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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마도 1권 (12화)


그의 손에서 묵성환영검이 펼쳐졌다. 손에 쥔 장검이 엿가락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수히 많은 변화로 여러 개의 검처럼 착각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제대로 놀아 보겠군.’
두근두근.
강한 상대를 만남으로 구양운의 심장이 요동질 쳤다.
그 소리는 한 자락의 노랫가락처럼 귓가를 속삭이며 구양운을 전율시켰다.
구양운의 입꼬리는 도리어 길게 올라갔다.
노인이 쏘아 낸 장력이 구양운을 집어삼킬 듯이 다가왔다.
구양운은 거대한 장력을 사람을 상대하듯이 좌우 방위를 가르며 그 힘을 분산시켰다.
장력의 위세는 구양운의 검에 닿을 때마다 감소되었다.
거대했던 장력이 결국은 얇은 줄기로 힘을 잃고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중 몇 줄기가 구양운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주 미세한 상처들임에도 구양운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했다.
“……독?”
노인의 장력에 맞닿은 상처에서 시커먼 피가 한 두 방울 떨어졌다.
노인의 장력은 독이었다.
“클클, 검 실력이 세 치 혓바닥보다 아래였군.”
노인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처음으로 구양운의 미간이 좁혀졌다.
어찌 되었던 독기운이 날뛰기 전에 노인을 죽여야 했다.
시간이 촉박해진 것이다.
구양운이 생각은 바로 실행해 옮겨졌다.
노인을 향해 구양운은 쏜살같이 다가갔다.
간격이 좁혀지자 구양운의 손에서 검이 춤을 추었다.
검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검이 구양운의 손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검은 구양운의 손등에서 다시 손아귀로 빙글빙글 돌았다.
묵성환영검의 칠 초식 중 후삼초식의 두 번째, 검환뢰(劍丸雷)가 펼쳐진 것이다.
“어리석은 놈.”
노인은 비웃음을 지으며 가까이 다가온 구양운을 향해 다시 한 번 장력을 쏟아 내었다.
아까보다 더 짙은 녹색을 띠며 장력은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구양운의 손에서 검은 회오리처럼 돌았다.
마치 검이 아니라 륜(輪)을 무기로 쓰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노인의 강맹한 공격도 순식간에 검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상태로 노인을 향해 검이 뻗어졌다.
카가강 카가강.
벼락이 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구양운의 검을 노인의 호신강기가 막으면서 이러한 소리를 자아냈다.
호신강기는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았다.
노인이 구양운을 향해 다급하게 쌍수를 뻗었다.
퍼어엉.
노인은 손에 수투조차 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양운의 검을 맨 손으로 막아 냈다.
허공에서 몇 번의 힘겨루기를 했으나 결국 구양운이 한 발자국 물러섰다.
다시 거리를 벌리고 둘은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노인은 양손에 모았던 내기를 다스리며 구양운을 보았다.
“어린놈이 제법이구나.”
구양운은 노인의 말에 피식 웃었다.
“이게 다라고 생각하면 곤란한데 말이죠.”
구양운의 손에 들린 장검은 이미 군데군데 시커멓게 독으로 인해 변질되어 있었다.
독장을 쓰는 노인은 까다로웠다.
더군다나 구양운이 신경 써야 할 것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구양운은 사풍단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원진을 해제하고, 방진(方陣)을 취한다.”
이렇게 급박한 싸움 속에서도 곁눈질로 사풍단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사풍단이 전멸한다면 구양운이 몸을 드러낸 이유도 사라진다.
원진이 둥그렇게 모여서 서로를 보호하는 방어진이라 한다면, 방진은 옆이나 뒤로 공격해 올 때도 안정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방진은 두 개의 네모가 진 진형인데 안쪽 네모는 지휘함을 보호하는 것이고, 바깥 진은 실제 전투에서 제 역할을 다하는 임무를 띠었다.
구양운의 목소리를 들은 유호광이 서둘러 큰소리로 외쳤다.
“방진으로 진형을 바꾼다!”
