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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마도 1권 (9화)


그의 이런 모습이 그동안 사풍단 단원들과 친해지지 못한 이유 중 하나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구양운이 곤소우를 쓰러뜨린 사건 후로부터는 그 전보다 사풍단에서 전문통에게 호의를 가지고 잘 대해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상한 현상이었지만 그것은 모를 일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를 때,
“자.”
구양운이 전문통에게 다가가 물이 들어 있는 가죽 주머니를 건넸다.
전문통이 건네준 것이었으니 그것을 돌려 주려 온 것이었다.
하지만 전문통과 방금까지 대화를 하고 있던 구인호와 양마달은 구양운의 등장에 쭈뼛거렸다.
그것은 구양운의 지독한 살기가 남긴 잔재였다.
기억이란 놈은 무서운 것이라 한번 심어 준 공포심은 그렇게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구양운이 단숨에 해치운 곤소우는 다혈질이지만 사풍단 내에서도 최상위 권에 속했던 무인이었다.
그러니 더욱 더 구양운의 마지막 환영이 더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것이었다.
전문통은 그저 웃으며 구양운이 준 가죽 주머니를 챙겼다.
여러 사람이 교차하는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구양운은 주변의 시선에 관여하지 않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 고민은 마교에서 출발한 첫째 날부터 시작되었다.
바로 육대방이 무저갱에서 나오던 날 주었던 비단 주머니를 꺼내어 보았을 때부터였다.
처음엔 그저 천마총으로 가는 지도를 보고 길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지도라는 것이 참 애매한 것이,
길을 알려 주는 것이니 지도라 부르는 게 맞을 텐데도 이것은 보통의 그것과는 차원이 틀렸다.
정확하게 구양운이 호남성에서 출발해서 하루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가야 하는지 그가 묵어야 할 장소와 객잔까지도 표시가 되어 있었다.
자로 잰 듯이 정확한 일정이었다.
그때부터 구양운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분명 호남성에서 천마총까지 가는 길이 쉽다고 생각하진 않았으나 이것은 생각을 훨씬 웃돈 감시였다.
천마총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구양운이 준비해야 할 일들은 더 많았다.
구양운이 그토록 목말라 하던 정보라던가 그의 주 무기인 장검조차 한 자루 들고 있지 않은 게 현 상황이었다.
그가 위장하고 있는 섭군영이라는 자는 단도가 독문 무기였기 때문에 구양운이 지녀야 할 것들도 자연스레 단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손에 익은 장검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뿐 아니라 천마총에 들어가려면 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구양운의 눈이 사이하게 빛났다.
그의 한일(一)자로 다물어 있던 입술이 세로로 올라가며 웃었다.
‘내가 호락호락하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구양운은 역으로 생각했다.
이 지도를 어기지 않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손에 넣는 방법.
한 가지의 허점이 있다면 이 지도엔 시간이 계산되어 적혀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지도를 어긴다고 해서 당장 구양운의 목이 땅에 떨어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풍단과 헤어지고 난 뒤에는 어떻게 해서든 그를 천마총까지만 보내면 되었기 때문에 저쪽에서 무슨 수를 써올지 몰랐다.
웬만하면 처음부터 맞춰 주면서 움직이는 편이 훨씬 수월할 것이라고 구양운은 판단했다.
