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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마도 1권 (10화)


“출발하기 전에 말한 것처럼,너는 후미에서 사풍단을 쫓는다.”
“그렇게 하죠.”
구양운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짧게 대답했다.
임무완수가 다가온 이 시점에 곤소우와의 결투 때 통보했던 것처럼 슬슬 구양운을 빼면서 공을 얻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유호광은 구양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출발한다!”
유호광이 외치기 전에 사풍단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들은 가뿐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행렬을 따라 움직이던 전문통이 구양운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군영아?”
아마도 같이 길을 걷지 않는 것에 대한 질문인 것 같았다.
구양운은 피식 웃으며 눈짓으로 후미를 가리켰다.
이젠 뒤에서 쫓아갈 거라는 뜻이었다.
전문통도 그것을 알아채고 웃어 보였다.
전문통이 입모양을 크게 오므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따 보자.”
구양운은 고개를 슬며시 끄덕였다.
구양운을 뒤로 둔 채 사풍단은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풍단의 행렬의 꼬리가 아슬아슬하게 보일 때쯤 구양운은 몸을 움직였다.
‘이제 곧이군.’
지도에 맞춰서 길을 가려면 오늘 중으로 사풍단과는 이별을 해야만 했다.
마침 구양운은 그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참이었다.
잠시 사풍단의 뒤를 쫓아 같이 걸었지만, 이내 구양운은 발길을 멈췄다.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이따 보자는 전문통의 말처럼 인연이 남아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자신이 살아 있다면.
구양운은 사풍단의 행렬을 마지막으로 한번 힐끗 보곤 방향을 돌렸다.
구양운은 결코 느린 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무형잔영신법(無形殘影身法).
잔영이 보일 정도로 빠르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렇게 빠른 신법 임에도 역시나 과거의 살수답게 기척 하나 남기지 않았다.
제법 거리가 벌어지니 더 속도를 높여 가려할 때였다.
그때였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수십 개의 기척들……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을 만큼 은밀한 움직임이었지만, 구양운의 감각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은 사풍단을 향하고 있었다.
‘이건…….’
무엇인가 위험하다는 감각이 치밀어 올랐다.
고요했던 구양운의 눈동자가 순간 빛을 발하며, 사풍단이 있는 곳을 향했다.
“크흐흐흐.”
주변을 가득 메우는 불쾌한 웃음소리가 갑작스럽게 들려왔다.
사풍단의 가장 선두에서 걷던 유호광이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췄다.
훈련받은 것과 같이 사풍단은 유호광의 발걸음에 맞춰 모두 길을 멈추고 섰다.
유호광은 심각한 표정이었지만, 다른 단원들은 약간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모습을 드러내시지요.”
살기가 끈적끈적하리만큼 담긴 유호광의 목소리가 숲을 울렸다.
숲은 고요했다.
차아앙!
하지만 유호광의 외침에 사풍단원들은 전부 검을 뽑아 꺼내었다.
단원들의 눈동자가 숲속을 향했지만 한참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쳤던 유호광만이 고요한 눈빛으로 정면을 직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으흐흐흐.”
그러자 다시 귀곡성 같은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귀청이 찢겨 나가는 듯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였으나 사풍단원들은 대열을 유지한 채 미동하지 않았다.
단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 웃음소리를 인내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정도로 눈치를 주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실망이로구나.”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가 들리며 얼굴에 죽음의 꽃이 잔뜩 핀 노인 한명이 수많은 사풍단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잔뜩 긴장감을 주었던 것과는 다르게 그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노인이었다.
검은 머리 한 올 없이 온통 백발의 노인은 자글자글한 주름을 구기면서 웃고 있었다.
유호광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뉘시기에 길을 막는 것이오?”
따닥따닥.
노인이 지팡이를 짚으며 앞으로 점점 걸어오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글쎄…… 아이야, 내가 누구일 듯싶으냐?”
유호광이 의문스러운 눈빛을 보내자 노인은 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흐흐흐.”
유호광의 이마가 자연스럽게 내 천(川) 자를 그리며 찌푸려져 갔다.
결코 좋은 일로 그들의 앞길을 막아 설리 없는 자였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 봐도 이런 자는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유호광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노인은 느긋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다. 너희는 모두 이 자리에서 죽을 테니.”
그 말을 들은 유호광의 눈빛은 진중하게 변했으나 그의 입술은 반대로 말려 올라갔다.
“어르신, 지금이라도 비키지 않는다면 얼마 남지 않은 생 이곳에서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유호광의 자신 있는 말투가 들리자 사풍단원들은 용기 백배가 되었다.
허세.
그것은 분명한 허세였다.
길을 막는 자는 보통 상대가 누군지 아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그렇다면 자신감 없이는 길을 막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유호광 정도 되는 자라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겁을 집어 먹고 꼬리를 말게 되면 그때는 정말 대책이 없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 그였다.
그러니 그의 입에서 나약한 소리가 나올 리 없었다.
노인은 그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자신감 얼마나 가는지 지켜보도록 하지.”
스스슥.
언뜻 들으면 나뭇가지 흔들리는 것과 같은 소리였지만 그것은 사람의 소리였다.
사풍단을 에워싸며 흑의 복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풍단보다 인원수가 적었지만 그들이 내뿜는 기도는 절대 그들의 아래가 아니었다.
몇몇은 나무 위에 또는 좌우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몸을 드러낸 자들을 유호광이 곁눈질하며 말했다.
“철기오행진을 개시(開始)한다.”
쿵 쿵 쿵.
사풍단의 철기오행진의 개시를 알리는 발자국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하얀 먼지가 일어나며 순차적으로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하지만 노인의 표정엔 일말의 변화조차 없었다.
그는 그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나설 자리나 있으면 좋겠군.”
