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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전 1권(12화)
第五章 그리고 깨어난 달마역근경(2)


쿵!
발로 땅을 구르자 뜨거운 열기가 몸 속에서 확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익어 버린 고기처럼 내 팔이 붉게 달아올랐다.
머리가 조금 어지럽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지난번처럼 이성을 잃어버리면 곤란하다. 그때와는 달리 상대의 목적은 미령이다.
사부에게 배운 백보신권의 오의, 그 심공을 펼친 것이다. 펼칠 때마다 느끼는 건데 기분은 별로 좋지 않다. 정수리가 따끔거리면서 심한 고뿔에 걸린 듯이 어지럽고 뜨겁다. 하지만 위력은 확실하다. 무림명가의 자제들도 때려눕혔다고.
나는 각오로 똘똘 뭉친 주먹을 들어 올렸다.
“경고합니다. 물러나십시오.”
그러자 놀랍게도 사내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무저항이라는 뜻으로 두 손을 들어 올리고 단도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푼다. 하지만 단도를 놓지는 않았다.
“거참. 해치려는 게 아니라니까. 물론 이 방법이 규정 위반이긴 하지만, 확인하기엔 빠르다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나는 여전히 사내를 경계하고 있었다. 비록 공격 의사를 표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소림사에, 그것도 칼을 소지하고 들어오는 것은 규정 위반이다. 침입자, 라고 해도 손색 없는 것이다.
내 뒤에는 미령이가 있다. 나는 침을 삼키며 물었다.
“제대로 정문을 통과하고 들어오신 겁니까?”
“빡빡하게 굴긴. 혹시 소림에서는 그렇게 하라고 머리도 빡빡 미는 겐가?”
“무단침입에, 불법 흉기 소지 및 위협은 소림에서는 꽤 큰 중범죄로 다스립니다. 당장 물러가지 않는다면 소리를 지를 겁니다.”
상대하고 말고의 문제를 떠나, 나는 미령이를 지켜야 하는 입장. 거기다 맨손. 어찌 봐도 불리하다.
“하하. 이 산속에서 소리를 지른다고 누가 오기나 하겠…… 잠깐.”
사내는 말을 멈추고 내 위아래를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한 손에는 기이하게 꺽인 단도를 쥔 채로, 감정하듯 나를 보고 있다.
뭔가 궁리하는 듯하더니 금세 말해 버린다.
“그거 백보신권이지?”
“…….”
“맞네. 그 자세, 그 기운. 어딘가에서 봤다 했어. 사부가 누군가? 아니 내가 맞춰 보지. 소림의 수호신승, 그자인가?”
수호신승이란 단어에 대해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말하는 금대호의 눈빛이 차갑게 굳어 있다. 사람 좋아 보였던 그 미소가 그렇게 섬뜩하게 보일 수가 없다. 위험한 자다. 아니, 아까부터 위험했는데, 지금은 피부로 와 닿아 소름이 오싹오싹 돋았다.
“무, 물러나!”
다행히 사내는 한 걸음 뒤로 옮겼다. 나와의 거리는 이제 제법 벌어졌다. 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이제 올렸던 손을 내리고 사내는 손에 든 단도의 도면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위험 신호를 내게 마구마구 보내고 있어서, 나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펴보았다.
“그렇잖아도 이제 그만 갈 생각이네. 수호신승과 엮이면 골치가 아프거든. 그래도 좀 곤란한데…… 좋아, 이러지. 날 본 걸 비밀로 해 주면 나도 비밀을 하나 알려 주겠네.”
다짜고짜 협상을 걸어온다. 무어라고 대답할 말을 찾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이 단도. ‘고서’라네. 수호신승의 제자라면 무슨 말인지 알겠지?”
고서. 낡고 오래된 책을 의미하지만은 않은 단어. 난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사내의 손에 들린 단도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특이하게 생긴 단도였다. 마치 제멋대로 휜 반월도가 축소된 모양 같았다.
저 단도가 달마역근경처럼 자아를 지니고 있는 물건이라고?
금대호는 단도를 품에 갈무리했다. 꺼낼 땐 몰랐는데 가죽으로 날을 조심스레 감싸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운을 띄운 금대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수림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내 귓가에는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맴돌고 있었다.
“고서는, 고서를 알아본다네.”
그 말은 내게 있어 어떤 불안한 선고와도 같았다.

