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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마도 1권 (3화)
“맛있군.”
간만에 먹는 제대로 된 음식에 포만감을 느끼며 음식과 함께 두고 간 물건을 보았다.
구양운이 씻을 수 있게 준비된 것들과 무복 하나가 놓여 있었다.
두 손으로 흑의 무복을 무심코 들어 올린 구양운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그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의 시작은 마교.
그 첫 번째 기억은 흑의무복이었다.
“이제부터 너희는 암영대(暗影隊)다!”
아직도 처음 마교에 입교했을 때 들었던 그 말이 귓가에 생생했다.
암영대(暗影隊)!
마교의 수뇌부 층밖에 몰랐을 이 부대는 오로지 구유수라마검을 되찾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무공 수련과 더불어 잠입에 능통한 은신과 독, 진법을 포함한 모든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주로 교내의 살수 집단으로도 행동했다.
구양운은 무심코 무복의 왼쪽 어깨 부분을 가만히 쓰다듬어 보았다.
십 년 만에 손에 들린 무복이다.
무복을 만지는 구양운의 가슴은 저릿했다.
지금 구양운의 손 안에는 아무것도 수놓아지지 않은 흑의무복이 들려 있었지만, 과거를 회상하는 구양운의 눈 속엔 암영대를 상징하는 영(影)자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태어날 때부터 고아였는지 그것은 잘 모른다.
하지만 한 번도 외롭다고 느끼거나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암영대라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가에 가득 머문 비틀린 감정까지 구양운은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며 지독한 외로움을 느껴야 했다.
잃어 버린 자긍심.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전멸!
그것은 암영대의 전멸이었다.
암영대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구양운은 손 안에 들린 흑색 무복을 세게 쥐었다.
빳빳했던 무복이 구겨지는 것을 알고는 있는지 굳세게 쥔 주먹을 풀지 않았다.
구유수라마검을 회수하기 위해 천마총으로 들어간 그날 암영대는 모두 전멸했다.
아니, 정확힌 한 명을 제외하곤.
“크크, 크크큭!”
구양운은 허리를 굽히며 갑자기 크게 웃어 제쳤다.
대체 무엇을 위해 싸워 왔고,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마교에 대한 믿음과 암영대라는 자부심은 바로 그날 모두 사라져 버렸다.
천마총에 귀신이 된 대원들은 알고 있었을까?
초대의 마교 교주가 남긴 구유수라마검은 일개 대원 따위가 알고 있어서는 안 될 비밀이었다는 걸.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고 돌아온 마교에선 천마총의 비밀만 파헤치고 자신을 없애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죽어 줄 수는 없었다.
천마총에 대한 것을 모두 말한다면 자신이 죽을 것을 구양운은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했기에 구양운은 천마총에 대해 일절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죽이기엔 아쉽고 살려두기엔 꺼림칙하게 되어 버린 구양운은 평생 무저갱에 갇히는 형벌을 받았다.
구양운은 넝마가 되어 버린 옷을 벗어 버리고 흑의무복을 걸쳤다. 그리곤 산발이었던 머리를 대충 정리하니 가려졌던 그의 얼굴의 윤곽이 보였다.
오뚝한 콧날에 한일(一)자로 다물고 있는 입술은 방금 전의 모습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준수했다.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않아서인지 종잇장처럼 흰 그의 얼굴이 서생처럼 유약해 보이기도 했으나 얼굴 전체에서 남자다움이 물씬 풍겼다.
‘나는 기필코 살아남을 것이다. 마교 암영대의 구양운이 아니라 나 구양운 한 사람으로써 살 것이다.’
구양운은 다시 자리를 잡고 정좌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내공을 찾기 위해서였다.
다시는 십 년 전처럼 멍청하게 이용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렵게 다시 찾은 자유를 구양운은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가로막는다면 그것이 설령 태산이든, 마교든……’
구양운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모두 벨 것이다.’
二.이제부터 시작이다
칠 일은 빛처럼 지나갔다.
