날아간 팽도현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저 거지 자식이 조금 이상하다. 온몸이 붉어!”
당황하는 녀석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마에 열이 심하게 나는 듯 후끈거렸다. 그 느낌은 온몸을 파고 돌며 퍼져 나갔다. 내가 배운 백보신권의 오의는 하나의 심공과 그 심공을 뒷받침해 주는 심득이 전부였다.
심공은 호흡으로 인한 기운의 운용인데 사부는 자신이 가르쳐 준 심공의 이름을 알려 주려 하지 않았다. 구태여 집요하게 묻는 편이 아닌 난 그냥 편하게 오의심공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런데 그 심공이란 게 꽤 고약한 것이다.
그 오의심공을 펼치면 이런 상태에 처하게 된다. 지독한 열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머리가, 온몸이 뜨겁다. 그 열기 때문인지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확실한 건, 난 이 상태를 오래 지속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 미령아. 곧 편히 쉬게 해 줄게.
나는 미령이를 조심히 내려두고 녀석들을 노려보았다.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시야가 흔들렸다. 그 어지러움 속에서도 나는 녀석들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나는 녀석들의 괴롭힘을 참아 왔다. 견뎌 왔다. 인내하여 왔다. 미령이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 미령이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가느다랗게, 당장 끊어질 것처럼 미약한 숨을 내쉬고 있다.
“아니, 비키지 마라.”
정말 이상한 생각이지만 난 미령이가 이렇게 된 것을 저놈들 탓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물론 그릇된 생각이다. 미령이가 그렇게 된 것에 저 녀석들의 잘못은 조금도 없어. 그렇게 알고는 있지만 어딘가 배신당했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나는, 내가 그렇게 참고 견디면 되는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그것조차 우스운 것이었다.
내가 회주와의 약속을 지킨들.
소림에서 말썽 피우지 않고 쫓겨나지 않으려고 이유 없는 구타도 참아 낸들.
그러든 어쩌든. 미령이에게 다가온 불행은 비켜 가지 않아.
여태 내가 해 왔던 것들은, 미령이를 지키기 위해 했던 모든 일들은, 어쩌면 잘못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한 거라면 이런 결과가 발생할 리 없다.
그릇되었다. 글러먹었다. 지금껏 살아온 내 인생이 부정당했다고 여기니까, 더할 나위 없이 분했다.
이제 더 이상은 그렇게 살지 않을 생각이다.
결국 내게 소중한 것은 누구의 도움도 아닌, 내 손으로 지켜 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비킬 필요 없어.”
나는 주먹을 쥐고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는 시야 속으로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는 녀석들이 보였다.
나는 속삭이듯 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그렇게 말했다.
“내가 치워 버릴 거니까.”
뭐라고 소리치며 누군가 나에게 덤벼들었다. 누구인지는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저 주먹을 뻗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터져 나갔다. 어디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상했다. 기분이 좋았다. 내가 변태는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들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어쩌면 나는, 나 또한 어딘가 분을 풀 데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뱉었다. 헉헉 차오르는 숨을 간신히 누르자 차츰 사물이 제대로 인지되었다. 이상하다. 지독한 열병처럼 뜨겁던 머리가 식어 있었고, 봉사처럼 보이지 않던 눈도 보였다. 그리고 미친듯이 힘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뭔가, 될 대로 되라지 하고 해 버렸는데. 뭘 해 버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때문에 난 주변을 둘러보고는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뭐, 뭐야!”
엉망이었다. 뿌리 뽑힌 나무, 부숴진 바위, 움푹움푹 파여 있는 지면들. 태풍이라도 한차례 휘몰아치고 갔단 말인가.
그리고 다섯 명의 널브러진 젊은이들. 무림맹을 이끄는 주축인 여섯 세가 중 하나의 세가만 뺀 나머지 가문의 소가주들이다.
다들 쓰러져서 꿈틀거리며 낮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어딘가 위험하다는 신호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생각해 보자.
