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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전 1권(10화)
第四章 고서(古書)(3)
“……그리하여 그렇게 칭한다네. 그 상태의 물건을 지칭하는 대명사라 생각하면 편할 게야.”
방장 스님은 더 긴 말은 하지 않았으나 나를 깨닫게 해 주기엔 충분했다.
삼백오십 년 된 검이 그 정도라면 거의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지낸 달마역근경은 어쩌면 무림 역사를 뒤흔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검과 책은 분명 다른 성능이 있는 것이다. 책은 읽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검은 말 그대로 살상 무기가 아닌가. 이 애매한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알게 되었으나 지금 중요한 것은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자.
내게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고 생각했는지 방장 스님이 다시 본론을 얘기했다.
“사질에게 말을 건 것은 분명 그 고서야. 한 번 보겠는가?”
방장 스님이 품에서 책자를 꺼냈다. 달마역근경이라고 훌륭한 서체로 쓰여 있는 겉면은 확실히 낡았다. 색이 바랬고, 주름 같은 흰 금이 거미줄처럼 나 있었으며, 가장자리는 조금 뜯겨져 속내를 비추고 있다.
책을 두 손으로 떠받치듯 들고 있는 방장 스님은 마치 신물을 대하듯 신중하고 공손한 자세였기에,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고서를 내려다보며 방장 스님은 작게 읊조렸다.
“무릇 ‘고서’란 주인을 선택하게 마련이지. 사질은 음성을 들었다 하였지? 어쩌면 그것으로 사질이 선택받았는지도 몰라.”
그 중얼거림은 어쩐지 힘 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옆에서 사부는 그럴 리 없다며 퉁명스레 부정했다. 나 또한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기에 방장 스님의 태도는 너무도 진지한 것이었다.
나는 이제야 내가 ‘당사자’가 된 사건에 대해 깨달았다. 이 고서는 나에게 말을 했다. 그것을 방장 스님은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계신다. 그렇게 난 모종의 사건에 대해 알아챘으나 영문을 모르겠는 건 매한가지였다.
문득 가만히 책을 내려다보던 방장 스님이 말했다.
“사질. 혹시 글은 읽을 줄 아는가?”
“네.”
다행히 사부의 잔심부름을 하기 위해선 글도 조금 읽을 줄 알아야 했다. 사부는 단 한 번도 숭산을 내려가지 않았고, 상행이 소림에 들렀을 때에도 외부인과 접촉하는 것을 까닭 모르게 꺼렸으므로 심부름은 내 차지였다.
사실 심부름과 글 공부와는 하등 관계가 없으나 사부의 끈질긴 고집으로 배우게 되었다.
방장 스님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책을 들었다.
“다행이로군. 나는 이 책을 읽을 수 없네. 선택받지 않았다는 뜻이야.”
“그럼 사부는요?”
“사질의 사부는 어떤 고서라도, 사용할 수 없어. 그는 이미…… 아무튼 사질의 사부는 아니네. 나도 아니고.”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나 하나라는 식으로 방장 스님은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추측에 못을 박듯이 덧붙였다.
“게다가 고서의 ‘음성’도 들었으니. 틀림없을 게야.”
침이 꼴깍 넘어간다. 어떤 내용의 책인지는 모르겠지만, 범상치 않음을 넘어서 특별한 책이란 점은 알겠다. 그런 책의 선택을 내가 받았을지도 모른다, 꿈같은 소리였지만 방장 스님의 말은 설득력이 강했다.
한없이 긴장하고 있는 내게 방장 스님은 책을 건네주었다.
“읽어 보게.”
긴장하고 있는 것은 방장 스님도 마찬가지였던 듯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사문의 존장 앞에서 예의 없는 자세로 널브러져 있는 사부도 이때만큼은 집중하고 있었다. 세 평 남짓한 내 방은 긴장과 진지함으로 공기가 무거웠다.
심호흡을 한 차례 하고서 나는 조심스레 낡은 겉면을 열었다.
어서 읽어 보라는 방장 스님의 재촉에 눈에 힘을 주고 뚫어져라 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엄청난 충격에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쓰여 있는가?”
