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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마도 1권 (15화)


사공강의 표정이 슬쩍 구겨졌지만 이내 그런 표정을 지웠다.
사공강은 눈앞의 여인에게 가볍게 예를 취하며 말했다.
“어머니를 뵙습니다.”
사공강은 슬쩍 여인의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숙임으로 여인의 치맛자락 안으로 언뜻 보이는 당혜(唐鞋:신발)를 볼 뿐이었다.
여인은 바로 마교 대장로 악불위(岳不位)의 딸이자 이 거대한 마교의 안주인인 악비영(岳比英)이었다.
한때 마교제일미(魔敎第一美)라 불렸던 그녀의 외모는 아직도 이십대 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이구나.”
그윽한 악비영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하지만 사공강을 바라보는 표정은 목소리와 정반대였다. 악비영의 눈빛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독사처럼 표독스럽게 빛났다.
악비영은 자신의 뒤편에 있는 자들을 의식한 듯 다시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주 얼굴도 보고 그러자꾸나. 그나저나 급히 이곳을 찾아온 듯한데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게냐?”
“어머니께서 신경 쓰실 정도로 큰일은 아닙니다.”
“그래?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어미에게도 이야기하거라. 너도 내 자식이지 않니.”
“그리하도록 하지요. 전 잠시 아버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담에 찾아 뵙지요.”
부드러운 말들이 오갔지만 그 안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 둘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사공강이 대전을 향해 발걸음을 놀렸다.
둘이 마주치는 짧은 순간이었다.
악비영의 가시 돋친 목소리가 사공강에게 속삭이듯 들려왔다.
“천한 놈.”
순간 사공강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자신을 지나치는 악비영의 뒷모습을 한 번 흘겨보았다.
악비영은 여전히 느긋한 걸음으로 전각을 빠져나갈 뿐이었다.
‘어머니, 당신은 오래 사셔야 합니다.’
사공강은 다시 정면을 보며 성큼성큼 나아갔다.
‘제가 교주가 되는 날…… 평생을 뒷방에서 눈치나 보는 늙은이로 살아가게 만들어 드리죠.’
사공강이 피식 웃었다.
사공강이 걸어가는 길의 끝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의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거대한 흑룡이 가슴에 수놓아진 중년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마교 교주 사공영호(司空靈昊).
그저 앉아 있을 뿐임에도 사공영호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주변을 압도하는 기백이 느껴졌다.
사공강이 그 앞에 다다라 예를 취하려 하자 사공영호가 손을 휘저었다.
“되었다. 명한 것은 알아보았느냐?”
절대자라는 사공영호도 자신의 아들 사공강을 보는 눈빛은 따뜻했다.
“네, 아버지. 은밀하게 대화하고 싶습니다.”
“사대 수신 호위들은 물러가라.”
사공영호의 근엄한 목소리가 대전 안에 울려 퍼졌다.
“충(忠)!”
분명 아무도 없는 대전 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외침이 들려왔다.
사공강이라 할지라도 이 목소리의 근원지가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교주만을 호위하는 이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말해 보거라.”
“은밀하게 알아본 결과 무저갱에 갇혀 있던 십육 호가 뒤바뀐 것 같습니다.”
“십육 호?”
“천마총에서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생존자입니다.”
사공강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천마총.
그 이름만으로도 지니고 있는 무게가 가볍지 않았다.
또한 불과 십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존자에 대한 기억은 어렴풋이 났다.
자신의 명으로 가둔 놈이었다.
고개를 치켜들고 똑바로 눈을 맞추던 도전적인 눈빛이 생각나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사람을 시켜 십육 호를 다시 잡아오게…….”
“아니다. 번거로울 필요 없지.”
사공영호는 아들 사공강의 말을 잘랐다.
사공영호는 이 거대한 마교의 절대자였다. 그는 쉽게 사람의 마음을 얻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흑사자 구양운.
그자는 심지가 곧은 자였다. 부러지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이미 마교를 배척한 이단아는 필요 없었다.