***

그날 저녁. 우리집 마당에서는 때 아닌 고기 축제를 열게 되었다. 사부가 토끼를 한 마리 잡아온 것이다. 어떻게 요리할지 고민하는 사부에게 구워 먹자고 조언했더니, 제자의 조언을 들은 사부는 손질한 토끼를 끓는 물에 넣음으로써 무시했다.
저녁은 단출했다.
사부는 평상시대로 평상에서 술을 먹었고 고기를 뜯었다. 미령이의 식사는 벽곡단으로 해결하고 있다. 그것도 그냥 벽곡단이 아니라 온갖 약재를 섞어, 원래 없던 맛을 더더욱 떨어뜨린 그런 식사였다. 맛은 없으나 기력 회복에는 좋다고 한다.
평소와 다름없는 나른한 저녁이었으나 사부와 나의 대화는 어딘가 겉도는 느낌이 있었다. 하늘 좀 보게 구름을 치워 달라느니, 비가 오면 방 천장에 물이 새니 고쳐 두라느니 하는 실없는 대화의 연속이었다. 미령이가 옆에 앉아 있어서인지 그런 분위기는 유독 심했다.
잠시간에 침묵이 깃든 사이 내가 노리던 마지막 고기 한 점을 잽싸게 들어 올린 사부의 얼굴이 돌연 얼간이처럼 넋이 나갔다.
“내 주량도 약해졌나. 아니면 몸이 안 좋아졌든가. 어찌 됐든 몸이 이상한 것 같구나.”
“놀랄 일도 아니지요. 이미 건강 악화는 예약한 줄 알았습니다만.”
먹이를 빼앗긴 자의 퉁명스런 말에 사부는 짐짓 눈에 힘을 주었다.
“음. 이상해. 벌써 취한 것 같아. 네 녀석이 내 술을 마시는 것처럼 보이거든.”
“술이 쓰네요. 어릴 때 구걸 갔던 잔칫집에서 마셨던 곡주보다 더한데요.”
“내 피 같은 술을 마시다니! 네 녀석이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
“피를 마시는 것보단 낫잖아요.”
그러자 차라리 내 피를 마시라며 팔을 내미는 사부를 나는 지그시 바라보았다. 사부는 내가 아무 말도 없자 공포에 질린 척 몸을 웅크렸다.
“사람의 피를 마시려 하다니, 마구니가 되었더냐. 아아, 제자는 무서운 마구니가 되었어.”
“사부.”
더 이상 사부와 농을 주고받고 싶지 않아 진지하게 불렀다. 사부는 내 눈을 피하듯 토끼를 삶은 솥을 휘젓고 있었다. 이미 다 먹어서 고기는 한 조각도 없다. 진지한 자리를 싫어하는 사부다운 회피였다. 그러나 난 피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낮에 있었던 일을 사부에게 말하지 않았다. 물론 생전 처음 보는 침입자에 대한 의리 같은 건 당연하게도 나에겐 없다. 다만 알고 싶었다.

고서는 고서를 알아본다.

