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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마도 1권 (16화)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분명 또 다른 일행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 괴한이 구양운을 공격한 것을 미루어 보아 자신이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정려군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조용하던 차에 구양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요즘 무림의 정세가 어떻소?”
구양운은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이 기회에 물어본 것이다.
정려군은 구양운의 말에 의문을 가졌다.
마치 오랜 시간 무림을 떠나 있던 자가 할 법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정려군은 구양운의 그 질문을 통해 한 가지 확실한 것을 알았다.
구양운이 오랜 시간 무림과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것.
순식간에 많은 생각을 한 정려군이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 말에 대답했다.
“공짜로 말해달란 소리는 아니죠?”
정려군이 웃으면서 묻자 구양운도 미련 없는 목소리가 대답했다.
“됐소.”
“에엣? 잠시 쉬어 간다면 말할게요.”
구양운의 시선이 힐끗 정려군을 향했다.
그녀는 실실 웃음을 쪼갰다.
구양운은 대꾸 없이 근처 나무 그늘 아래 몸을 기댔다. 그러자 정려군도 질세라 그늘 아래 앉아서 술로 목을 축였다.
“그런데 뭐가 궁금한 거죠?”
“현 무림맹주가 누구인지, 세력이 강한 곳이 어딘지.”
정려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 무림맹주는 구대문파에 속하지 않은 분이에요. 한 곳에 치우치지 않기 위함도 있었지만, 충분히 그 자리에 어울릴 만한 자격이 있는 분이시죠.”
구양운은 흥미롭게 그 말에 귀 기울였다.
“창천뇌검(蒼天雷劍) 진천무(鎭天武).”
구양운은 그 이름을 속으로 다시 한 번 되뇌었다.
그 이름은 구양운에게는 생소했다.
“뭐 그리고 여전히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정도무림의 기점이죠.”
“마교와의 세력 다툼은 없소?”
“글쎄요, 현재는 비등하다고 보고 있죠. 지금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니 어떻게 보면 평화로운 시기가 찾아왔다고 세간에서 말하죠.”
“당신이 보기엔?”
구양운의 날카로운 질문에 정려군은 순간 주춤했다.
하지만 이내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제 생각엔 폭풍전야죠.”
‘폭풍전야라…….’
척박한 땅에 있는 마교가 중원무림을 넘보지 않을 리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구양운이 잘 알았다.
“현재 무림은 마교 교주와 무림맹주 두 사람을 두고 이천(二天)이라 부르죠. 그리고 그 아래 마교의 오마(五魔)와 정도의 칠황(七皇)으로 나뉘죠.”
“오마와 칠황이라……”
“더 궁금한 건 없나요?”
“아니, 잘 들었소.”
정려군에게 들은 정보로도 그동안에 궁금증이 어느 정도는 풀렸다.
구양운은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쳇, 야박하게 말이 끝나자마자 가는 건가요?”
“이미 늦었소.”
구양운은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 뒤를 다시 정려군이 뒤쫓아 걸었다.
얼마 걷지 않아 구양운은 하늘에 떠있는 해를 쳐다보았다.
“이대론 늦겠군. 경공에 자신 있소?”
“갑자기 무슨……”
구양운이 정해진 날짜 안에 도착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정려군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파앗.
구양운은 정려군을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구양운이 무형잔영신법을 펼치자 그의 몸은 순식간에 앞으로 나아갔다.
“역시 심심할 틈이 없네.”
구양운의 뒷모습을 보며 정려군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놓칠세라 재빨리 구양운을 뒤쫓았다.
동년배에서 정려군의 경공 실력은 결코 뒤떨어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려군이 자신있어 하는 부분 중 하나였다.
열심히 따라간다고 발걸음을 쉬지 않고 놀렸지만, 거리가 좁혀지기는커녕 점점 멀어져만 갔다.
‘이러다 놓치겠어.’
정려군은 더 빠르게 발돋움했다.
장거리를 경공만으로 가는 것은 내공의 소모가 컸다.
결국 정려군이 속도가 점점 늦춰질 때쯤 구양운도 잠시 발을 멈췄다.