그 소리는 사풍단원 모두에게 똑똑히 들렸다.
순간 무질서했던 사풍단원들은 순식간에 방진을 취하기 시작했다.
중앙 네모 진에서 유호광을 보호하며 바깥 네모 진을 형성한 단원들이 흑의인들을 상대했다.
안정적인 위치에 취한 유호광은 처음처럼 다시 사풍단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진 안에 있는 유호광은 쉽게 공격할 수가 없었다.
흑의인들을 상대하기 까다로웠던 것 중 하나가 사술처럼 그들이 여럿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는데 방진을 취하니 눈이 현혹됨을 훨씬 막아 주었다.
“네 목숨이나 챙기어라!”
노인이 크게 호통을 치며 육장으로 구양운의 몸을 가격하려고 했다.
구양운이 몸을 회전시켜 공격을 피하니 노인의 손바닥이 바닥에 닿아 땅이 움푹 파였다.
노인의 기세가 점점 매서워졌다.
‘이 상태론 오래 버티지 못한다.’
구양운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노인은 내력이 남아도는지 강맹한 공격들을 연달아 펼쳤지만, 반대로 구양운의 몸에선 이미 독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살수의 검으로 노인을 상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구양운은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사풍단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다. 이곳에서 구양운의 진면목을 보인다면 틀림없이 차후에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런 구양운의 생각은 십영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구양운이 사풍단 때문에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을 내내 지켜보았던 십영이 모를 리 없었다.
천마총까지 구양운을 감시하는 것이 십영의 임무였지만, 결과적으로 구양운이 위기에 처한다면 도와줄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십영은 소맷자락 안에 있는 흑무미리구(黑霧迷離球)를 손에 쥐었다.
흑무미리구는 마교에서 사용하는 연막탄(煙幕彈)으로 폭발하면서 짙은 연기를 내뿜도록 된 폭탄이었다.
십영은 어쩌면 구양운이 몸을 드러낸 순간 이미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괴물 같은 사내는……’
십영은 주저 없이 노인을 향해 흑무미리구를 던졌다.
카앙!
폭발 소리와 함께 짙은 회색빛깔의 연기가 노인과 구양운 주위에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이 정도에 지지 않는다는 걸 잊을 뻔했어.’
만약에 구양운이 위협을 받았다면 십영은 어쩔 수 없이 몸을 드러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방심하지 않는다 생각했지만, 그것은 십영의 착각이었다.
그동안 너무나도 강해진 자신의 무위에 저 사내의 위험함을 잠시 잊었다.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구양운은 결코 이기지 못할 거라고 단정 지어 버렸다.
이제는 흑무미리구가 구양운만의 무대를 만들어 줄 것이다.
‘마무리만 남았나.’
십영의 시선은 연기 속으로 향했다.
노인은 주변을 메우는 연기에 비웃음을 흘렸다.
“고작 이런 것으로 내 눈을 현혹하려 하다니 가소롭구나.”
노인은 다시 한 번 양손에 기운을 가득 담았다.
이 정도면 구양운을 충분히 날려 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구양운의 기척이 잡히지 않는다.
순간 노인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사사삭.
구양운의 미세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이 그곳을 향해 쏜살같이 손을 뻗었다.
노인의 손 안에 모였던 기가 분출되어 나갔다.
쿠우웅.
바닥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며 그 자리에 연기가 걷혔지만 구양운은 없다.
“저를 찾으십니까?”
마침 구양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사방으로 퍼지는 목소리는 도통 위치를 잡을 수가 없다.
그때였다.
쉬이이잉.
허공을 날카롭게 가르는 기를 감지하고 노인은 그 방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역시나 구양운의 검이 자신을 향해 쏘아졌다.
‘막았다!’
라고 생각한 순간 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령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싸움 방식이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넘치는 위화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노인은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이런 공격이 몇 차례 지속되었다.
“놈!”
분에 찬 노인의 소리 질렀다.
결코 연기가 시야를 가려서가 아니었다. 구양운의 기척이 너무나도 묘연했다.
그때 구양운이 바로 눈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노인은 이때다 싶었다.
