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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전 1권(13화)
第六章 소림의 수호신승(1)
봄이 끝나 가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내 귓가에는 봄의 마지막을 알리는 빗소리와 옆방에서 비가 샌다며 투덜거리는 사부의 음성이 간간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상하게 조용하고 고요하다.
나는 내 방에서 가만히 앉아 숨조차 옅게 쉬며, 세 시진 전부터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령이―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인, 내 여동생의 껍질을. 문득 ‘그것’이 고개를 돌려 눈에 나를 담는다. 부자연스러운 동작. 마치 목각인형에 줄을 매달아 움직이는 것 같다.
“인간. 할 말이 있으면 해라.”
“없어.”
“그때처럼 나오라고, 내 동생 돌려달라고 울부짖는 건 그만두기로 한 건가?”
이가 아득 갈린다. 그날. 방장 스님을 통해 저 녀석의 정체를 알게 되었던 날. 분명 나는 그러했다. 울부짖으며 녀석에게 내 여동생의 몸에서 나와 달라고 외쳤다. 미령이를 되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
녀석은 내 여동생의 몸에서 나오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들어갔냐고 따져 보았으나, 본인도 그것은 모른다고 했다. 일종의 방어의식이었던 것 같다면서, 그렇게 얼버무렸다.
“나도 이런 몸은 싫으니 얼른 돌려놔.”
오히려 뻔뻔하게 항의하고 있다. 나는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미령이의 몸에서 널 꺼낼 테니까.”
“희망적인 말이군. 어떻게?”
“생각 중이다.”
“힘 내.”
책 주제에 응원까지 할 줄 아는 고약한 녀석이었다.
지금 미령이의 육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달마역근경. ‘고서’다.
‘고서’란 어떤 특별한 의미가 담긴 물건이 오랜 세월을 맞이하여 영기가 어려, 영혼을 가져 버린 물건을 지칭하는 말이다. 꼭 책이 아니어도 그런 현상의 물건을 ‘고서’라 부른다고 한다. 일종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350년 전 혈검의 난을 일으켰던 마검이 있고, 금대호라는 수상쩍은 살수의 단도 ‘하현’이 있으며, 비교하기로는 수백 년을 산 ‘영수’ 혹은 ‘영물’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그런 전설이나 동화에나 나올 법한 전래적인 사건이 지금 내 눈앞에, 내 여동생의 몸을 빌려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몹시 막막하고 짜증나며 슬픈 일이었다.
“일단 명칭부터 정하자. 미령이도 아니면서 그렇게 부르는 건 미령이한테 실례니까.”
말해 놓고도 나는 의문이었다. 과연 사람의 이름은 어디에 붙어 있는 걸까. 몸일까, 아니면 영혼일까. 애초에 사람을 ‘그 사람이다’라고 정의하는 기준을 나는 알지 못했다.
어쨌든 잘은 모르겠으나 미령이라고 부르기가 싫었다.
이 녀석에 대한 대처는 방장 스님과 사부가 알아본다고 했다. 옆방에서 비가 샌다며 호들갑 떠는 사부의 음성을 들으니, 아무래도 방장 스님에게 기대해야 할 듯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미령이를 다시 제자리로 되돌릴 동안 이 녀석을 상대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뭐라고 부를 건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던 녀석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서’의 언변은 유창했다. 마치 사람처럼.
잠시 고민을 하던 나는 괜히 심술이 났다.
“누렁이.”
“왠지 기분 나쁘다.”
“그럼 나비.”
놀랍게도 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으로 보이는 동안은 인간으로 불릴 수 있게 하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겠는가?”
“설마 오래 눌러 있을 작정이냐? 그렇겐 못 둬.”
“방법을 찾게 되면 나도 내 몸으로 가고 싶다. 인간의 몸은 불편하다. 생존을 위한 일들이 너무 많아. 숨도 쉬어야 하고.”
“부탁인데 숨은 쉬어 줘. 안 그러면 사람은 죽어.”
녀석은 그 정도는 안다면서, 또 자신도 그렇게 되어 버리면 곤란하다면서 수긍했다.
“너도 궁리해 봐. 이름이든, 돌아갈 방법이든.”
녀석은 고개를 돌려 열려 있는 방문 바깥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덩달아 방문 밖으로 눈을 돌렸다. 비가 심하게 오고 있었다.
“란(蘭).”
“……란? 혹시 난초를 말하는 거야?”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인간이 좋아했던 식물이다. 그걸로 하겠다.”
“뭐 마음대로 해. 어차피 그 몸에 오래 있을 것도 아니니까.”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언제쯤 내 여동생은 제자리를 찾게 될까. 어두운 방장 스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낮은 목소리로 ‘사질, 어쩌면…….’ 이러던 그 말이 기억에 남아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란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탁 풀린 동공으로 여전히 전방만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란의 말을 떠올렸다.
녀석이 기억하는 유일한 인간이라면, 설마 달마 대사님을 말하는 걸까 싶었지만 아닐 것이다. 고서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자아가 깨어난다고 했으니까. 처음부터 ‘기억’이란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튼 미령이의 몸에 들어간 달마역근경의 이름은 ‘란’으로 정해졌다. 그 다음은 다시 되돌릴 방법이다.
나는 란과 나 사이에 놓여 있는 책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혹시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면서 방장 스님이 두고 간 달마역근경이었다. 어차피 내용이 적혀 있지 않으니 별 필요는 없는 모양이었다.