구양운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그들의 머리 위에선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해가 지자 으레 그래 왔듯 단주 유호광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
그의 목청은 어디서든 변하지 않았다.
“자자! 오늘은 여기서 짐을 풀고, 내일 새벽에 출발한다!”
해가 저물었다 해도 시각은 그렇게 늦지 않았기 때문에 유호광은 지금까지 항상 길을 더 재촉하곤 했다.
하지만 목적지가 가까워져 옴으로 체력 유지를 위해서 단주가 오늘만큼은 선심을 쓴 것이다.
“와아아!”
여러 사람의 탄성 소리가 들렸다.
“불침번은 그대로 돌아간다.”
탄성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물을 끼얹듯이 유호광의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불침번이라는 게 당연히 없으면 안 되는 것이었지만, 잠깐의 휴식을 맛보고 싶은 그들의 마음을 그는 무참히 꺾어 버렸다.
유호광은 말을 마치곤 다시 바위 위에 걸쳐 앉았다.
유호광 역시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임무 수행 중이었다.
지킬 건 지켜야 된다는 게 유호광의 생각이었다.
하루 이틀 밤의 노숙이 아니었기에 단원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몇몇은 잠자리를 살폈고 모닥불을 지피는 이들도 있었으며 간단한 음식을 준비하기도 했다.
마른 고기로 식사를 때울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긴박한 상황에서나 통용되는 것이었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 줘야 힘도 나는 것이다.
구양운도 배분된 식사를 가지고 모닥불 앞에 앉아 있었다.
운기조식을 하며 몸 상태를 돌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삽시간에 주변은 고요해졌다.
해도 이미 완전히 져 버린 상태라 모닥불 부근만 빛을 발할 뿐 깜깜한 어둠이 찾아왔다.
구양운은 앉은 자세에서 움직임이 없었다.
지도를 어기지 않으면서 천마총으로 가는 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다 얻어야 했기 때문에 그 생각만으로도 구양운의 머리는 쉴 틈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까?
사풍단 모두 잠에 빠졌을 거라 생각이 들 때쯤 들리는 기척 소리에 구양운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발소리를 죽이며 구양운에게 다가오는 전문통이 보였다.
구양운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까지 안 자고 뭐하냐?”
전문통이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그냥 잠이 잘 안 와. 마교를 이렇게 멀리 나와 본 게 처음이라 그런가?”
전문통은 구양운 옆에 자리를 잡으며 앉았다.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이리저리 휘저었더니 불길이 더 거세게 타올랐다.
불빛을 받는 부위가 노랗게 빛이 났다.
“체력을 위해 자 둬라.”
구양운은 짤막하게 말을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전문통이 그의 감은 눈을 보곤 다시 모닥불로 시선을 돌렸다.
구양운이 눈을 감고 있다고 잠을 자는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무공 수련할 때 이외엔 항상 눈을 감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한다는 것을 짧은 시간 만났지만 느꼈기 때문이다.
전문통이 손바닥을 부채처럼 펴서 불 가까이 가져갔다. 그의 손이 금세 따뜻해졌다.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보석처럼 박혀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할아범……’
헤어진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전문통은 항상 할아범이 그리웠다.
‘잘 지내시겠지?’