“꼬마야, 오래 놀아줄 수가 없겠구나.”
쥐새끼처럼 잡았다 하면 사라지는 구양운을 한 번에 보내 버릴 심산으로 노인은 온몸의 내기를 다 모아 내질렀다.
녹색이었던 장력이 검붉은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구양운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와 동시에 구양운의 신형이 흔들렸다.
노인은 이미 예상을 했던 터라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구양운이 움직이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크아아앙!
분명 구양운이 자신의 일격에 절명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였다.
“노인장, 어디를 보고 계십니까?”
숨소리가 귓가에 닿을 만큼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노인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도대체 언제…….’
구양운의 검이 노인에게 한일(一)자로 그어졌다.
환검이라는 구양운의 검법과 전혀 다르게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이는 한 수였다.
서걱.
순식간에 노인의 머리가 분리되어 떨어졌다.
만검환영살(萬劍幻影殺).
무수히 많은 변화를 가지고 있어 도리어 단조로워 보이는 묵성환영검의 마지막 초식이 펼쳐진 것이다.
뎅구르르르.
노인의 머리통이 바닥에 떨어지고 난 다음에도 노인의 입가는 부들부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십영의 흑무미리구가 만들어 준 연기가 걷혔다.
가장 먼저 사풍단원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잘려진 노인의 목이었다.
“와아아아아!”
사풍단에서 환호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광경을 본 흑의인들은 서둘러 서로 눈짓을 맞췄다.
자신들을 이끄는 수장이 죽었지만 그들의 임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그리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동시에 공격을 펼쳤다.
‘끝낸다.’
그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어차피 노인이 움직이지 않아도 열세로 몰렸던 사풍단이다. 흑의인들이 총공격을 퍼붓자 그나마 버티던 사풍단원들이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쓰러져 갔다.
그때.
“이노오오옴!”
사자후가 온 산을 울렸다.
갑작스런 외침에 모두 고막이 터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 소리의 범인은 순식간에 눈앞에 등장했다.
핏빛같이 새빨간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는 자.
부리부리한 눈에서 살기가 진득하게 감돌았다.
그 중년인은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투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바닥에 처참하게 죽어 있는 시체들을 보면서 순간 낯빛이 시커멓게 변했다.
그의 두 눈이 쉴 새 없이 두리번거리다가 어느 한 곳에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검을 휘두르고 있는 전문통이 서 있었다.
“문, 문통아!”
그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갑자기 등장한 괴인의 새빨간 머리칼을 보자마자 유호광의 뇌리에 스치는 건 하나뿐이었다.
“전 장로님!”
적발귀 전등양.
야수대 전원을 이끌고 드디어 전등양이 도착한 것이다.
전문통 역시 전등양을 바라보았다.
둘이서 눈이 마주치자 전등양은 감격한 마음에 쏜살같이 달려와 전문통을 안았다.
“우리 손자, 다친 데는 없느냐?”
“할아버지…….”
정신없는 난전이었지만, 따스한 말투에 전문통은 푸근해짐을 느꼈다.
“그것보다 할아버지, 군영이가……!”
전문통의 시선은 자연스레 목이 잘린 노인에게 향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저곳에 구양운이 서 있었다.
“어? 군영이가 어디 갔지?”
자욱했던 연기는 사라졌지만, 구양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한 자락의 바람이 지나갈 뿐이었다.





五.개방의 당주 정려군(程麗君)



북쪽은 사천 서쪽은 운남, 남쪽은 광서, 동쪽은 호남과 각각 인접해 있는 귀주성의 한 마을이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며칠째 폭우가 쏟아졌다.
비 때문인지 이른 시각이었음에도 해가 금방이라도 질 것 같은 어두운 날이었다.
죽립을 깊게 눌러쓴 사내가 그 길을 느릿한 걸음걸이로 걸었다. 한참을 걷는 듯싶더니 어느 한 곳에 다다라서 걸음이 멈췄다.
사내는 죽립을 비켜들고 앞을 보았다.
바로 앞은 대장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