무림의 가장 큰 세력, 무림맹의 주축인 다섯 세가의 소가주들이 바닥에서 흐물흐물거리고 있다. 술이 잔뜩 취해 부리는 추태가 아니다. 저건 누군가에게 심하게 얻어터졌다는 증거다. 만일 이 사태를 그들의 가문에서 알아 버렸다면, 그 뒷감당은 실로 어마어마할 것임이 분명하다.
누구냐. 책임은 어디에 있나. 재고의 가치가 없는 궁리다.
“나……인가.”
단편적인 기억들이 듬성듬성 있지만 정황으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나밖에 없다. 아픈 미령이가 그랬을 리도 없고 같은 육대세가의 일원인 류진룡이 그랬을 리도 없다.
범인은 나다. 그로 인한 책임 추궁 역시 내가 받게 될 테다. 육대세가가 합치면 소림보다도 클지 몰라. 그 세력에 쫓기어 나와 미령이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
뭐, 알 게 뭐야.
나중 일은 나중 일이다.
한 사람과 10년이나 같이 지내다 보면 이런 식으로도 물들 수 있는 것이다. 다 사부 탓이야.
“그보다 미령이는?”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미령이를 찾아보았다.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다행이다. 미령이가 있는 곳은 멀쩡했다.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공간 속에 미령이는 조용히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미령이가 있는 곳만은 고요하고 깨끗했다. 흙먼지 하나 튀지 않았다. 나는 미령이에게 다가가 조심히 업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수호신승의 무공’인가?”
류진룡이었다.
그는 정말 이상한 놈이었다. 그들 육대세가는 나름 끈끈한 유대로 엮여 있을 테다. 하지만 내가 저 녀석들을 저 지경으로 만들 동안 류진룡은, 입에 풀잎을 물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니 녀석이 있는 자리 또한 멀쩡하다.
“너도 그 헛소리를 믿냐? 내 사부가 수호신승이라는 거?”
“좋을 대로 생각하게.”
녀석은 기분 나쁘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배운 건 그뿐인가?”
“그래.”
“그렇군.”
그리고 다시 풀잎을 잘근잘근 씹으며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본다. 적어도 친구라면 저기 쓰러진 녀석들을 돌봐야 하는 거 아니냐, 하는 말은 목구멍에만 맴돌다 사라졌다. 일단은 내 등뒤에 업혀 있는 미령이가 우선이다.
몸을 돌려 걸어가는 내게 류진룡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이란 말인가.”
“무슨 소리야?”
내 물음에 류진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엉망진창이 된 공터에 한적하게 앉아 멍청하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저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남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는 건 불합리하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마주하면 기분이 이상하게 좋지 않다.
“이젠 진심으로 부딪쳐 볼 생각인가 보군.”
“응. 그러니 방해할 생각은 하지 마.”
“수호신승의 제자에게 그럴 생각은 없다.”
류진룡의 말은 상당히 신경 쓰였지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등이 무겁다. 깃털 같은 미령이의 무게가 아니라 미령이를 업고 있는 내 마음의 무게였다.
나는 류진룡을 흘낏 바라본 뒤 곧바로 날듯이 달렸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자마자 미령이를 안전하게 내려놓은 나는, 어째서인지 정신을 잃은 것이다.



第四章 고서(古書)(1)


파란 하늘에 넓게 펼쳐진 들판은 붉게 물든 낙엽으로 가득했다.
허리까지 올라올 정도로 높게 솟은 풀들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누운 채였다. 그리고 내 옆에는 사랑스러운 나의 동생, 미령이가 내 팔에 머리를 올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거짓말쟁이. 백 밤만 자면 돌아온다며.”
미안해, 미령아. 하지만 보낸 편지로도 말했듯이, 이 오빠는 우리 미령이 곱고 예쁘게 자라라고 그랬던 거란다. 이제 이렇게 만났잖아.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내가 이렇다 해도?”