“죽여. 천마총에 대해 유일하게 알고 있는 놈이라 살려 두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가 없으면 천마총에 들어갈 방법을 알 수 없습니다, 아버지.”
천하제일의 검공 구유수라마검.
그것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자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마교의 절대무학이었다.
천하에 그 누가 이 검공을 탐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공영호가 말했다.
“강아, 구유수라마검이 없더라도 마교는 이미 강하다. 그리고 내가 가지지 못할 바엔 천하에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하게 해야지.”
“충(忠)!”
사공강은 아버지인 사공영호의 앞에 부복했다.
가장 존경해 마지않는 아버지가 하는 말이기에 사공강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설령 사공영호가 어떤 말을 할지라도 사공강은 그것을 따를 것이다.
“네 어미는 구유수라마검을 욕심내기 보다는 그 검공이 가지고 있는 명분을 둘째한테 주고 싶은 것일 게다.”
“그럼 소자가 조용히 처리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귀살각(鬼殺閣)의 자들을 보내어 처리하도록 해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공강이 놀라운 표정으로 사공영호를 쳐다보았다.
귀살각(鬼殺閣).
마교 교주의 명만 받드는 암살 부대였다.
그들이 어디에 거주해 있는지,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도 의문으로, 무성한 소문의 무리가 거론된 것이다.
“그들도 바깥으로 나가 본 지 꽤 되었을 테지, 이 기회에 바람이나 쐬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사공강은 고개를 다시 숙임으로 명을 받들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우선 이 일은 기밀에 붙인다. 나중에 분명 쓸모가 있을 것이야.”
사공영호는 사공강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들아, 너는 나의 뒤를 이을 유일한 존재다. 다시 돌아오는 종금도를 맞이하는 것에 전념해라.”
사공강은 사공영호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스함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절대 아버지를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마교의 대장로라는 절대적인 외척 세력을 가지고 있는 사공악과 반대로 사공강을 받쳐 줄 세력이 부족했다.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 준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그날 밤.
열 개의 그림자가 은밀하게 마교를 빠져나왔다.
교주의 명으로 귀살각에 은거하던 자들이 드디어 움직인 것이다.
그 목표는 구양운이었다.

* * *

대장간에 의뢰한 조를 찾아온 구양운은 다시 길을 떠날 채비를 마쳤다. 막 객잔을 나서는 구양운의 눈에 정려군의 모습이 보였다.
정려군을 막 지나쳐 가려는 찰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흑사자 구양운?”
구양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정려군을 향하자 그녀는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십 년 전 무림에서 자취를 감춰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이런 곳에서 볼 줄은 몰랐네요.”
구양운의 이름을 알아 가더니 과연 개방답게 그의 정체를 파악해서 돌아온 것이다.
무림의 쌍봉으로 칭송받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똑똑한 여인일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구양운이 생각했던 것보다 일처리가 더 빨랐다.
“개방은 한가한가 보오.”
구양운이 무심한 눈빛을 거두며 말했다.
그 말에 정려군은 흥미롭다는 듯이 구양운을 쳐다보았다. 마치 자신처럼 구양운도 자신의 뒷조사를 했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소. 누구나 다 아는 이름이더군.”
그제야 정려군은 수긍하는 눈빛을 띄웠다.
구양운의 말이 사실이다. 정려군 스스로는 크게 자각하지 못했으나 쌍봉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드물었다.
구양운은 정려군에게 등을 돌려 그녀의 맞은편으로 길을 걸었다.
정려군이 질세라 뒤를 쫓아왔다.
구양운이 그 상태로 한참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려군은 말없이 졸졸 뒤따라왔다.
그것이 내심 거슬렸는지 구양운이 말했다.
“어디까지 쫓아올 참이오?”
“제가 가는 길과 방향이 같네요.”
“그렇소?”
구양운은 손을 내밀며 정려군에게 먼저 가라는 표현을 했다.
정려군은 되려 구양운에게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소협은 어디로 가는 건가요?”
