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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마도 1권 (17화)


“고작 이거 먹자는 거예요? 오늘 하루 종일 고생했는데?”
“식성이 그리 좋아서 되겠소?”
구양운이 살수로 활동했을 적에는 목표물을 노리고 몸을 숨기게 되면 몇 날 며칠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섭취할 수 없었다.
그때마다 간단하게 식사를 때웠기 때문에 음식에 대한 욕구가 남들보다 적었다.
하지만 구양운과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정려군은 그 말에 딱딱하게 굳었다.
“인생의 낙을 모르는 분이군요.”
많이 먹는다는 얘기를 듣고 좋아할 여인은 없었다.
정려군도 여인이었기 때문에 구양운에 말에 발끈한 것이다.
“그게 인생을 논할 문제요?”
구양운은 예의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정려군도 질세라 구양운에게 반박했다.
“사람의 감각 중에 미각이 괜히 있는 건 아니죠.”
“아아.”
구양운은 건성으로 대꾸하고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상대를 안 하겠다는 구양운의 모습에 정려군은 손 안에 있는 벽곡단을 입안에 넣었다.
으드득.
왠지 분한 마음에 벽곡단을 입 안에서 잘게 씹었다.
정려군은 몸을 움직여서 산짐승이라도 잡아서 혼자 요리해 먹을까도 싶었지만 이내 그만뒀다.
지금은 이대로 있는 것도 왠지 싫지 않았다.
주변이 고요해지자 정려군은 몸을 나무 기둥에 기대어 호리병의 마개를 열었다.
마개를 열자 술 냄새가 확하고 풍겼다.
정려군이 항상 지니고 다니던 술이었다.
한동안 홀짝홀짝 혼자 술을 마시던 정려군이 입을 열었다.
“드실래요?”
벽곡단으로 주린 배가 채워질 리 없었다.
구양운이 말없이 손을 내밀자 정려군은 마시던 호리병을 건넸다.
벌컥벌컥.
몇 모금을 마시던 구양운이 다시 호리병을 정려군에게 주었다. 그렇게 술을 기울이며 구양운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술을 정말 좋아하는군.”
“전 술 없으면 못 살아요.”
정려군이 농담을 섞으며 웃었다.
구양운은 마지막으로 호리병을 정려군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만 쉬시오.”
정려군도 구양운의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허리를 기대어 앉았다.
“내일 마을에 가면 이것저것 맛있는 거 많이 먹어요.”
“집착이 강하군.”
구양운은 맹랑한 정려군의 말에 피식 웃었다.

* * *

슈슈슉.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는 자연적인 바람소리가 아니었다.
빠른 행보에 흡사 바람을 가르는 듯한 소리를 자아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길을 가던 그들이 동시에 발을 멈췄다.
그러자 숲속의 크고 작은 각 나무 위에 서 있는 열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중 한 인영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착지할 때 나는 미세한 소리조차 없었다.
언뜻 보면 풀잎을 밟고도 풀이 휘어지지 않는다는 초상비(草上飛)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의 몸놀림이 그만큼 예사롭지 않았다.
그들이 멈춰선 곳 앞에는 두 갈래로 나눠진 길이 보였다.
“큰형님 어느 쪽입니까?”
바닥으로 떨어진 사내는 길에 남아 있는 흔적을 찾으며 물었다.
사내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다른 일행들이 있는 나무 위였다.
그 선두에 한 인영이 서 있었다.
그자의 모습은 괴기스러웠다.
무엇보다 초점 없는 눈동자는 온통 하얀색이었다.
멍한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 그는 누가 봐도 그는 맹인이었다.
킁킁.
그자는 냄새를 맡고 있었다.
길 한복판에서 무슨 냄새가 나겠냐만 그의 움직임은 조심스러웠다.
“오른쪽.”
그가 짤막하게 말하자 그 뒤로 여러 개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쏘아졌다.
귀살각.
그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큰형님이라 부르며 따르는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일발귀견수(一發鬼見愁) 도일맹(桃一萌).
도일맹을 아는 이라면 그가 맹인이라는 이유로 얕잡아 볼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으로 태어났지만, 남들과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앞을 볼 수 없는 대신에 그의 다른 모든 감각들이 극도로 발달했다. 오히려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인정한 귀살각의 수장인 것이다.
무엇보다 도일맹은 남을 추적하는 능력은 가히 발군이었다.
이번에도 도일맹은 마교를 나서기 전 구양운과 십영의 냄새를 기억해 놓은 상태였다.
그 둘에게 천리추종향을 뿌려 놓은 것처럼 도일맹은 구양운과 십영의 냄새를 정확하게 맡아 냈다.
그것은 십영이 구양운에게 붙어 있었기에 더 쉬운 일이었다.
간혹 살수들은 그들만의 향기로 상대를 부르곤 했다.
그리고 사공악의 열 개의 그림자들 역시 그들만의 훈련된 향이 있었다.
그 향은 일반인들과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에 더욱 도일맹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도일맹의 신형이 동료들을 따라 순식간에 앞으로 쏘아졌다. 나무를 타고 가는 것임에도 그의 발놀림은 정확했다.
그의 공허한 눈동자가 허공을 향했다. 그리고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그려졌다.
“얼마 남지 않았군. 며칠 후면 조우(遭遇)하겠어.”
도일맹의 독백이 흘렀다.
귀살각, 그들은 단 한 번도 추적에 실패해 본 적이 없었다.
오랜만의 산책에 도일맹은 목표물을 어떻게 죽일까에 대한 즐거운 상상을 그렸다.