정려군은 가쁘게 차오르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속도를 맞춰줘서 친절하다 뭐 그런 말을 들을 거라 생각 하는 건 아니죠?”
정려군이 구양운을 가볍게 흘겨보며 말했다.
결코 정려군의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신법으로는 정려군이 구양운을 따라잡는다는 건 무리였다.
“그런 말은 기대도 안 하오만?”
구양운은 무심하게 맞받아쳤지만 꼭 정려군 때문에 속도를 늦춘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구양운의 체내에 남아 있는 독 때문이다.
구양운도 내공을 끌어 올릴수록 독을 자극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운신할 수 없었다.
“다시 출발하게 운기조식이라도 하시오.”
“이렇게 급하게 가는 곳이면 말을 타고 가는 게 낫지 않나요?”
“하긴, 중간중간에 들를 곳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지금은 말을 타는 것도 상관없을 듯하오.”
정려군은 자신의 의견이 반영된 것에 미소 지었다.
어디까지 가는지는 몰랐지만 이렇게 경공으로 가야 한다면 고생길이 훤했다.
“하지만 말을 산다고 해도 다음 마을까지는 이대로 가야 하오.”
정려군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중에서 말을 살 수 없는 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말 값은 알아서 계산하시오.”
“에엑?”
아무리 여인이라고 하나 정려군도 개방의 방도였다.
그 말은 즉, 거지라는 소리다.
“정말 야박하군요.”
“별걸 다 바라는군.”
구양운은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가볍게 운기조식을 했다.
독 기운을 틈틈이 해소시켜야 했다.
천마총에 도착하기 전까지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정려군도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가볍게라도 기를 다스렸다. 정려군 역시 구양운이 가는 길에 짐이 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흘렀다.
울컥.
구양운이 치밀어 오르는 핏물을 입 밖으로 뱉었다.
독 기운이 이렇게라도 몸 밖으로 배출된다는 것은 좋은 의미였다.
구양운이 뱉어낸 피는 시커먼 색이었다.
갑작스런 모습에 정려군이 놀라며 물었다.
“독? 중독됐나요?”
“별것 아니오.”
구양운은 소매로 입가를 스윽 닦아 냈다.
“제 말 값을 쳐 주면 내력으로 독을 누르는데 도와드릴게요.”
정려군이 조금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오히려 정려군에겐 일거양득이었다.
공짜로 말도 탈 수 있었고, 구양운의 몸 안에 기의 흐름을 관조(觀照)할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신한테는 공짜가 없는 것 같소.”
“세상의 이치가 그런 것이지요.”
정려군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구양운은 천천히 상의를 벗었다.
정려군의 도움을 받기 위함이었다.
마교의 지원을 받는 구양운에게 말 한 필의 값은 아무것도 아니다. 손해 볼 것이 없기에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정려군이나 구양운이나 각자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서로에게 해를 끼칠 리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둘 모두 눈치채고 있는 내용이었다.
원하는 바를 얻기 전까지는 신뢰할 수 있기에 더 망설임이 없었다.
정려군은 구양운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정려군도 무인이라 여인들보다는 사내들과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거부감이 없었다.
“아.”
그럼에도 정려군은 단말마의 감탄사를 내뱉었다.
구양운의 상체는 크고 작은 흉터들이 빼곡했다.
구양운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 상처들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상처들이 흉하기는커녕 오히려 아름다워 보였다.
“……대단하군요.”
정려군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같은 무인으로서 이런 상처들을 보면서 감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큼 구양운은 목숨을 건 생사대결을 했다는 소리다. 구양운의 몸에 나 있는 상처들은 그가 살아온 길이나 다름이 없었다.
“구경하라고 벗은 건 아니오만?”
정려군은 그제야 정신을 추스르며 말했다.
“좀 본다고 닳나요?”
뾰로통하게 대답하며 정려군은 구양운의 뒤편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정려군의 눈은 예리했다.
구양운의 몸에 많은 흉터들이 존재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두 군데였다.
하나는 명치 부분에 선명하게 남겨져 있는 붉은 반점과 갈비뼈 아래의 큰 두 개의 흉터였다.
갈비뼈 아래에 난 흉터는 정말 특이했다.