미령이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고서’, 란은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책의 내용을 되돌릴 수 있다. 놀랍고도 섬뜩한 일을 접한 방장 스님은 필사본을 만들게 도와달라고 하였으나, 란은 거절했다.
―이 상태를 유지하기도 힘들다.
라는 것이 이유였다. 나는 미령이를 다시 되돌리기 위해 조금이라도 정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책의 내용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책의 내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는 방장 스님의 방법과는 달리 나는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인 ‘질문’을 택했다.
“그런데 이 책, 무슨 내용이 담겨 있는 거야?”
답변은 금방 들려왔다.
“모른다. 내가 쓴 게 아니라서.”
“네 몸이라면서 뭐라고 쓰여 있는지도 모르냐.”
“인간. 넌 네 몸속의 내용물을 일일이 알 수 있는가?”
어딘가 궤변 같은 논리였으나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도 내 몸속이 어디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대강은 알아도 자세히 알지는 못하니까.
한 숨을 내쉬며 나는 다시 바닥에 놓여 있는 책에 집중했다.
영혼이란 걸 그다지 믿지 않았던 나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생기면서 자연스레 영혼에 대해 믿게 되었다.
고서의 영혼이 지금 내 여동생의 몸에 씌여 있다. 마치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어라? 만약, 정말 만약에 말이다. 진짜 귀신에 홀리듯 씌인 거라면, 조금 잔인한 생각이지만 이렇게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란의 음성이 뒤를 잇는다.
“말해 두겠는데, 그만두는 게 좋다.”
오히려 그 말은 내 행동에 더욱 부채질을 해 버렸다.
“너한텐 미안하지만.”
봄의 안녕을 알리는 비가 주륵주륵 내리는 마당을 향해 나는 달마역근경을 내밀었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하지만 이 방법 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변명하듯 말했다.
“네 본체가 상하게 된다면. 그래, 책으로써 죽는다면 넌 미령이의 몸에서 사라지겠지. 그리고…….”
미령이가 돌아올 것이다.
양심의 가책은 느낀다. 하지만 사람도 아니고 그저 책 한 권을 없애는 것은 나로서도 용기를 낼 수 있는 일이었다. 더불어 소림의 역사적인 책을 훼손하는 것은 소림의 제자로써 더 없이 불손한 일이겠지만.
나에게는 미령이가 더 중요하다. 이 행동으로 인해 소림에서 어떤 벌을 받게 되더라도 나는 감내할 수 있다.
결심을 굳히고 책을 마당에 던지려고 했을 때였다.
“하나의 그릇엔 하나의 혼만이 머문다.”
란이 몹시도 수상쩍은 말을 내뱉었기에 난 움직임을 멈췄다.
“……뭐?”
“나는, 여기에 있다.”
란은 여전히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차갑게 굳어 있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귓가에 빗줄기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문득 란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출지 의문이 들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살해자를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럼 미령이라는 인간의 혼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책을 든 채로 굳어 버렸다.
***
“알아냈다! 알아냈어!”
불현듯 사부가 내방으로 뛰어들어 왔다. 나는 고개만 돌려 촘촘히 솟아난 머리카락 위로 물방울진 사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부는 웃으면서도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반응이 좋으니 나도 신이 나는구나. 그런데 제자야. 또 내 술을 마신 건 아니겠지?”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하지만 술을 마신 것처럼 머릿속이, 마음이, 몸이,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 귓가로 들리는 사부의 음성보다, 추적추적 떨어지는 빗방울의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사부는 더 이상 내 상태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기세로 말했다.
“아무튼 들어라. 저 고서가 네 동생의 몸에 씌었지? 그럼 그 책을 없애면 다시 네 동생은 돌아올 게야! 존경은 나중에 받기로 하마. 자, 그럼 이제 책을 없애자.”
후루룩 뱉는 말에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으나 난 사부의 손을 뿌리치고 책을 품속 깊이 품었다.
“안 돼요! 이 안에 미령이가 있다고요!”
내 여동생을 세 번째로 살해 할 뻔한(물론 첫 번째는 습격한 자들이고 두 번째는 나다) 사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잉?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고서’, 란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에 사부도 고서를 바라본다.
“혹여 저 ‘고서’가 그리 말하더냐?”
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는 다시 나를 보았다. 전날 보았던 그때처럼, 사부의 얼굴은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무거운 목소리로 사부가 말했다.
“자아와 사고를 지닌 ‘고서’ 역시 생명체다. 죽지 않으려고 너에게 거짓을 말했다고는 생각지 않느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것이 진실일지는 모르지만, 여동생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인간. 나는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고서’. 란의 목소리였다. 란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두 눈에 사부를 담고 있었다.
“다만 내가 알기로 스승과 제자는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는 사이라고 하던데. 어째서 그대는 제자를 아끼고 존중하지 않는가.”
나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말을 들은 사부의 얼굴은 잠깐이지만 딱딱하게 굳은 것이었다. 하지만 곧 원래대로의 유쾌함으로 돌아왔다.
“고서여. 멋대로 추측하지 말거라. 아무튼 네가 그랬다면 맞는 말이겠지. 그런데 제자야. 내 방 물 샌다.”
아끼고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런 걸 뜻하는 건 아니겠지.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다.
다시 란을 바라보았으나 란은 다시 시선을 방구석으로 돌려 죽은 듯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