七.도주(逃走)를 하다



온 세상이 깜깜했다.
구양운은 손을 들어 자신의 손 모양을 빤히 쳐다봤다.
온통 어둠뿐이었지만 이상하게 자신의 모습은 정확하게 보였다.
여기는 어디지라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전이었다.
구양운의 앞에 커다란 검은색의 손이 등장했다. 누구의 손인지 보이지 않았으나 그것은 점점 구양운에게 다가왔다.
왜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손에 붙잡히면 위험하다는 경고가 머릿속을 지배했다.
구양운은 그 손을 피하기 위해 앞으로 내달렸다.
그 검은 손은 집요하게 구양운을 쫓아왔다. 아무리 달려도 그 손과의 거리는 벌려지지가 않았다.
구양운은 달리고 또 달렸다.
‘헉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지금 걷는 이 길이 어딘지, 이곳이 길은 맞는 건지 수없이 많은 궁금증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찬찬히 생각해 볼 여유 따윈 없었다.
구양운은 그저 검은 손을 피하기 위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까?
어느 순간 뒤를 돌아봤을 때 그것은 보이지 않았다.
‘휴우.’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구양운의 뒤에서 검은 손이 나타나 그의 목덜미를 잡았다.
“으아아아!”
구양운의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울렸다.
“소협? 소협 괜찮아요?”
구양운이 눈을 뜨자 그 앞에 정려군의 얼굴이 보였다.
“아…….”
정려군의 모습을 인식하자 구양운은 낮은 탄식을 했다.
구양운의 숨소리는 방금 전력질주를 마친 것처럼 거칠었다. 뿐만 아니라 온몸은 땀투성이였다.
구양운은 자연스레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맷자락으로 닦았다.
우습게도 악몽이었다.
정려군은 그런 구양운의 모습에 놀랐는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괜찮아요? 악몽이라도 꿨어요?”
“아니, 괜찮소.”
구양운이 괜찮다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꿈이라…….’
꿈이라는 것 자체를 꾸지 않은지 이미 오래였다.
무저갱의 어둠 속에 있을 때 오히려 꿈이라도 꿨으면 하고 바랐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눈을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조차 구별되지 않는 그 어둠 속에서도 찾아오지 않았던 꿈이라는 것을 꾼 것이다.
왠지 모르게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무심코 옆자리를 보니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구양운을 쳐다보고 있는 정려군이 눈에 띠었다.
별일 아닌 걸로 소란을 피운 것 같아 머쓱한 기분에 구양운은 몸을 일으켰다.
“슬슬 출발해야겠소.”
나지막한 구양운의 목소리에 정려군도 몸을 움직였다.
“정말 괜찮아요? 아니면 잠시 쉬었다가 가요.”
정려군은 구양운의 행동이 마음에 걸렸는지 재차 물었다.
“정말 괜찮으니 걱정 마시오.”
오랜만에 꾼 꿈으로 기분이 불쾌할 뿐 구양운의 몸 상태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쓸데없이 찜찜했던 기분은 이미 지우기로 마음먹었다.
오늘도 육대방이 준 지도에 맞춰 가려면 빠듯한 일정이었다.
먼저 걸음을 떼는 구양운의 뒤를 쫓으며 정려군이 투덜거렸다.
“며칠 전 코앞에 마을도 그냥 지나쳤잖아요. 이번에는 정말 마을에 들르는 거죠? 배고파 죽겠어요.”
“이번 마을은 들른다고 하지 않았소.”
“남아일언 중천금(男兒一言 重千金).”
정려군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고 습관처럼 호리병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호리병 안에 있는 술은 벌써 며칠 전에 사라졌다.
