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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마도 1권 (14화)
평범한 객잔처럼 시끌벅적하게 밥을 먹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구양운은 그중에 전망이 좋은 곳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금세 점소이가 구양운에게 뛰어왔다.
“아, 일어나셨습니까? 식사는 뭐로 드릴까요?”
말을 걸면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점소이는 어젯밤 구양운에게 방을 안내해 준 소년이었다.
“자신 있는 요리 아무거나.”
“예에, 조금만 기다리십쇼.”
점소이는 쏜살같이 달려가 뭐라고 주문을 하는 것 같더니 금세 다른 손님을 맞으러 사라졌다.
구양운이 잠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그때였다.
“여기 동석해도 되죠?”
맑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구양운의 앞에는 대장간 앞에서 부딪쳤던 여인이 서 있었다.
구양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다른 자리도 많은데 굳이 이 자리일 필요가 있소?”
“전망이 좋은 게 마음에 드네요.”
여인은 주저하지 않고 구양운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직 대답하지 않았소만?”
“우리 통성명이나 하죠?”
여인은 구양운의 말을 듣지 않고 있는 듯했다.
“정려군이라고 해요.”
구양운이 대꾸하지 않고 물끄러미 정려군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자 그녀가 되물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그건 아니오.”
때마침 점소이가 양손 가득 음식을 들고 왔다.
음식을 모두 차려 놓으니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정려군이 점소이가 다른 곳으로 사라지자 구양운에게 말했다.
“배고픈데 우선 먹으면서 얘기해요.”
구양운이 뭐라고 대꾸도 하기 전에 정려군은 음식을 마구잡이로 집어먹기 시작했다. 같이 먹자고 권하지 않았음에도 정려군은 거리낌이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가녀린 몸매를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녀의 식성은 대단했다.
한참을 정신없이 먹던 정려군이 고개를 들어 구양운을 바라보았다.
“역시 술이 없으니 허전하네요.”
정려군은 손짓으로 점소이를 불렀다.
“네에, 뭐 더 필요하신 게 있으세요?”
“죽엽청 한 병 부탁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엽청이 두 사람 앞에 놓여졌다.
정려군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한잔을 먼저 입안에 털어 넣으며 웃었다.
“크, 역시 좋네요.”
선녀같이 생긴 정려군이 웃으니 꽃이 만개하는 듯했다.
이미 객잔 안에서도 정려군의 아름다움에 취해 사방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오직 본인만 모르는 듯했다.
“이름이 뭐예요?”
스스럼없이 물어오는 솔직함이 왠지 싫지 않았다.
“구양운.”
“소협, 좋은 음식과 술을 대접 받았으니 제가 한잔 따라드리죠.”
“주인의 허락 없는 대접이라……”
구양운의 어이가 없는 듯 실소했다.
정려군은 술잔에 술은 가득 따라 구양운에게 내밀었다.
구양운이 잔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자 정려군은 내력을 담아 구양운을 향해 잔을 날렸다.
술이 가득 채워진 잔은 술 한 방울 떨어지지 않은 채 구양운을 향해 암기처럼 다가왔다.
결코 내력이 부족하면 할 수 없는 수법이었다.
구양운이 그 술잔을 가볍게 잡아채 입가로 가져갔다.
약하게만 부딪쳐도 술이 흐를 것만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양운은 단 한 방울의 술도 흘리지 않았다.
정려군의 눈에는 이채가 흘렸다.
‘제법인데?’
구양운이 술잔을 들이키면서 슬쩍 정려군을 바라보았다.
개방이 자신에게 접근할 방법은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재밌군.’
“술이 모자란 거 같네요.”
정려군이 다시 손짓으로 점소이를 불러 술을 더 달라고 하자 금세 술 단지가 두 사람 앞에 놓여졌다.
술 단지는 술을 담아 저장하는데 쓰는 큰 그릇으로 그릇의 아래위가 좁고 배가 불룩 나왔다.
그 커다란 술 단지를 앞에 두니 상이 꽉 차 보였다.
“다 비울 수 있겠소?”
구양운은 술 단지를 슬쩍 바라보며 잔을 들이켰다.
