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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전 1권(9화)
第四章 고서(古書)(2)


“재밌는 사제지간이로군! 허허!”
난 오른손으로 눈을 비비려다 부목에 이마를 얻어맞고는 왼손으로 이마와 눈을 동시에 문질렀다.
분명 여기는 내 방 안이었다. 얼마 전 제자를 가르치겠다는 갸륵한 마음으로 행한 사부의 거침없는 주먹질에 봉변을 당할 뻔했던 기적의 초가집.
마루가 있고 방이 두 개. 창호문은 몇 번이나 덧댄자국이 역력히 남아 있고 창문틀에는 노리개가 올려져 있는.
확실한 내방인데.
모르는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다. 대머리, 승의 자락을 터트릴 듯 근육으로 뒤덮였음이 분명한 육중한 몸매, 노안, 아니 늙은 얼굴은 분명 노인이었다.
몸매와 맞지 않잖아. 나이를 얼굴로 먹은 건가.
아무튼 생긴 것만으로도 위엄과 위압을 절로 갖춘이 어른이 누구인지 몰라 사부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맞춰 봐라.”
“……몇 개월짜리 문제입니까.”
사부는 배를 잡고 껄껄 웃었다.
“사형, 봤지? 이 소림사에서 소림사 방장을 못 알아보는 놈도 분명 내 있다고 했지? 그게 바로 이놈이야!”
이제 매화주 내놔, 라고 말하는 것 보니 술을 걸고 내기를 했나 보다. 잠깐, 방장 스님이라고?
“……열심히 수행을 쌓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사제는 너무 자신의 제자를 나무라지 말게.”
사부는 날 나무라지 않았다. 날 나무라고 싶은 건 이분일 테다.
난 다급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제, 제자 일원이, 방장 스님을 뵙습니다!”