허리춤에 묶여 있는 가벼운 호리병을 만지작거리며 정려군은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길을 걸었다.
그리 오래 걷지 않아 둘 앞에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 큰 마을은 아니었지만 부족한 것은 없어보였다.
“아, 드디어 마을이네요!”
정려군이 마을을 보고 가장 먼저 환호했다.
그 모습에 구양운은 실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먹고 싶은 게 그렇고 많았소?”
“그렇다고 하면 사 주실 건가요?”
정려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구양운은 그저 낮게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지금 구양운에게 넘쳐 나는 건 돈이었지만 왠지 사 주고 싶은 마음보단 골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만 가지.”
구양운이 이제는 눈앞까지 가까워진 마을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소협의 말이 은근슬쩍 짧아진다는 걸 알고 있어요?”
정려군은 도끼눈을 뜨고 구양운을 쫓아왔다.
사실이다.
필요를 위해 맺은 관계지만 정려군이 점점 편안해지는 것은 맞았다.
“마구간(馬廐間)이나 찾아보오.”
마구간은 말을 기르는 곳이었기에 그만큼 차지하는 공간이 넓었다.
그 말은 즉, 쉽게 눈에 띈다는 소리다.
구양운은 마을로 들어서자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러던 중 정려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협, 저것 좀 봐요.”
정려군의 목소리에 구양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곳을 향했다.
그곳에는 경단(瓊團)을 팔고 있었다.
경단이 기다란 막대에 꼬치처럼 기름칠이 된 모습이 먹기 좋게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정려군의 눈은 그곳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사달라는 거요?”
“정말 그래 주시는 거예요?”
정려군이 꽃이 만개하듯 환하게 웃었다.
당장에라도 달려가려는 정려군의 기세에 구양운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대가는?”
쪼르르 달려가던 정려군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역시나 야박한 사람. 공짜는 믿을 게 못되죠.”
“가르쳐 준 사람이 바로 당신이오.”
“쳇.”
정려군은 말없이 다시 구양운의 뒤만 졸졸 쫓아왔다.
재잘거리던 정려군이 입을 다무니 구양운이 먼저 말을 꺼냈다.
“마구간은 찾고 있는 거요?”
구양운의 말에도 묵묵부답이었다.
“못 말리겠군.”
구양운은 계속 앞서 걸었다.
거슬릴 정도로 사방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마을 안으로 점점 들어서자 정려군의 외모에 시선이 몰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정려군의 행색이 초라해서 망정이지 다른 여인네들처럼 치장까지 했다면 귀찮은 일이 많이 생겼을 것이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갔으나 마을 구석에 위치해 있는지 마구간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지나가는 행인에게 물어볼까도 했으나 구양운의 시선에 정려군이 잡혔다.
여인네들이 쓰는 장신구들이 잔뜩 진열이 되어 있었지만 정려군은 그런데는 통 관심이 없는 듯 먹는 곳만 기웃기웃 보고 있을 뿐이었다.
구양운도 슬슬 허기가 졌다.
말을 사는 건 급한 일이 아니니 요기(療飢)부터 하고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정하자 구양운이 입을 열었다.
“그럼 객잔부터 잡고……”
“저기로 가요.”
구양운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려군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