방장 스님이 재촉하여 물었으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책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나는 마당의 평상에 누워 붉게 물들어 가는 노을을 구경했다. 노을을 보자니 기절했을 때 꿨던 꿈이 떠올라 작게 몸을 떨었다. 흉측한 꿈을 잊고자 조금 전에 있었던, 내가 당사자인지 착각한 사건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낡은 책자, 고서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안에는 먹 한 방울 묻지 않은 누룩누룩한 종이만이 있었다. 다음 장에도 그 다음 장에도, 종이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말하자 사부는 좋아라 하며 산보나 다녀오겠다며 뛰쳐나갔고, 방장 스님은 나에게 미안해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떠나갔다. 어쩐지 놀림을 당했다거나 배신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럼, 대체 누가 선택된 거지?”
의문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그리고 그 의문에 대해서 사부나 방장 스님은 아무 걱정도 생각도 없는 듯 행동했다. 그렇기에 할 짓 없는 내가 추측해 보기로 했다.
고서의 음성을 듣지 못한 방장 스님은 책을 읽을 수 없었다. 고서의 음성을 들은 나도 읽지 못했다. 사부는 읽지 않았다. 그것도 의문이지만 원체 의문투성이인 사내니까 넘어가도록 하자.
그렇다면 누가 읽을 수 있는 걸까. 혹시 원래부터 아무런 글도 안 쓰여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누구도 선택되지 않았다든가. 그런데 그 선택이란 건 과연 어떤 걸 의미하는 걸까.
“아아, 머리야.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한담.”
바보 같아서 그만뒀다.
고개를 돌렸다. 내 방문 옆에 사부의 방문이 보였다. 미령이가 잠들어 있는 방이다. 당장 확인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방문에는 나를 퇴치하는 문구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원 절대 금지 구역.
사부가 한 짓이다.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그저 옆에서 보는 것도 못하게 했다. 내가 무어라고 항의하자 “제 동생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놈은 못 믿겠다.”라며 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허나 괘씸치 않다면 거짓이다. 하여 나는 불편한 손으로 글귀를 추가했다.
사부 영구 금지 구역.
음. 훌륭하군. 사부가 사부의 방에 영원히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자 즐거워졌다. 물론 그 철면무적 사부는 알 게 뭐냐며 출입할 것이다.
나는 가만히 문앞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새근새근, 작지만 미령이의 숨소리가 들렸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미령이는 이 문 너머에 있다. 뿌듯한 마음으로,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리려는데 불현듯 떠올랐다.
“내 힘이 아니로다. 이 아이는 치유되고 있었어.”
“무릇 ‘고서’란 주인을 선택하게 마련이지. 사질은 음성을 들었다 하였지? 어쩌면 그것으로 사질이 선택받았는지도 몰라.”
사부와 방장 스님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번뜩였다. 그리고 난 깜짝 놀랐다. 그것은 지금껏 ‘누가 고서의 선택을 받았는가.’ 라는 의문에 대해 큰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다.
미령이는 사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치유되고 있었다.
또한 방장 스님은 음성만 들어도 선택받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혹여, 만약. 고서로 인해 치유까지 되었다면?
나는 미령이가 잠들어 있는 사부의 방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설마 미령이가……?”
갑자기 숨이 막혀 왔다.
***
나는 마당의 평상에 앉아 차분해지려고 노력했으나 헛수고였다. 머릿속에는 온갖 잡념들이 나의 자제력을 벗어나 이리저리 들쑤시고 있었다.
미령이가 치유되었다. 사부의 힘은 아니다. 고서의 음성을 들은 것으로 선택되었다고 생각할 정도다. 그럼 누가 미령이를 치유한 거지? 미령이가 고서에게 선택당했다? 소림의 고서라면 나쁜 책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미령이가 중이 될지도 몰라!
“으아아 미치겠네!”
머리 깍고 ‘나무아미타불’이라며 불호를 외는 미령이의 모습이 상상되자 머리가 돌고, 사부가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사부가 돌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건 대체 뭡니까?”