구양운은 마지막 남은 천마보심환을 입에 넣었다.
구양운의 일과는 너무도 간단했다. 식사가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천마보심환을 복용한 후 모든 시간을 석상처럼 앉아서 내공 회복에 힘을 쏟았다.
이제는 제법 단전에서 묵직한 기운이 느껴졌다.
구양운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는 듯 천마보심환의 효능을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서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 때였다.
구양운의 감은 눈이 슬며시 뜨였다.
‘이제 내공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검술이 녹슬지 않았는지 시험해 볼까?’
그는 생각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배운 것이 검법이었기에 검이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팔등을 검이라고 생각하고 펼친다면 크게 문제되진 않았다.
구양운의 손에서 서서히 묵성환영검(墨星幻影劍)이 펼쳐졌다.
이 검법은 환검(幻劍)으로 검을 빠르게 변환시켜 상대의 눈을 어지럽히는 수법이었다.
번쩍 하는 순간 구양운의 손이 순식간에 앞으로 나가 단숨에 여덟 번이나 방향을 바꾸어 허공을 교차로 찔렀다.
마치 손이 여럿 인 듯 환영이 보였다.
무질서하게 보였으나 그것은 모두 치밀하게 계산된 검로(劍路)였다.
보통 마교의 무공은 직선적이고 패도적인 것에 비해 이 묵성환영검은 무척이나 화려해 보이는 환검의 일종이었다.
그렇기에 이 묵성환영검은 펼치기 어려운 검법이었다.
환검이란 게 내공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변환을 제대로 시전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기 때문이다.
여러 개의 환영이 보일 정도로 빠르게 놀리던 손이 허공에서 거짓말처럼 딱 멈추었다.
무저갱에 들어오기 전에는 하루도 손에서 검을 놓아 본 적이 없는 구양운이었다.
무저갱 안에서도 수천 번의 전투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많은 이치를 깨달았지만……
그것이 동작에 녹아들기엔 아직 부족함이 있었다.
‘조급해하지 말자.’
구양운이 스스로를 다독거리고 있을 때,
철커덩.
굳게 닫힌 철문이 다시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타난 건 횃불을 한 손에 들고 있는 육대방, 그였다.
“허!”
육대방은 말끔해진 구양운의 얼굴을 보고 짧게 감탄사를 흘렸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구양운의 수려한 얼굴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더 놀라웠던 것은 그가 생각보다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다.
“흠흠.”
육대방은 짧게나마 구양운을 보고 놀랐던 자신을 감추고 싶은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구양운의 두 눈은 육대방 뒤에 서 있는 사내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 사내는 처음에 구양운이 입고 있었던 것처럼 닳고 닳은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산발이라 얼굴의 윤곽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자는 누구요?”
구양운의 질문에 육대방이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알면서 뭘 묻나? 너를 대신할 십육 호다.”
구양운의 미간이 좁혀졌다.
‘설마 했지만…… 역시 그렇군.’
구양운이 별다른 말이 없자 육대방은 뒤에 사내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이제 들어가거라.”
사내는 부복하며 외쳤다.
“충(忠)!”
그리고 그는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로 구양운이 있었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슴팍에 꽂혀져 있는 쇠갈고리까지……
그의 모습은 정말 구양운이 갇혀 있을 때와 똑같았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 사내는 구양운으로서 이곳 무저갱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구양운의 그 사내를 지나쳐 나가려는 찰나,
작은 불빛으로 언뜻 보인 그의 턱은 심한 화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혹시라도 구양운의 얼굴을 알아볼 누군가를 위해 얼굴까지 망가트린 것이다.
“큭큭, 마교는 역시 대단해.”
구양운의 입가엔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구양운이 완전히 바깥으로 몸을 빼자 그 사내는 지금까지의 구양운처럼 방 중앙에 앉았다.
어쩌면 그는 구양운의 행동 방식이나 습관마저 줄줄이 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교주의 눈을 피하기란 그만큼 어려운 것이었다.