그는, 그의 고서는. 무엇을 보았던 것이며 무얼 확인하려 했던 걸까.
미령이를 바라보았다. 모포를 어깨에 두른 채, 미령이는 여전히 가만히 앉아 있다. 다시 사부를 보았다. 여전히 육수만 남은 솥을 휘젓고 있었다.
나는 사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부는 알고 있죠? 미령이가 왜 이런지. 내 여동생이 어떻게 된 건지.”
흐린 육수 속에 있지도 않은 고기를 낚으려는 사부는, 대답 대신 뜬금없는 말을 뱉었다.
“금가 녀석은 어떻더냐. 네가 오늘 만난 대나무 같은 녀석 말이다.”
“……어떻게든 알고 있네요. 비밀을 지켜 달라는 약속 때문에 말하지 않았어요.”
변명이었다. 사실 그런 수상한 사람하고의 약속 같은 건 지킬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아닌 사부의 입으로 나는 듣고 싶었다.
“그런데 아는 사람인가요?”
“잘은 몰라. 청부업자다. 살수라고도 하던가.”
살수. 사람을 죽이는 것이 직업인 사람. 낮에 만난 금대호를 떠올려 보았다. 생각해 보니 그는 기척도 없이 내 뒤에까지 왔었다. 만약 그가 나를 죽이려 했다면, 그건 아주 손쉬운 일이었을 테다.
그렇게 생각하자 오싹해졌다. 사부는 잔뜩 굳은 내 모습에 빙긋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소림에서 함부로 굴지 못할 게다.”
그러고 보니 금대호는 살수라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 치고는 꽤 얌전했다. 음침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천방지축처럼 제멋대로였다. 살수라는 단어에 대한 선입견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 하지만 그렇기에 더 위험하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팔의 털이 쫑긋쫑긋 솟는 것 같았다.
사부는 회상을 하는 듯, 턱을 매만지며 잠겨 가는 얼굴로 말했다.
“언제였더라, 당돌하게 나에게 덤벼든 적이 있었어. 물론 내가 이겼지만…… 그놈, 꽤 거래에 해박한 놈이었지. 분명 입을 막는 대가로 뭔가 얻은 게 있을 텐데? 이를 테면 ‘정보’ 라든가.”
나는 생각하기 싫은 말이 떠올라 이를 악물었다.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 따윈, 안 믿습니다.”
“믿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녀석 분명 너에게 하현(下弦)을 보여 줬을 텐데. 그 이상하게 생긴 단도 있잖느냐. 그 녀석의 ‘고서’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나는 수호신승이니라. 모르는 것이 없어.”
금대호가 나에게 수호신승의 제자라고 말하던 것이 떠올랐다. 류진룡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럼 사부는 정말 소림을 수호하는 수호신승일까. 그래서 소림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걸까. 그렇다면 미령이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 않을까.
“헌데 고놈이 무슨 말을 했는고?”
“좀…… 이상한 말이었어요.”
고서는 고서를 알아본다.
나는 사부에게 금대호에게 들은 그 미심쩍은 말을 들려 주었다. 내 말을 들은 사부는 별일 아니라는 듯 그랬구나 하는 것이다.
“사부. 어떻게 생각해요?”
“그야 물어보면 되지 않겠느냐.”
솥을 젓던 사부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는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 눈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사부는 미령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말해 보거라.”
미령이는 여전히 전방을, 사부와 나 사이에 비어 있는 허공을 응시한 채였다. 대답은 없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이 커졌다. 그 마음을 떨치려 짐짓 헛웃음을 지으며 사부를 말렸다. 내가 느끼기에도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하.하. 무리하지 마요, 사부. 미령이가 대답을 할 리가 없잖아요?”
사부는 말없이 미령이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을 정도로 진지하고, 어딘가 분기가 섞여 있는 눈빛.
목 언저리를 서늘하게 훑고 가는 바람을 타고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할 수 있을 거네, 사질.”
“사, 사백님.”
집을 둘러싼 울타리가 끊어진 부분. 입구라 할 수 있는 그곳에 방장 스님이 서 있었다. 한 걸음, 마당으로 들어서는 방장 스님은 한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달마역근경이다.
“아미타불. 이 책에 대하여 알아보았네. 소림에도 삼백 년 정도 된, 쓰지 않은 종이가 있거든. 그것들과 이 책을 비교해 보고 알아낸 사실인데…… 종이의 농도가 달라. 이 책은 분명 먹이 담겨 있었던 책이네. 원로원에서 확인한 사실이니 확실할 게야.”
그러나 지금은 없다. 겉표지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글자도 적혀 있지 않은, 오래된 종이일 뿐이다. 그렇다면 원래 쓰여 있을 글자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빈승도 고서가 생성되는 원리에 대해서는 잘 모르네. 하지만 ‘고서’는 분명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고 생겨난다. 또한 어떤 논리와 이치로 설명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지. 그 가정하에 생각해 보았을 때 이 책은 분명 고서라네. 책의 글자가 사라져 버린 이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으니까. 그럼, 그 글자는 어디로 갔을지…….”
방장 스님이 손에 들린 책을 펼쳐 미령이에게 내밀었다.
“자네는 아는가?”
해는 기울어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처럼 맑았던 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별빛조차 비추지 않았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모닥불 소리. 일렁이는 불빛에 방장 스님의 얼굴과 미령이의 얼굴이, 이 장내가, 어지럽게 비춰졌다.
스윽.
전시되어 있는 인형처럼 앉아 있던 미령이의 손이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마치 손목에 실을 묶어 누군가 들어 올리기라도 하듯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내 몸을,”
펼쳐진 책자에 손을 얹는다.
“함부로 다루지마.”
난 숨이 막혔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무얼 뜻하는지, 이런 나라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두렵고 무서우며 상상할 수조차 없이 끔찍한 일이었다.
미령이의 손이 닿은 종이에는.
퍼져 나가 듯 문자가 새겨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