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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마도 1권 (11화)


위협적으로 날아가던 유호광의 단도는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쳐졌다.
노인은 여전히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아주 자그마한 손짓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호광의 회심의 일격은 노인에게 상처 하나 남기지 못했다.
노인은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호신강기.
그것 하나만으로 유호광의 혼신의 힘이 담긴 단도를 튕겨 내었다.
“크흐흐.”
노인은 처음과 같이 허허롭게 웃을 뿐이었다.
유호광의 눈빛에 처음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유호광 자신의 일격을 호신강기만으로 막아 냈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카강!
하지만 충격에 휩싸인 채 서 있을 틈이 없었다.
자신을 노리고 사방에서 날아드는 검들을 막아 내야만 했다.
‘퇴각?’
짧은 순간 후퇴 명령을 내려야 하나 고민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 흑의인들은 결코 사풍단을 놓치지 않을 것 같았다.
뿔뿔이 산개한다고 해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유호광의 눈이 살아남은 사풍단의 단원들에게 향했다.
연습 때 부진한 모습을 많이 보였던 전문통도 살아남은 인원 중에 한 명이었다. 그것이 못내 놀라웠지만 그 사실이 마냥 기쁠 수만은 없었다.
유호광은 살아오면서 오늘만큼 검이 무겁게 느껴졌던 적은 없었다.
전문통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방에서 피가 난무했다.
주변에 있던 동료들의 팔다리가 순식간에 날아갔고, 죽어 나자빠지는 자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가시지 않는 피비린내로 코가 마비가 되자 이성도 덩달아 날아가 버리는 것만 같은 경험을 하고 있었다.
오로지 그의 머릿속은 같은 말만 맴돌았다.
‘사람의 힘이란 게 기적처럼 강해지는 것은 희박하지, 하지만 순간 방심하면 약해지는 것은 다반사다. 평소처럼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바로 구양운이 마교를 출발하기 전에 내뱉은 말이었다.
전문통은 더 잘하려고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늘 하던 것처럼.
그 것만을 수백 번 되뇌었다.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냉정해진 전문통의 사고로 인해 그는 평소보다 몇 배의 능력을 보여 준 것이다.
‘군영은 어디 있지?’
전문통은 홀로 떨어진 구양운의 걱정을 쉽게 떨쳐 내지 못했다.
하지만 전문통의 걱정과는 다르게 구양운은 큰 나뭇가지 위에서 사풍단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법 거리를 유지한 채 은신을 하고 있었기에 어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거기다 암영대 제일의 살수였던 구양운이다.
이 난전에 그 누구도 구양운을 찾을 수는 없었다.
싸움을 바라보는 구양운의 눈빛은 복잡했다.
굳이 이곳까지 돌아올 필요는 분명 없었다.
그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사풍단 내에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십 년만에 맡는 바깥 공기를 담보로 잡고 이런 위험한 싸움에 끼어들어야 한다면 그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음이었다.
하지만 구양운은 지도에 정해진 길을 가다가 결국 돌아왔다.
그런 자신의 행동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내가 왜 왔는지 모르겠군.’
구양운의 눈으로 보기에도 분명 사풍단은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구양운은 살수였다.
살수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싸워야 할 장소와 피해야 할 장소를 가린다. 그리고 지금 저 싸움터는 분명 후자다.
알지만 구양운은 이상하게 발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구양운의 눈에 어렵사리 버티고 있는 전문통의 모습이 들어왔다.
귀찮을 정도로 달라붙던 놈이다.
하지만 그리 밉지는 않았던 놈……

