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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마도 1권 (13화)


콰앙! 콰아앙!
안에서 망치질 하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사내의 걸음이 다시 대장간 안으로 향했다.
뜨겁게 불타는 용광로 덕에 대장간 안은 뜨거운 열기로 후끈했다.
대장장이는 죽립을 쓴 사내를 힐끔 보며 물었다.
“필요한 게 있으쇼?”
“조(爪)를 하나 찾고 있는데……”
“조라면 저쪽 벽에 대충 있으니 하나 대충 골라 가쇼.”
사내는 대장장이의 말대로 벽에 걸려 있는 조들을 한 번 훑었다. 하지만 사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평범한 물건들이 아니었다.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런 것 말고. 날의 길이는 일반 조의 삼분지 일, 그리고 그 칼날은 안쪽으로 크게 휘었으면 좋겠군요.”
“삼분지 일 말이오?”
대장장이가 손에 들고 있던 망치를 내려놓으며 사내를 바라봤다. 조라는 것은 다른 병기처럼 사람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나타난 사내가 주문하는 건 조라고 말하기도 우습다. 삼분지 일이라면 날의 길이가 고작 한 뼘밖에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칼날이 안쪽으로 크게 휜다면 병기로서의 가치는 더 떨어진다.
대장장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오만, 그런 물건을 어디다가 쓰려고 그러시오?”
대장장이의 질문에 사내는 말없이 품속에 전낭(錢囊)을 꺼내 놓았다.
쿠웅!
전낭이 내는 소리가 묵직했다.
“……!”
그것을 본 대장장이는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대장장이는 저 묵직한 소리가 내는 의미를 모르는 바보가 아니었다. 저 전낭 안을 상상하며 잠시 넋을 놓고 있을 때 사내가 다시 말했다.
“언제쯤 완성이 됩니까?”
“사나흘은 되야…….”
사내는 대장장이의 말을 잘랐다.
“이틀 후에 오죠.”
대장장이는 사내의 말에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의 돈이라면 빠듯한 시간이긴 하지만 못 만들 것도 없었다.
할 일을 마친 사내가 다시 몸을 돌렸다.
대장장이는 돈이 많아 보이는 손님에게 급히 인사를 날렸다.
“살펴 가쇼.”
밖은 여전히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대장간을 나온 사내가 다시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그때였다.
타악.
사내에게 무언가 부딪쳐 왔다.
“아앗.”
그리고 이어지는 여인의 목소리.
한 여인이 급히 뛰어오면서 사내에게 부딪친 것이다.
갑작스럽게 부딪치는 바람에 사내의 머리 위에 쓰고 있던 죽립이 땅에 떨어졌다.
죽립이 벗겨진 사내는 바로 구양운이었다.
“괜찮아요?”
부딪친 여인이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어왔다.
구양운은 비가 뭍은 어깨를 툭툭 털며 다시 죽립을 주워들었다.
“괜찮소.”
구양운이 짧게 답하며 무심코 여인을 보았다.
여인과 눈이 마주치자 그 눈동자에 구양운의 모습이 투영(投影)되어 보였다. 총기가 흐르는 새까만 눈동자는 구양운을 직시하고 있었다.
여인의 외모는 가히 천하절색(天下絶色)이었다.
거지나 입을 법한 허름한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지만, 그것이 여인의 아름다움을 가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칠흑같이 긴 머리를 늘어뜨린 꾸미지 않은 모습이 더 신비로워 보였다.
“다행이네요.”
여인은 흰 치아를 보이며 사내처럼 호방하게 웃었다.
구양운은 그런 여인을 힐끔 보고 다시 죽립을 깊게 눌러썼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어딘가로 걸었다.
여인을 두고 한참을 걸어가던 구양운의 입가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개방인가.’
구양운이 암영대로 활동했을 때 개방의 정보망으로 추정되는 곳들을 발견한 적이 있다.
그중의 한 곳이 바로 저 대장간이다.
때마침 천마총으로 떠나야 하는 시기와 맞물려 보고조차 하지 못했던 기억은 생생했다.
구양운은 이미 오는 길에 많은 미끼를 뿌려 놓았다.