사풍단의 움직임과 함께 두 눈동자만 드러내고 있는 흑의인 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큰 발자국 소리를 내는 사풍단과 다르게 흑의인 들은 회오리치듯이 조용히 그들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저 그 주위를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환각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환영으로 보였다.
사풍단보다 적은 수였던 자들이 그들보다 몇 배는 더 많아 보였다.
이것이 사술인지 아니면 더 많은 인원이 몸을 감추며 대기하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유호광은 검을 잡은 손에서 땀을 쥐는 것이 느껴졌다.
‘……쉽지 않겠군.’
흑의복면인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기본공을 튼실하게 닦은 사풍단도 그리 만만치만은 않았다. 절도 있는 동작으로 다섯 명씩 조를 이루면서 진을 형성해 나갔다.
하지만 그 찰나의 틈을 기다려 줄 흑의인 들이 아니었다.
카아아앙!
칼끝끼리 부딪쳤다.
짐승들이 서로 먹이를 노리듯이 서로의 칼놀림이 요사스럽게 얽혀 들어갔다.
일반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니었다.
대장간에서조차 듣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명의 순식간에 마찰되는 소리는 천둥번개처럼 생생했다.
한 번의 격돌.
순식간에 사풍단원 두세 명이 바닥을 뒹굴었다.
그들과 같은 조였던 단원들은 주춤했다.
다섯 명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합격술이었다.
이 합격술이 모이고 모여서 만들어지는 진이었다.
이대로라면 모두 순식간에 차가운 바닥에 눕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으하아합!”
유호광이 선두로 나서 검을 휘둘렀다.
유호광의 집요한 검에 흑의복면인의 팔에서 피가 튀겼다. 유호광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부상당한 복면인을 놓치지 않았다.
한 명이라고 제대로 숨통을 끊어 놓아야 편했다.
“물러서지 마라. 대열을 정비해라!”
포효 같은 유호광의 목소리가 진동을 했다.
순간 넋을 놓고 있는 단원들이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양측에서 사상자가 더 났지만, 바닥에 누워있는 건 사풍단의 수가 월등히 많았다.
그 모습을 여유롭게 지켜보던 노인은 여전히 입가를 구기며 웃고 있었다.
“얼마나 걸리려나?”
조롱이 섞인 그의 독백이었다.
어차피 그들의 전력을 모르고 달려온 인원이 아니었다.
노인의 독백대로 승세는 흑의인들에게 가 있었다.
사풍단원들은 점점 손발이 꼬여왔다. 숨 막히는 긴장감에 검에 맞아 죽는 것 보다 심장이 먼저 멈출 것 같았다.
아비규환(阿鼻叫喚).
그 이상의 표현이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푸르던 숲속에는 진득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유호광은 여전히 침착함을 잃지 않은 채 통솔했다.
“원진(圓陣)을 취한다.”
남은 사풍단원들은 동그랗게 모여서 공격 위주에서 방어 위주로 진을 바꾸었다.
한 겨울도 아님에도 그들에 입에서 끈적끈적한 하얀 입김이 보이는 듯했다.
흘러내리는 땀을 닦을 시간 따윈 없었다.
노인이 슬쩍 불쾌하다는 듯이 유호광을 바라봤다.
“시끄럽군.”
노인의 목소리를 들은 흑의인들은 서로 의사소통을 하지 않았음에도 공격의 중심을 유호광으로 바꾸었다.
어차피 승세는 흑의인들에게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해치우는 편이 나았다.
그러려면 가장 중심에서 지휘하는 유호광의 목을 떨어뜨리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
유호광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칼날을 막는데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얄궂은 것은 아직 노인은 단 한 걸음도 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인한 심리적인 압박감은 컸다.
설령 이들을 다 물리친다고 해도 저 노인을 상대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모두가 느끼는 것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순간 포기라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설마 진다면…….
유호광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어차피 여기가 끝이라면 그것은 원하지 않아도 찾아올 것이었다.
그러니 하는데 까진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유호광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저 노인.
저자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었다.
죽인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테고 말이다.
유호광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입에서 진득한 피맛이 느껴졌다. 이것이 자신이 죽인 사람의 것인지 타인의 피인지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유호광의 눈빛은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흑의인들을 피해 노인을 노릴 수 있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할 것이다.
한 수.
그 이상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유호광의 몸에 작은 생채기들이 군데군데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용케도 막아내고 있었다.
유호광은 기회를 노렸다.
사풍단에 단주는 자신이었고, 사풍단 내에 최고수 또한 유호광 본인이었다.
사풍단 단주 자리는 그저 도박으로 따낸 것이 아니었다.
차앙!
좌측에서 그의 어깨를 노리고 날아드는 검을 세로로 검신을 눕혀 막아 냈다.
불꽃이 튀었지만 유호광의 검은 숨을 돌릴 새 없었다.
다시 유호광을 노리고 우측에서 또는 정면에서 날아드는 공격들을 순식간에 막아 냈다.
곁눈질을 하며 기회를 노리던 유호광에게 드디어 노인에게로 뻗어지는 길이 보였다.
한순간이지만 유호광과 노인 사이 아무도 막아서지 않은 길이 포착된 것이다.
유호광은 순식간에 품에서 단도를 수직으로 던졌다.
마치 긴 창을 높게 던져서 사람을 맞추듯이 유호광의 몸이 공중에서 오(五) 자로 구부려지며, 그 탄력을 받은 단도는 순식간에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쏘아 낸 단도는 섬광 같았다.
단도는 단숨에 노인의 심장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점점 빛을 잃어 가는 사풍단원들의 눈에도 그것은 똑똑히 보였다.
하지만…….
티아아앙!
그릇끼리 부딪치는 듯한 맑은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