시원하게 공중제비를 뛰어 마당에 안착한 사부는 몸을 일으키고 먼 산을 바라보는 것으로 잔뜩 무게를 잡고는 말했다.
“고독한 귀가.”
어딜 봐서. 나는 사부와 말씨름할 기력이 되지 않아 그냥 평상에 주저앉았다. 사부는 평상시대로 평상에 드러누워 술을 마셨다.
나는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쓰며 하늘만 바라보았다. 노을이 번져 가고 새들이 줄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어디 갔다 온 건지 안 물어보느냐?”
제자는 사부에 대한 관심이 없다며 투덜거리는 말에 괜시리 미안해졌다. 생각해 보니 내가 그렇게 쓰러져 있는 사이 사부는 미령이를 돌봤을 터였다. 그 점이 고맙고, 또 미안했다.
하여 나는 제법 정중하게 읍을 해 보였다.
“미거한 제자의 실수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어디를 행차 하시고 돌아오시는 길입니까.”
“병문안.”
나는 그 상상을 초월하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언제부터 친절해 지기로 결심했어요?”
“……보통은 누구 병문안 간 거냐고 묻는 거다, 망할 제자 놈아.”
물론 맞는 말이기에 물어봐 주었다.
“누가 다쳤는데요?”
“그 다섯 속가제자 놈. 아주 떡이 되었더구나. 몸 이곳저곳이 성한 곳이 없어. 걷지도 못할 정도더라. 솔직히 말해 봐라, 미령이가 급한 건 변명이고 사적인 감정이 분명 들어갔으렷다?”
“없으면 이상하죠.”
“하기야 그렇지.”
사부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 입장도 난처해졌을 테니 조금은 날 혼낼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사부는 날 걱정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사실 솔직하게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 모르겠다. 그때에는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고 그 녀석들 탓이라고 여겨 그랬지만.
정말로 내 주먹에 나가떨어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녀석들 전도유망한 무림명가의 차기 가주들이 아니던가.
나는 엉성엉성 감긴 내 팔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희망이란 것이 피어났다.
사부는 품에서 육포를 꺼내 씹으며 말했다.
“가문에 고자질하겠다는 걸 간신히 말리고 허백, 그놈한테도 사정을 말해 주었지. 힘든 일이었어.”
나는 사부의 성격상 어떻게 그들을 말리고 집법당주님을 설득했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불안했다.
“어떤 방법을 쓰셨는지 여쭤도 되겠는지요.”
사부는 뭐 그런 것쯤이야 하며 간단히 말한 것이었다.
“고놈들은 고자질 못하도록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패 주었고, 허백에게는 내 제자가 몹시도 강해졌다고 자랑했지.”
“…….”
제자가 친 사고를 더욱 크게 부풀리셨다. 참으로 사부다운 설득이라 할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한데 수습이 매우 복잡해질 것 같다는 불안함에 몸이 축 늘어졌다.
“더 이상 그놈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되었으니 잘된 일 아니냐.”
어차피 더는 당해 줄 생각도 없고 그 녀석들 몸 상태로는 당분간 시도도 못할 것이다.
아무튼 미령이는 이제 이곳에 있으니까. 나는 출입을 금하는 두 개의 구절이 쓰인 사부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미령이가 잠들어 있다. 원기가 회복되고 있는 희망적인 소식이었으나 고서의 존재에 대해 들은 지금은 그다지 희망적일 수가 없었다.
나는 아까부터 하던 고민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부. 솔직히 말해 줘요. 혹시 그 고서가…… 미령이를 선택한 것 아닐까요? 치유가 된 것도 이상하고.”
사부는 잠시 뜸을 들였다. 마치 일전에 자신의 ‘위치’를 이야기할 때와 같은, 사부답지 않은 머뭇거림이었다.
“아이가 깨어나면, 알게 될 것이야.”
말을 마치며 사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사부가 이토록 진지하게 고민하는 얼굴을 본 적이 별로 없었기에, 마음이 불안했다.
그 뒤의 일들은 사부의 말대로 되었다. 내 팔은 한 달이 흐르자 완치되었고, 더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붕대를 푼 날.
미령이가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