나를 바라보고, 나를 담고 있는 미령이의 눈동자가 낙엽처럼 붉게 물들어 간다.
갑자기 미령이의 머리가 얹어져 있는 팔이 너무나도 무겁다. 지탱하고 있던 팔이 부서질 것만 같다. 아니 부서진다. 물 속에 담그듯 미령이의 머리가 내 팔을 뭉개며 잠긴다. 고통에 몸부림치지만 미령이의 머리는 치워지지 않는다.
팔은, 빠지지 않았다.
산산이 조각나며 짓이겨진 팔 위로 미령이는 머리카락부터 피로 젖어들고 있다.
나는 그것이 짓이겨진 내 팔에서 흐르는 피인지 미령이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채로 소녀는 웃고 있다.
섬뜩하지만 아름다운 선홍의 핏빛으로.

***

“미령아!”
눈이 번쩍 뜨였다. 헐떡이는 숨을 뱉으며 둘러보니 다행이 내 방이었다.
꿈이구나. 다행이다. 으레 그렇듯 최악의 상황은 꿈에서만 펼쳐짐이 참으로 다행이다. 꿈이 어찌나 생생했는지 아직도 팔에서 고통이 느껴지고 있었다.
오른팔이 딱딱한 부목과 천으로 뒤덮여 있군.
“에에?”
내 팔은 왜 이런 것인가, 하는 마음에 얼간이 같은 음성을 내뱉으니 목소리가 들렸다.
“인사가 성의 없구나, 제자야.”
“사부였다.”
사부는 못마땅함을 얼굴 가득 표현하는 것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성의가 없다 못해 건방지기 짝이 없는 지칭이구나. 존경을 잔뜩 담아 똑바로 부르지 못할까.”
“사부. 미령이는요? 네? 미령이는 어떻게 된 거예요?”
“네 동생은 무사히 옆방에 누워 있고 네 팔은 아작이 났도다. 한 달은 걸릴 게야.”
“미령이가 한 달이나 누워 있어야 한다는 건가요?”
“네 팔이 한 달간 천 쪼가리로 뒤덮여 있을 거란 소리다. 네 동생은 원기만 회복되면 눈을 뜰 것이야.”
“다행이군요.”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내 팔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 미령이만 무사하다면 간이라도 빼 줄 수 있을 정도니까.
마음이 놓이니 다른 문제가 떠올랐다.
그런데 미령이에게 어떤 치료를 한 걸까, 사부는.
본인은 분명 아무런 치료도 하지 않았다 하였지만 믿을 수가 없다. 그때는 정말 당장 죽더라도 이상 없을 정도로 최악의 상태였으니까.
또 내 팔은 왜 이렇지?
난 부목이 덧대어져 천으로 칭칭 감긴 내 팔을 바라보았다. 제자를 사랑하는 사부의 마음이 느껴진다. 엉터리잖아. 대충 감은 티가 너무 난다. 성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다.
그때 이 엉성엉성한 치료 행위를 한 사부의 음성이 들렸다.
“그러게 다루지도 못할 힘은 왜 쓴 게냐. 함부로 사용할 만한 힘이 아니다, 백보신권의 오의는. 그 팔이 증거야. 힘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져 버렸지 않느냐.”
그제야 나는 그 오대세가 녀석들에게 백보신권을 펼친 것을 깨달았다. 그 당시에는 정신이 너무 없어서 몰랐는데, 너무 급한 마음에 얼마 전에 배웠던 오의를 실었던 것 같았다.
그 대가로 내 팔은 부서졌다. 정신도 잃었다. 만약 집에 도착하기 전에 쓰러졌다면, 이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오싹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인 것이다.
나는 성의 없이 엉성엉성 천으로 감긴 내 팔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허탈해졌다.
이대로 미령이를 지켜 낼 수 있는 걸까,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