육대방은 두꺼운 철문을 다시 닫았다.
쿠우웅!
철커덩.
철문을 원래대로 잠그곤 그는 무저갱 바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구양운은 그의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육대방은 부지런히 걸으며 소매 속에서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내 구양운에게 건넸다.
구양운 또한 말없이 그 주머니를 품 안에 갈무리했다.
육대방이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안에 있는 내용은 지금부터 완벽히 외워야 할 것이다. 또한 마교의 출입이 가능한 신분패와 천마총까지 가는 지도가 들어가 있다.”
구양운은 대꾸 없이 듣고 있었다.
육대방은 그런 구양운을 힐끔 쳐다보곤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턴 무저갱 외부를 지키는 문지기도, 순찰하는 무인들도 반 식경 안에는 아무도 없다.”
마교 이공자인 사공악은 구양운을 빼냈다는 것을 걸리지 않기 위해 만발의 준비를 갖춘 듯했다. 그리고 사공악에게는 그러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 힘이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무저갱의 계단을 모두 지나자 드디어 은은하게 비추는 달빛이 보였다.
하지만 구양운에게 그 달빛은 눈이 멀 정도로 시렸다.
구양운은 떨리는 걸음걸이로 천천히 바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갔다. 그리고 이내 무저갱의 입구를 벗어나 바깥으로 첫 걸음을 내딛는 순간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십 년 만에 보는 하늘이었다.
구양운이 감동에 젖어 하늘을 올려다 볼 때였다.
육대방이 짧게 명령을 내렸다.
“이젠 교내에 만들어 준 신분으로 위장해서 그들과 합류한다. 그리고 다음 명령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라.”
저벅 저벅.
육대방은 그렇게 마지막 전달 사항을 전하고 어딘가로 총총히 사라져 갔다.
구양운도 더 이상 육대방의 뒤를 쫓지 않았다.
다만 그는 그 자리에 멈춰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무심코 손바닥을 폈다.
달빛이 손을 비추어 주었다.
“……따뜻하군.”
구양운이 조용하게 읊조렸다.
스스로도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구양운은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곤 육대방이 전해 준 대로 품속에 갈무리했던 비단 주머니를 열었다.
비단 주머니 속엔 육대방이 미리 말한 것처럼 세 가지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구양운은 천마총으로 가는 지도와 마교의 신분패는 다시 갈무리하고 무언가 빼곡하게 쓰여진 것을 펼쳤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다.
이름은 섭군영(葉君映).
약관이 조금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강호에선 그를 음혼마군(陰魂魔君)이라 불렀다.
귀주성에서 활동했던 마인으로 금년 본교에 입교.
그를 사풍단(沙風團) 말단으로 입단 발령함.
그 처소 역시 북문에 위치한 사풍각(砂風閣)으로 배정.
특이 사항은 여색을 심하게 밝힘.
그의 독문 무기는 비도(飛刀).
그 무공은 잔혼비섬(殘魂飛閃)이라 불렀다.
……이하 생략
구양운은 종이의 내용을 모두 숙지 한 뒤 그것을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이곳 마교에 있는 동안 구양운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섭군영이라 불리는 새로운 인물로 말이다. 물론 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겠지만 구양운은 종이에 적힌 내용은 정확히 암기했다.
구양운은 길게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는 달빛이 고고하게 내리 비추는 길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시작인가?”
구양운은 느긋한 발걸음으로 북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진시(辰時:오전 7∼9시).
이 시각은 무인들에겐 결코 이른 시간이 아니었다.
사풍단 역시 이른 새벽부터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다.
차아앙!
“하아압!”
기합 소리와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무장을 가득 메웠다.
발놀림에 따라 떠오르는 먼지와 사내들의 땀 냄새가 진득하게 붙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 장소에,
구양운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단상 위에서 사풍단의 수련을 지켜보던 단주의 눈에 구양운의 모습이 걸렸다.
‘뭐야, 저놈은?’
그는 숨기지 않고 오만상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