“정 궁금하다면 내가 모르게 몰래 따라와 줬으면 좋겠는데…… 눈앞에서 자꾸 나타나면 거치적거려서 말이오.”
정려군은 애써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구양운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짐짝 취급받은 적은 처음이에요.”
“대접을 받기를 바라는 게 우습소만?”
정려군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멀뚱하게 구양운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구양운은 그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다가 다시 길을 걸었다. 애초에 정려군은 구양운이 길을 갈 때까지 걸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예상대로 금세 다시 뒤를 쫓아왔다.
“제 의문이 풀릴 때까지는 잠시 동행하겠어요.”
“아까는 가는 방향이라고 하지 않았소?”
“소협이 가는 곳이 제가 가야 할 방향이라서 말이죠.”
정려군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활짝 웃었다.
참으로 개방의 방도다운 행동이었다. 가끔은 막무가내이면서도 자신의 감정 표현이 자유로웠다.
정려군을 보면 여인이라는 것보다 자칫 사내를 상대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구양운은 정려군과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고 길을 걸었다.
어차피 개방을 끌어들인 것은 구양운이다.
이렇게 추적해 올 거라는 것은 예상 밖의 행동이었지만, 그 방식이 어떻든 구양운은 개방을 따돌릴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구양운에게는 개방의 힘이 필요했다.
무저갱을 나온 순간부터 살아남기 위해 많은 생각을 했던 구양운이다. 그 계획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개방이었다.
타닥타닥.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 일정하게 울려 퍼졌다.
둘은 이미 마을을 벗어나고 있었다.
구양운은 문득 발길을 잠시 멈추고 정려군을 보았다.
갑자기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다고 했소?”
“그래서 이리 쫓는 거지요.”
정려군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쉽게 수긍했다.
“내가 가는 곳은 천……”
쉬리릭.
구양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암기가 그를 노리고 발사되었다.
구양운이 살짝 몸을 비틀어 암기를 피했다.
타악.
목표물을 잃은 암기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나무기둥에 꽂혔다.
그 범인은 보나마나 십영이었다.
정파를 개입시키면 가만히 두고 보진 않겠다는 그녀의 경고가 표현된 것이다.
정려군은 구양운이 꺼낸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천?’
정려군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방해로 인해 중간에 말이 끊겼지만, 첫 마디의 말은 똑똑히 들렸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짐작 가는 곳이 딱히 없었다.
그리고 이내 구양운을 노린 자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정려군도 암기가 날아오는 것을 정확히 봤지만, 구양운을 죽이려고 했다기보다는 경고를 주려는 목적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재차 공격이 들어왔을 것이다.
“으음……”
정려군이 개방의 당주라는 자리는 도박으로 따낸 것이 아니었다.
후지기수 중에 정려군을 따라올 자는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목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 자가 지금 곁에 있는 것이다.
정려군은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구양운과 자신 둘이 아니라 동행하는 자는 셋이었다.
“한 명이 더 있었다니…… 확실히 재밌군요. 왠지 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을 것 같네요.”
“생각이 독특하군.”
구양운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실소를 머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기척을 잡을 수 없는 상대에게 공포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런데 정려군은 반대로 재미있다고 표현하니 참으로 독특하다 할 수 있었다.
구양운은 다시 걸음을 내디디며 암기가 날아온 방향을 힐끗 쳐다봤다.
십영은 자신이 교일지라고 정체를 밝힌 후로 구양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둘은 자연스럽게 침묵을 유지하는 상태였다.
구양운은 알게 모르게 미소를 띠며 다시 발걸음을 놀렸다.
정려군도 유유히 구양운의 뒷모습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쉬지 않고 길을 걸었다. 정려군은 농담으로라도 군소리 한마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구양운이 자신을 떼어 낼 생각이 없다는 것쯤은 간파한 상태였다.
흑사자라 불린 구양운의 과거 기록을 보았다.
구양운이 자신을 떼어 내려 했다면 분명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구양운은 그러지 않았다.
암묵적으로 동행을 허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