***

거의 천 년에 가까운 전통을 자랑하는 당대 소림사의 방장 스님. 허태 대사는 근엄한 풍채에 인자한 흰 수염을 기르고 계셨다. 무엇보다 높은 자리에 계신 분이기 때문에 뵐 기회가 별로 없었다. 아마도 소림에 온 날 딱 한 번 뵈었으리라.
아무리 사부와 사형제 지간이더라도, 직접 찾아온 적도 없어서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긴장감 가득한 마음으로 방장 스님을 살펴보았다.
얼굴 가득 피어오르는 평온한 미소를 보니 성격이 좋을 것임이 틀림없다.
무엇보다, 그랬으면 좋겠다.
“한 문파의, 그것도 대문파의 존장을, 한낱 제자가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한 문책을 너무 심하게 하면 아니 되네, 사제. 알겠는가? 절대로 문책을 심하게 하면 아니되. 그렇다고 하지 말란 얘기도 아니네. 그냥 넘어가서도 안 될 문제일 게야.”
근엄한 소림사의 방장 스님은 평온하게 문책을 속삭이고 계셨다.
“내 생각도 그래, 사형. 이놈이 요새 술상도 부실한 것이, 사부를 얕잡아 보는 것임이 틀림없어. 내 이놈을 어떻게든 손봐 주겠으니, 매화주 한 병 더.”
“시끄럽다. 너도 소림의 제자라면 술은 좀 줄여야 하지 않겠느냐?”
끊으란 소리는 안 한다. 일말의 포기가 느껴지는 그 말에 사부는 그래도 되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더욱 당당해졌다.
“그러는 사형도 매화주를 소지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동기가 불순해. 내가 수거하지 않았다면 대소림사의 방장께서 술을 마시는 우를 범할 거잖아?”
“그건 너를 만나게 되면 어떻게든 떼일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지. 그리고 사실은 마셔도 돼.”
“소림사 방장이 술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집법당의 허백, 그 녀석이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입 닫을 테니 한 병 더 주시지, 사형.”
“사제. 못 본 사이 소림사 방장도 협박할 수 있게 되었구나. 혹시 파문당하고 싶으냐? 난 그래 줄 수 있다.”
“그냥은 못 나가. 궁금하면 어디 한 번 해 보시든가.”
기똥차게 박진감 넘치는 두 사형제의 상봉이 막 나가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방에 누워 있다는 미령이를 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요놈아, 어디서 함부로 궁둥이를 떼. 지금 한창 네 여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느냐.”
언제? 내 귀가 썩어 버렸거나 사부의 입이 어떻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존장의 말을 무시하는 행위는 중범죄이니라. 사질은 죄를 더 쌓지 말고 이리와 앉거라. 문책을 당하더라도 하던 이야기는 마저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더불어 죄가 늘었다. 이 무슨 억울하기 짝이 없는 사태란 말인가.
생각해 보니 소림에서는 늘상 억울한 일투성이였던 것 같다. 속가제자들의 괴롭힘도 말할 수 없고, 사부는 소림의 수치라는 취중망승이고, 내 전부인 미령이는 죽을 뻔했다.
그래서인지 감정이 조금 격해져 버렸다.
“미령이는 옆방에 누워 있어요. 아시겠어요? 제가 소림에 얽매여 있을 이유는 없다고요. 파문이든 뭐든 까짓것 해 보세요.”
사부와 방장 스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음, 볼 만하군. 이제 곧 난 파문을 당할 것이라 생각하니 급격히 후회되었다.
미령이 상태도 저러한데 파문을 당한다면 당장 갈 데도 없잖은가.
그래서 나는, 사부는, 방장 스님은, 말했다.
“제자야, 어딜 가려고 하느냐. 다시 생각할 것도 없이 취소해 주마.”
“사질, 이 사백의 농이었네.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야.”
“죄송합니다! 제가 순간 이성을 잃고…….”
그리고 세 사람은 망연해졌다. 조금 멍청해졌다는 쪽이 맞겠다.
가장 빨리 정신을 차린 것은 사부였다.
사부는 금세 능숙하게 거만해졌다.
“어허, 아침부터 그렇게 무릎이 쑤실 수가 없어. 저리고 결리는구나. 제자야, 아니지. 이제 파문당할지도 모르니 남이로구나. 내 제자가 아닌 녀석아, 나는 다리가 쑤시는구나. 그보다 관절엔 고기가 제격인데.”
“삽시간에 대령하겠습…… 잠깐.”
멋대로 사제의 연을 끊어 버린 사부의 말에 나는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어딘가 이상하기 짝이 없다. 분명 나는 막 나갔는데, 막 나간 것 치고 두 사람이 하는 말이 일관성 있게 날 붙잡고 있던 것이다.
사부를 보았다. 어서 고기를 대령하라는 듯 뻔뻔한 얼굴이었다.
방장 스님을 보았다. 창틀에 올려 둔 노리개를 보고 계신다.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볼까 보냐. 둘 다 각자의 방식으로 외면하고 있다는 것쯤은 쉬이 알 수 있었다.
“이제 말씀 해 주시죠.”
갑갑했었다는 듯 방장 스님이 탄식을 내뱉었다.
“사질도 알 때가 되었지. 무엇보다 당사자니까.”
모종의 사건에 대한 당사자가 된 나는 어떤 사건일까 궁리해 보았으나 모르겠다.
하필이면 정기적인 중원상회의 소림 방문에 미령이가 끼어 있었을 뿐이고, 하필이면 습격을 당한 것이며, 하필이면 미령이의 품속에 달마역근경이라는 책이 있었을 뿐이다.
“설마 그 책 때문인가요?”
사부는 역시 내 제자는 똑똑하다는 허튼소리도 내뱉지 않았다. 다만 한숨을 길게 토하는 것이었다.
“그건 고서(古書)라고 한다.”