“없어서 못 먹지, 저는 있으면 잘 먹어요.”
정려군이 자신 있게 웃어 보였다.
후두둑 후두둑.
둘이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 다시 귀주에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씩 떨어지는 것 같더니 금세 어제와 같은 장대비가 쏟아졌다.
“이런, 날씨조차도 술을 먹으라고 권유하네요.”
두 사람은 결국 작은 술잔을 버리고 넓적한 대접에다가 술을 담아서 마셨다.
커다란 술 단지에 비해서 술잔은 너무 작았다.
두 사람이 말없이 술을 기울이자 떨어지는 빗소리만이 시원하게 들려왔다.
먼저 입을 뗀 것은 구양운이었다.
“접근한 목적이 뭐요?”
핵심을 찌르는 구양운의 말에 정려군의 손끝이 살짝 떨려왔다. 자신이 대화를 주도한다고 생각했는데, 구양운이 정곡을 찌른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정려군의 표정 변화는 없었다.
“대장간에 소협이 특이한 무기를 주문하는 걸 봤어요. 이런 물건들이 어디에 필요할까 궁금증이 일더군요.”
말을 하는 정려군의 눈동자가 순간 번뜩였다.
그동안의 정황을 살펴보고 고민한 결과 일부러 개방을 유인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찾아온 것이다.
“본인의 궁금증을 가장 쉬운 방법으로 알아내려는 것 같소만?”
“호호, 그런가요.”
정려군은 멋쩍은 듯이 웃었다.
사실이었다.
직접 만나면 많은 것을 알아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왔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대화로 봐선 무엇 하나 말해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소협의 이름이 구양운이라는 것은 알았네요.”
구양운은 그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슬슬 일어나야겠소.”
구양운이 말에 정려군이 남은 술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까운 술만 남기게 되었네요.”
정려군은 허리춤에 묶어 놓은 술병을 풀고, 단지에 남아 있는 술을 술병에 가득 담았다.
다시 허리춤에 묶으려는 행동을 멈추고 구양운을 쳐다봤다.
“이건 식사의 보답으로 드릴게요.”
술을 가득 담은 술병을 건네자 구양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됐소. 술을 즐기지 않아서.”
“칫, 재미없는 분이군요.”
정려군은 다시 술병을 허리춤에 묶었다. 그녀는 항상 술을 채워서 가지고 다니는 듯했다.
“그럼.”
정려군이 먼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구양운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술기운에 잠시 휘청거린다고 느꼈지만, 내공으로 그 기운을 태워 버리진 않았다.
취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재미없다라…….’
구양운은 혼자 실소를 머금었다.
항상 임무를 위해 움직였기 때문에 술을 즐길 여유 따윈 없었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구양운은 휘적휘적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방 안에는 십영이 앉아서 구양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구양운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정려군이 등장하면서부터 예상했던 바다.
“무슨 일이지?”
구양운은 태연하게 물었다.
“정려군…… 어떤 여인인지 아시나요?”
“글쎄, 내가 알아야 하나?”
“무림의 쌍봉으로 칭송받는 개방의 정려군은 모르는 자는 없어요. 아주 똑똑한 여인이지요.”
“흐음, 술자리를 너무 빨리 일어섰나.”
천연덕스럽게 농담을 하는 구양운을 보고 처음으로 십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수상한 무기들이 천마총에서 정말 필요한 게 맞나요? 일부러 뒤를 쫓아오게 한 거라면……”
“그러는 너는 누구냐?”
구양운이 으르렁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노인과의 싸움에서 십영이 흑무미리구로 구양운을 도왔을 때부터 그 위화감을 버리지 못했다.
암영대의 싸움 방식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듯한 행동이었다.
구양운은 십영을 노려보며 다시 말했다.
“흑무미리구는 암영대가 개발해 낸 전유물(專有物) 중 하나지. 그것을 지니고 있는 이유부터 말해 보시지.”
“…….”
구양운의 말에 십영은 입을 닫았다.
이공자의 꼭두각시와 길게 얘기하고 싶은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내 앞에서 사라져라.”
구양운은 십영에게서 돌아섰다.
바깥으로 막 나가려는 찰나 십영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누구인지가 중요한가요?”