마치 커다란 봉을 몸속에 박아 넣은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야 저런 흉터가 생길 수 있지?’
정려군이 잠시 생각에 잠기자 구양운이 말했다.
“집중 안 할 거면 그만하겠소. 자칫하면 목숨을 잃겠군.”
내력을 상대방의 몸에 주입하는 것인 만큼 위험도 따랐다.
구양운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기를 거부하거나 둘의 정신이 흐트러진다면 주화입마에 걸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생각을 하는 정려군에게 구양운이 핀잔을 준 것이다.
“아, 알겠어요. 집중할게요.”
정려군은 양손을 구양운의 등으로 갖다 대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내력을 구양운의 몸으로 주입시켰다.
구양운도 심호흡을 하며 단전에서 진기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구양운이 기를 움직이자 그 흐름에 따라 정려군의 내력이 몸 안을 돌아다니며 보탬을 주었다.
구양운의 몸 안 곳곳의 혈도(穴道)들을 훑고 지나갔다.
처음엔 그로 인해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은 말끔히 사라졌다.
그렇게 얼마만큼 시간이 지났을까.
정려군이 땀범벅이 돼서야 조심스럽게 손을 떼어 내었다.
그리고 부족한 내력을 보충하기 위해 바로 운공요상(運功療傷)에 들어갔다.
구양운은 상의를 갖춰 입으며 정려군의 옆을 지켰다.
한결 상쾌해진 몸 상태를 느끼며 흡족했다.
이렇게 마음 놓고 산중에서 운기를 할 수 있는 것은 교일지의 몫이 컸다.
교일지가 항상 붙어 다니기 때문에 혹시 모를 기습에도 방비가 되는 것이다.
소주천(小周天)을 끝낸 정려군이 서서히 눈을 떴다.
“말 값을 후하게 친 느낌이군요.”
“바로 움직일 수 있겠소?”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괜찮을 듯해요.”
구양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허리끈을 풀어 한쪽 끄트머리를 정려군에게 건넸다.
정려군은 그것을 손으로 쥐며 싱그럽게 웃었다.
“배려인가요?”
“어쨌든 도움을 받았으니.”
구양운이 경공을 시전하자 정려군도 속도를 내었다.
구양운이 끈 한쪽을 잡고 앞에서 당겨주었고, 정려군은 그것을 잡고 뒤에서 쫓아오는 모양이다.
이렇게 하면 속도를 맞출 수 있고 정려군의 부담이 훨씬 줄었다.
둘은 순식간에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주변에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왠지 모르게 상쾌한 바람을 느끼며 정려군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려졌다.
구양운과 정려군은 하루 종일 쉬고 걷고를 반복하다 이내 어느 곳에 도착했다.
그곳은 주변에 나무가 울창한 숲속이었다.
구양운이 한 지점에 멈춰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미 해는 어둑어둑해졌지만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모르는 정려군은 잠자코 지켜볼 뿐이었다.
“이쯤이 맞는 것 같군.”
구양운은 큰 나무 기둥을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가도록 하겠소.”
“마을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조금 더 가는 게 낫지 않나요?”
“오늘은 노숙이오.”
구양운은 별다른 말없이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댔다.
정려군도 힘들었던 터라 우선은 얼른 그 옆에 앉았다.
그리고 구양운의 옆모습을 힐끔거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지금까지 구양운의 행동에는 어딘지 모를 위화감을 느껴졌다. 가는 내내 구양운이 원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행동하도록 짜여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왠지 모르게 구속받는 듯한 느낌을 쉽게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 이질적인 느낌이 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너무 예민한가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정려군은 이내 생각을 잠시 접었다.
의문도 의문이었지만 지금 정려군에게 시급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하루 종일 노동 아닌 노동을 한 그녀의 배는 이미 요동을 치고 있었다.
“배고픈데 산짐승이라도 잡을까요?”
정려군의 말에 구양운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 뒤적거렸다.
그리고 이내 손에 쥔 것을 정려군에게 건네었다.
음식이라는 생각에 정려군은 기쁜 마음으로 양손을 내밀어 받았다.
“이게……”
정려군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손 안에 오른 것은 벽곡단 한 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