‘드디어 따라붙나 보군.’
구양운의 희미했던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쏟아지는 비에 죽립을 더 깊이 눌러쓰며 구양운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멀어지는 구양운의 뒷모습을 여인이 슬쩍 바라봤다.
여인의 눈동자에서 묘한 기운이 흘렀다.
‘저자인가.’
여인은 이내 성큼성큼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어.”
여인의 맑은 목소리에 대장장이는 하던 일을 멈추고 여인에게 와서 포권을 취했다.
“비취당(飛鷲堂)의 당주님을 뵙니다.”
여인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대장장이에게 물었다.
“방금 전에 나간 자가 뭘 주문했지?”
“특이한 모양의 조(爪)를 주문했습니다.”
“특이한 모양의 조?”
“네. 길이가 아주 짧고, 칼날은 안쪽으로 휘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대장장이의 말을 들은 여인은 손가락으로 의자를 툭툭 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마교의 무력 부대가 호남성에서 전멸되다시피 했다.
그 사건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호남 근처에 있었던 개방의 비취당이 움직인 것이다.
조사를 시작하며 호남성 부근의 정보를 모두 모으기 시작했는데 그때 마침 정보망에 걸린 게 저 사내였다.
‘참 이상해.’
사내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병기들을 곳곳에 대장간에 주문했다. 더군다나 그곳들은 우연의 일치인지 개방의 숨겨진 지점들이었다.
개방의 정보망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이건 그 수준을 넘어선다. 흡사 자신을 쫓아오라고 흔적을 남기는 듯한 느낌이다.
사내가 나타난 곳을 되짚어 생각해 보면 마교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농후한데……

도대체 왜?
어디로 가고 있기에.
여인이 한참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대장장이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차를 들고 와 여인의 옆에 두었다.
“당주님, 차라도 드세요.”
“특이한 모양의 조(爪), 삭(索) 그리고 갑(鉀)까지…… 대체 이 많은 것들을 어디다가 쓰려는 걸까?”
여인의 말에 대장장이는 잠시 곰곰이 고민하는 듯싶더니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무림의 쌍봉(雙鳳)이라 칭해지는 당주님이 모르는 걸 제가 어찌 압니까?”
당금 무림은 제갈세가의 제갈수란(諸葛秀卵)과 개방의 정려군(程麗君)을 두고 지색을 겸비하였다고 하여 쌍봉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정려군은 그 소리에 개구지게 웃었다.
“입 바른 소리.”
비를 많이 맞은 정려군은 뜨거운 차를 양손에 쥐며 음미했다.
혹시 잘못 짚은 건 아닌가도 생각했다.
수상한 사내였지만 그에게 정보의 초점을 맞출 만큼 중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 사내의 행동은 묘하게 정려군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사내는 물건을 주문하고 한참의 길을 간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와 물건을 되찾고 길을 간다.
중간에 쉬는 법이 없었다.
왜라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결국 직접 만나기 위해 그동안의 방식에 맞춰서 가장 유력한 대장간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더 강한 의구심뿐 알아낸 것은 없었다.
정려군은 풀리지 않는 생각의 실타래를 잠시 접었다.
‘어차피 조금만 기다리면 알게 되겠지.’
사내가 가는 방향을 미루어 보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어디를 향하는지에 대한 예상 목표 지점이 나올 것이다.
그럼 그때 다시 생각해도 늦지 않을 일.
지금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할 때였다.
“그런데 말이야.”
정려군의 목소리에 대장장이의 시선이 향했다.
“뭘 말입니까?”
정려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손가락으로 대장장이의 품속을 가리켰다.
“그거 뭐야?”
구양운이 주고 간 전낭이었다.
대장장이는 냉큼 손으로 그 부위를 가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요.”
“수상한데?”
대장장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졌다.
“뭐, 뭐가 말입니까?”
정려군이 손으로 턱을 괴며 물끄러미 대장장이를 쳐다보았다.
“절반 어때?”
대장장이는 크게 도리질 치며 말했다.
“저, 절반이라뇨. 저는 집에 처자식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 제 노동의 대가입니다 당주님.”