저놈 덕분에 무저갱에서 나온 이후 삼시세끼를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구양운이 피식 웃었다.
‘내가 고작 이런 것 때문에 움직일 줄은 몰랐군.’
목숨 값으로 밥이라니 참으로 터무니없다. 하지만 지금 구양운에게 그것은 충분히 움직일 이유가 됐다.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나른하게 변했다.
입가는 여전히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아, 어떻게 구한다?’
시간이 길지 않았다. 조금만 더 지체한다면 더 이상 손을 써볼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릴 것이다.
구양운의 시선은 노인이 있는 곳을 향했다.
사풍단을 살리는데 가장 중요한 장애물은 노인이었다.
‘분명히 강해.’
처음부터 범상치 않을 거라 생각했다.
유호광의 회심의 일격을 어린아이 장난처럼 막아 버린 노인이다.
솔직히 말해 구양운은 노인을 죽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살수였을 때의 이야기다.
사풍단이 모두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구양운의 손발을 묶는 것과 다를 바 없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정면 승부밖에는 답이 없었다.
구양운이 사풍단을 향해 막 걸음을 떼려고 할 때였다.
스스슥.
구양운의 정면에 공간이 일그러지며 아무런 소리 없이 한 인영이 나타났다.
잘못 보았다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믿을 것 같은 등장이었다.
하지만 구양운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앞을 막아설 자는 한 명밖에 없다.
내내 구양운의 뒤를 쫓아다닌 이공자의 눈뿐이었다.
“…….”
구양운은 물끄러미 십영을 쳐다보았다.
구양운이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왜?’
구양운의 두 눈은 왜 자신의 앞길을 막아서냐고 강하게 묻고 있었다.
오히려 모습을 드러낸 십영이 흔들림 없는 구양운의 눈동자에 당황했다.
누구든 십영을 보면 항상 놀란 기색을 역력히 보이곤 했었다.
심지어 마교 이공자 사공악조차도 그랬다.
그 이유는 오직 한가지였다.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
지금까지 늘 자신을 불쾌하게 했던 시선이지만, 구양운에겐 그런 기색이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교일지는 다른 곳으로 새어 버리는 마음을 추스르며 구양운에게 말했다.
“지금 나가면 죽어요.”
이 말을 들은 구양운이 기가 찬 듯 웃었다.
“크크큭.”
만약 이런 긴박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는 박장대소를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상황이 이렇다지만 그 말은 너무 우습군.”
십영은 구양운의 반응에도 요지부동이었다.
“전 당신을 천마총까지 데리고 가야 할 임무가 있습니다. 지금도 그 예외는 아니에요.”
십영의 목소리에는 확고한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구양운은 십영의 음성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나를 끌고 갈 자신이 있나?”
“…….”
십영은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설령 십영이라 할지라도 구양운을 끌고 갈 수는 없었다.
눈앞에 있는 구양운이란 사내는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싸운다면 분명 저 노인은 단숨에 알아차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구양운의 뜻대로 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구양운이 다시 움직이려 하자 십영이 날카롭게 말했다.
“가면 정말 그들 손에 죽어요!”
구양운은 교일지를 지나쳐 나무 아래로 도약했다.
구양운은 뛰어내리면서 말했다.
“남의 무덤을 멋대로 정하지 말라고.”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구양운을 바라보면서 오히려 교일지의 눈빛이 어지럽게 얽혀 들어갔다.
구양운의 등장을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역시나 노인이었다.
“쥐새끼 한 마리가 더 있었군.”
말을 하는 노인의 눈빛은 흥미로움이 가득했다.
자신을 속이고 근방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지만 도망가지 않고 당당하게 등장했다는 것이다.
누구든 이 싸움을 본다면 그들이 필패라고 생각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섭군영!”
“군영아!”
유호광은 놀라운 목소리로 또 전문통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한순간 그의 등장에 모두의 눈길이 쏠렸다.
하지만 전장은 쉴 틈이 없었다.
사방에서 옥죄어 오는 공격에 사풍단원들은 다시금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바삐 움직여야만 했다.
그때였다.
“크흑.”
단주 유호광이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그를 집중적으로 노리는 공격을 오랫동안이나 막아 온 차였다.
그가 다치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만큼 버텨 낸 것이 대단할 뿐이었다.
유호광의 어깨에 긴 잔상을 남기며 순식간에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그의 자세가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유호광이 무의식적으로 다른 손을 어깨에 감싸자 사방에서 그를 노리고 검이 날아들었다.
쉬이이익―

그때였다.
타다당.
그 순간 구양운이 유호광 옆으로 등장했다.
사방에서 유호광을 향해 날아오는 검을 구양운은 비수로 튕겨내 버렸다.
결정적인 한 수였다.
그 광경을 본 노인의 안광에 이채가 서렸다가 사라졌다.
‘보통 몸놀림이 아니다.’
구양운의 눈빛은 냉정했지만, 그 안에서 무언가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그는 마인이었다.
그것도 뼛속 깊은 마인.
승부욕과 붉은 피는 가끔 그의 정신을 마비시키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곤소우와의 결투 때처럼 구양운의 입가에는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미소가 머물고 있었다.
“단주님.”
구양운의 목소리가 들리자 유호광은 힘겹게 그를 바라보았다.
유호광은 노장답게 구양운이 벌어준 짧은 시간에 옷자락으로 상처 입은 부위를 단단히 묶고 있었다.
간단할 수도 있지만 경험이 많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호광의 이마는 잔뜩 찌푸려져 있고 딱 보기에도 힘겨워 보였으나 구양운은 개의치 않았다.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유호광은 말할 기운도 없는지 진중한 눈빛으로 고개를 위아래로 가볍게 끄덕거릴 뿐이었다.
지금 유호광의 눈빛엔 빛이 없었다.
자신의 할 일을 마쳤다는 듯 구양운은 천천히 노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흑의복면인들이 그를 막아서려 했으나 노인은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그 동작을 본 흑의인들은 다시 사풍단을 상대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흥미로운 꼬마로구나.”
노인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구양운은 그 말에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과찬이십니다.”
“크하하하!”
구양운의 답변에 노인은 크게 광천 대소했다.
그 웃음기가 다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구양운을 직시하면서 물었다.
“하지만 똑똑한 꼬마는 아니구나, 지금 너 하나로 이들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온 것이냐?”
훈계하는 듯한 그의 말투에 구양운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노인장은 무슨 연유로 내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구양운의 도발적인 말투에 노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노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것이다.
자신보다 한참 말학으로 보이는 구양운을 이기지 못할 거라는 말은 어떻게 들어도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구나?”
살기가 진득하게 실린 노인장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애초부터 살려 두실 생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만?”
“글쎄, 사지를 찢어발긴 뒤 살려 둘지도.”
노인의 쌍장에서 녹색 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주름이 가득한 손바닥에 기가 모이자 바람이 일렁거리는 듯했다.
구양운은 품속에서 유엽비도 한 자루를 꺼내 뜬금없이 바닥을 향해 던졌다.
모두가 의아할 만한 동작이었지만, 잠시 후 그의 행동이 납득이 되었다.
타앙.
쏜살같이 날아간 유엽비도는 누군가가 떨어뜨린 장검 한 자루를 가격했다.
장검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구양운이 그 검을 가볍게 손으로 쥐었다.
마치 장난을 치듯이 허공에 검을 사선으로 그어보며 구양운은 피식 웃었다.
“좋군.”
십 년 만에 쥐어 본 검이었다.
구양운에겐 느낌이 새로울 수밖에 없었지만 그 모습을 본 노인의 표정은 더 일그러질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건방진!”
노인의 육장에서 녹색 장력이 구양운을 향해 쏜살같이 뻗어져 나왔다.
장력이 지나간 곳은 짙은 흙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바닥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유호광의 공격을 호신강기만으로 막은 고수다.
구양운의 몸도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