* * *

“이노오오옴!”
마교 이장로의 전각은 한밤중에 발칵 뒤집어졌다.
이장로의 출타가 끝나고 마교로 돌아오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적발귀(赤髮鬼) 전등양(錢燈陽).
교주의 사돈인 대장로 악불위를 제외하면 교내에서 전등양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교주의 방계 혈통으로 친족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마교의 하늘은 하나이듯이.
전등양의 선대는 사공(司空)이라는 성씨를 버리고 그들은 절대 교주의 자리를 넘보지 않을 거라는 일종의 암묵적인 맹세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지만, 결코 그들이 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교주의 친족이라는 이유로 세력이 커지면 그것에 제제가 가해졌기 때문에 어느 수준 이상을 커 나가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 대장로의 자리는 전등양의 것이 될 수도 있었다.
전등양은 적발귀라는 별호답게 그의 머리카락이나 눈썹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그가 익힌 무공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었지만, 이것은 한때 공포의 대명사이기도 하였다.
그 붉은 머리칼이 사방으로 휘날리기 시작했다.
화를 참지 못하고 내공을 운용하니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살기가 전각 곳곳을 가득 메웠다.
‘문통아.’
이미 늙어서 자글자글한 주름 위에 눈물 한 방울이 맺혔다.
전등양의 처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가족이라곤 그녀가 남기고 간 외아들 하나뿐이었다.
백절신군(百節神君) 전리백(錢利白).
그는 한때 마교에서 손꼽히는 후기지수로 교내에서 큰 촉망을 받는 자였다.
하지만 명줄이 길지 않았는지 전리백 내외도 전등양의 부인처럼 젊은 나이에 숨을 거뒀다.
다행히도 전리백은 일찍 혼인을 치렀기 그들에겐 자식이 한 명 있었다.
그 손자의 이름을 전문통(錢文通)이라 짓고 전등양이 손수 키웠다.
아들 전리백은 혹독한 훈련을 시키며 강한 무인이 되어서 대를 이어 주길 바랐지만 그가 일찍 죽은 뒤 전등양은 마음이 많이 피폐해져 있었다.
아들이 살아 있을 때 그 자신이 그를 따뜻하게 대해 준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고 그가 강한 무위를 보일 때마다 그저 만족했을 뿐이었다.
그런 전등양에게 전문통은 너무나도 귀여운 손자였다.
아들을 가르칠 때처럼 혹독한 수련 한번 시키지 못하고 그저 애지중지 키우기만 했다.
하지만 전문통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나약한 심성을 가지고 무인의 자질이 보이질 않으니 전등양은 초조해져만 갔다.
강호는 무인이 있는 곳이었다.
전등양은 몸의 일부를 떼어 내는 심정으로 전문통을 신생 단체인 사풍단으로 보냈다.
사풍단으로 보낸 것에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전문통이 강한 무위를 가지진 못했으나, 신분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뒤에 전등양이 있는데 누가 감히 그를 함부로 한단 말인가.
하지만 강한 무력 단체에 보내자니, 무공도 약한 손자가 먼저 가 버린 아들처럼 위험한 임무를 맡을까봐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신생 단체인 사풍단으로 보낸 것이었다. 그 작은 단체가 위험한 임무를 맡을 리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전등양은 그저 손자인 전문통이 무인이라는 것에 대해 자신이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을 깨닫고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그렇게 일부러 자신의 손자라는 것도 숨긴 채 사풍단으로 보낸 지 오래되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먼저 떠나보낸 아들처럼 운명의 장난인지 손자가 있는 사풍단은 결코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임무를 가지고 마교를 떠났다.
부들부들.
콰지직!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내지른 그의 손바닥에 단단한 목재로 만들어진 책상이 힘없이 부서져 버렸다.
그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살아서 많은 사람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하지만 손자만은 아니었다.
전문통마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야수대(野獸隊) 전원을 소집한다!”
전등양의 목소리가 전각을 뒤흔들었다.
야심한 밤 마교에서 야수대 전원을 데리고 전등양은 사풍단의 뒤를 쫓아 떠났다.

* * *

이른 새벽이 되자 사풍단원들은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양운은 남들보다 일찍 몸을 일으켜서 간단하게 운기조식을 마쳤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하는 대신 운기조식으로 체력을 가다듬어야 했다.
한때는 살수였기 때문에 언제 어느 때든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오는 칼날에는 예고가 없으니 말이다.
아직 해가 뜨기 전임에도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큭.’
아침의 선선함을 느끼며 구양운의 입가엔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의 웃음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천마총으로 가는 지도를 머릿속으로 새겨 두곤 그만의 지도를 다시 그려 나갔다.
이젠 그 지도가 거의 완성이 되었다.
그는 그가 원하는 것 그가 필요한 것 무엇 하나도 두고 길을 갈 생각이 없었다.
기지개를 한번 크게 펴자 잠을 자고 있던 근육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준비 완료.’
구양운의 눈빛은 순간 빛을 발했다.
머물렀던 자리를 정리하며 사풍단은 다시 출발할 준비를 빠른 시간 안에 마쳤다.
전문통은 언제 일어났는지 주섬주섬 물건들을 챙겨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 보였다.
구양운 역시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섭군영.”
선두에서 쉬고 있는 유호광이 그를 불렀다.
마교 바깥에서 명령 불복종은 단칼에 목을 벨 수 있을 만큼 큰 죄였다. 그래서인지 유호광의 목소리는 유독 뚜렷이 구분이 되었다.
구양운은 몸을 일으켜 단주 가까이 다가갔다.
단주는 눈짓으로 앉으라고 권유를 했고 구양운은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자리에 털썩 앉았다.
두 사람이 눈높이가 맞아떨어지자 단주는 평소보다 조용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