스르륵.
옷자락이 부대끼는 소리에 구양운은 다시 뒤돌아보았다.
처음으로 십영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복면을 풀었다.
먹물로 그린 듯한 고운 아미와 선해 보이는 눈망울이 한눈에 들어왔다.
미인도(美人圖).
한 폭의 미인도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아름다운 여인이 구양운이 앞에 서 있었다.
구양운은 잠시 십영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십영이 아름다워서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딘가에서 본 듯한 얼굴 때문이었다.
“너는…….”
구양운의 말끝이 점점 흐려졌다.
십영의 얼굴 언저리에 남아 있는 소녀의 얼굴이 보였다.
조그맣던 소녀가 지금은 어떻게 지낼지 궁금했던 적도 있었다.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찾아가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만남은 결코 생각한 적 없었다.
아니, 이런 식의 만남은 결코 있어선 안 되었다.
“저에요. 교일지(喬一芝).”
십영의 청아한 목소리가 구양운의 가슴에 꽂혔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것이냐?”
구양운의 눈빛은 복잡했다.
교일지라면 당연히 암영대의 싸움 방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암영대주 교단생(喬端生)의 딸이다.
“살수의 딸이 살수가 되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인가요?”
오히려 침착한 교일지의 목소리에 구양운은 마음이 더 복잡했다.
“암영대의 결말을 알고 하는 소리냐?”
“그것이 중요한가요? 어차피 우리들은 임무를 수행하는 자. 죽는 일은 다반사 아니던가요?”
“그게 다가 아니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구양운은 막막했다.
마치 천마총에 들어가기 전 구양운 자신과 판 박은 듯한 모습이 서 있었다.
“전 오라버니가 마교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이번 일에 정파까지 끌어들이려고 한다면 그것을 간과(看過)하진 않을 거예요.”
파앗.
십영은 그 말을 마치고 홀연히 기척을 감췄다. 더 이상 구양운과 말을 섞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터라 구양운은 그저 말없이 교일지가 서 있던 자리를 보았다.
천마총으로 들어가고부터 한 관문을 지날 때마다 암영대원들은 몇 명, 혹은 수십이 죽어 나갔다.
마지막까지 살아 있었던 것은 오직 암영대주 교단생과 자신뿐이었다.
어떻게 살아남았냐고 묻는다면.
교단생의 목숨을 두고 오는 벌로 살아남았다고밖에는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러므로 교일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구양운에게 적지 않았다.
다만 몸이 무저갱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던 것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찾는다 하더라도 그 아이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소녀가 저토록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받아 올 걸 그랬나?”
구양운은 혼자 조용하게 읊조렸다.
술기운을 내공으로 날리진 않았지만, 이미 취기가 다 사라져 버렸다.
아까 정려군이 내밀던 술이 문득 아쉬웠다.
六.마교의 귀살각(鬼殺閣)
저벅저벅.
한 사내가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걷고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매에 구릿빛 피부가 매력적인 자다.
그의 뒷모습에는 검은색의 비단 위로 화려하게 수놓아진 흑룡(黑龍)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는 바로 마교 대공자 사공강이었다.
사공강은 아름다운 정원을 지나 커다란 문 앞에 몸을 세웠다. 그의 눈앞에는 가히 황궁에 버금갈 만한 화려한 전각이 우뚝 서 있었다.
사공강은 그 앞에 서서 잠시 기다렸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사공강을 보고 큰 목소리로 안에 고했다.
“대공자님이 오셨습니다.”
잠시 흐르는 정적.
그리고 안에서의 곧 목소리가 이어져 들려왔다.
“들어오라.”
문을 지키고 있던 양 쪽의 문지기들이 문을 열자 사공강이 막 안으로 들어가려고 걸음을 떼었다.
그때였다.
대전 안에서 아름다운 한 여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화려한 장신구들로 온몸을 치장한 여인은 아름다웠다.
그 누구라도 이 여인을 본다면 단번에 미인이라고 칭했을 것이다.
스르륵스르륵.
붉은색의 긴 궁장이 부대끼는 소리가 나며 여인은 사공강에게 점점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참으로 요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