***

세상의 다양하고 수없이 많은 책을 분류하는 공통된 기준이 있다.
새 책과 헌책. 그중 아주아주 오랜 세월을 맞이해 낡은 책을 ‘고서(古書)’라고 부른다는 걸 떠올렸다.
“그런 단순한 분류가 아니야. 그 고서는.”
“제목만으로도 단순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그 책, 달마역근경이었죠?”
“그분께서 직접 저술하신 거지. 네 녀석도 소림의 제자라면 사문의 선조쯤은 알고 있을 게다.”
달마 대사라면 소림사라는 이 몹시도 커다란 절간을 세우신 분이다. 소림사의 온갖 무공들과 경전이 모두 그분에게서 나왔으니, 소림사에서는 거의 신에 가까운 존재인 것이다.
“이제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겠느냐?”
자부심 가득한 그 말을 들으니 새삼 사부도 소림의 제자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소림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방장 스님은 날 꼬박꼬박 ‘사질’이라 불러 주었다.
내 사부를 사제로 인정하여 대한다는 뜻이고, 그 말은 소림은 사부를 내치지 않았다는 거겠지. 대체 이 취중망승이 뭐에 쓸모가 있어 그렇게까지 친절할까, 하는 고민은 나중으로 미뤄 두기로 했다.
“하지만 왜 소림의 책 때문에 우리 미령이가,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는 건지 이해가 안 가요. 소림의 경전을 욕심 낼 필요가 없을 텐데.”
사부는 당연한 듯이 말했다.
“욕심 낼 만하지. 고서니까.”
“혹시 절세의 무공서?”
“무공서든 일기든 중요치 않아. 그건 고서거든.”
어딘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조금 더 노력하시면 제자를 답답해서 죽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사부는 과연 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날도 머지않았다며 즐거워했기에 무시해 주었다.
나는 고민했다. 대체 사부가 말한 고서의 의미는 뭘까.
“사질. 자네 사부는 말하는 법을 잘 몰라. 내가 알려 주겠네.”
해답을 알려 주겠노라며, 방장 스님은 은밀하게 진실을 속삭여 주셨다.
“살아 있는 것이라네. 고서는.”
살아 있다. 과연, 그런 것이었군. 난 탄식했다.
“아아. 밥도 먹나요?”
내 물음에 방장 스님의 존안은 참으로 볼 만하게 붉어지셨다. 그리고 사부는 ‘제자가 날 웃겨 죽이려 든다’며 배를 잡고 바닥을 뒹구는 것으로 지엄한 방장 스님의 죽장에 허리를 가격당했다.
내 실언으로 말미암아 사부에게 폐를 끼친 건 기쁜 일이나, 사문의 어른께 예의가 아니란 생각에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너무 갑작스레 들어서…….”
“되었네. 자네 사부와 지내다 보면 그리됨은 당연할 터. 아무튼 내 말을 잘 들었는가. 살아 있는 것을 말하네, 고서란.”
방장 스님은 다시금 힘 있게 말을 이었다.
“사질이 꺼내 달라는 말을 들었다 했는가. 바로 그것이네. 말을 할 수 있어, 지성이란 게 존재하지. 사고가 가능하고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면 능히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게야.”
공부가 짧은 나는 살아 있음에도 살아 있다는 선을 어디까지 그어야 할지 몰라 그 점은 넘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조금 알 수 없어짐은 어쩔 수가 없다.
“저어, 그럼 방장 스님.”
방장 스님은 평온한 얼굴로 사백이라 부를 것을 명했기에 알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사백님. 저를 부른 것은 그러니까, 미령이가 아니라 그 ‘고서’란 말씀이시지요?”
하얗게 내려온 수염을 쓰다듬으며 방장 스님은 아련한 얼굴이 되었다.
“신기한 일이지. 사물에 혼이 깃들 수 있다는 건 말이야. 이해를 돕자면 흔히 마검이라거나 마경이라거나 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네. 물론 그것들의 유무도 사실이네. 그 예로 사질은 자신을 부르는 음성을 들었을 테지.”
주인의 혼을 갉아 먹는다는 마검에 대한 전설은 나도 한 번쯤 들어 본 적이 있는 얘기였다. 그때에는 마검의 존재에 대해 두려워하였으나, 거짓이라 여겼었는데, 지금 소림사의 지고 지엄하신 방장 스님이 진실이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사부가 하는 말과는 달리 무게감이 있다. 단번에 진짜였군요, 하고 믿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궁금했다.
“그런데 그 고서란 게 대체 얼마나 좋기에 욕심을 내는 건가요? 들으니 그냥 말하고 생각하는 정도인 듯한데.”
물어봐 놓고도 조금 조악하다 생각되지만, 알고 싶었다.
방장 스님은 무거운 얼굴로 끄덕이셨다. 이제 기울어졌는지 연한 태양볕이 들어오는 창가를 바라보는 방장 스님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 들고 있었다.
“사십 년 전, 혈검의 난이 있었다네. 삼백오십 년 전 장인이 만든 검인데, 그 검이 자아가 깨어나 마검이 된 경우지. 그때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아마 사질은 상상도 못할 걸세. 그 당시 그 마검은 고작 삼백년 만에 깨어난 고서야. 그리고 달마역근경은 소림의 역사와 같은 기간을 지냈다네.”
문득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검인데, ‘고서’라고요?”
“그렇지. 헷갈리겠구나.”
그러면서 방장 스님은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대충 이러했다.

최초로 발견된 영기가 어린 물건은 죽간이었다. 즉, 종이가 나오기 전 세대에 사용 되던 책이었다고 한다. 그 죽간은 상당히 오래된 고서였는데, 그 뒤부터 영기가 어려 혼이 깨어난 물건을 흔히 ‘고서 같다.’라고 부르다가 그런 상태의 물건을 편의상 ‘고서’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