대장장이의 말에 정려군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역시나 그렇군.”
대장장이의 표정은 거의 울상으로 변했다.

구양운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어느 한 객잔이었다.
눈앞의 객잔의 문은 닫혀 있었다.
안에서 비춰 오는 불빛도 없었고, 왁자지껄한 손님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미 손님을 받기에는 너무 늦은 밤이었다.
구양운은 개의치 않고 문을 두 번 두드렸다.
탁탁.
아주 작은 인기척이었지만, 금세 점소이가 나와서 구양운을 맞았다.
“손님, 방 다 찼는데요.”
“그곳에서 왔다.”
“아…….”
점소이는 구양운의 말을 듣고 작게 탄성했다.
깊은 잠에 들지도 못하고 늦은 밤까지 기다리던 이유가 드디어 찾아온 것이다.
점소이는 곁눈질로 구양운의 눈치만 볼 뿐 말을 아꼈다.
둘 사이에는 어서 오십쇼라는 지극히 평범한 인사조차 없었다.
이곳은 평범한 객잔이 아닌 정확하게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오늘 구양운이 묵어야 할 곳이다.
타박타박.
구양운은 점소이가 안내해 주는 대로 뒤따라 걷고 있었다. 점소이는 이층의 한 별채로 구양운을 안내했다.
그리고 구양운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곤 사라졌다.
구양운도 별다른 말없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잠깐 훑어보았을 뿐이지만 무척이나 호사스러운 곳이다.
다탁 위에는 구양운을 위해 차려진 음식들과 씻을 수 있는 물까지 많은 게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구양운은 모두 제쳐 두고 지친 듯 침상 위에 몸을 뉘였다.
“쿨럭쿨럭.”
잦은 기침을 해대자 입안 가득히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독 기운이다.
사풍단을 습격했던 노인과의 결투에서 당한 독은 아직 해독되지 않았다.
누워서 잠시 천장을 바라보던 구양운이 몸을 세웠다.
언제 나타났는지 십영은 의자에 앉아 구양운과 마주보고 있었다.
“이제는 숨지도 않는군.”
“독을 방치해 두는 건 위험한 짓이에요.”
무미건조한 십영의 목소리에 구양운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입만 열면 항상 죽는다거나 위험하다는 말뿐이군.”
십영은 구양운의 비웃음 섞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품에서 단알 하나를 꺼내 놓을 뿐이었다.
구유수라마검을 회수할 때까지 십영에게 구양운의 안위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만 가라.”
하지만 구양운은 십영의 친절이 달갑지 않았다.
“교의 신단(神丹)이에요. 독 기운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거예요.”
십영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몸을 감췄다. 물론 십영이 구양운을 두고 멀리 갈 리는 없다.
구양운은 일으켰던 몸을 다시 침상에 기대었다.
두 눈을 감으니 며칠 전의 일이 회상됐다.
사풍단이 습격받던 날, 구양운은 노인의 독에 큰 내상을 입었다.
십영의 내력으로 구양운의 독을 누르는데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빠르게 회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게 싫었다.
자신의 나약함이.
‘아직도 부족해.’
아무런 변화 없이 천마총에 들어간다는 것은 십 년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동료였던 암영대원 모두를 잃고 살아온 길이다.
수십 명의 동료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암영대주 얼굴이 떠오르며 구양운이 다시 눈을 떴다.
‘구양운, 살아남아라!’
암영대주의 피맺힌 외침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구양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십영이 두고 간 신단을 입에 넣었다.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신단은 물처럼 녹아 몸 안으로 들어갔다.
구양운은 침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눈을 감자 지긋지긋했던 무저갱의 어둠이 자신을 친숙하게 찾아왔다.
구양운이 나약해지려 할 때마다 암영대의 대원들은 환영처럼 그에게 나타났다.
‘거긴 편한가?’
지금껏 구양운은 그들에게 수백 번을 물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조용한 메아리처럼 구양운의 마음속을 울릴 뿐이었다.
구양운은 그렇게 몸 안의 독 기운을 몰아내는데 전념했다.
몸이 편안해진다고 느끼며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떠오르고 난 후였다.
구양운은 방을 나서서 일층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