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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마도 1권 (19화)
객잔 주인의 말처럼 방 안은 잘 꾸며져 있었다. 방 중앙에 있는 다탁에 정려군이 술 단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구양운의 잔과 자신의 잔을 술로 채웠다.
“뭐해요?”
방문을 닫고 들어오는 구양운을 보며 정려군이 물었다.
“오늘따라 조용하게 마시고 싶군.”
구양운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며 정려군의 반대편에 앉았다.
“한잔해요.”
말을 마친 정려군이 먼저 잔을 들이켰다.
구양운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자신의 술잔에 있는 술을 조금 흘려 손가락에 묻혔다.
정려군은 그런 행동이 의아할 만했지만 위로 올라가자는 말부터가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었기에 구양운이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구양운은 손가락은 조심스럽게 다탁 위에서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다탁에 손가락이 직접 닿지 않아도 물이 번지니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구양운의 손가락이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결국 한 글자가 나타났다.
추(追).
정려군의 눈동자가 반짝 빛이 났다.
쫓을 추. 누군가 자신들을 쫓고 있다는 뜻이었다.
구양운이 지금 알려주지 않았다면 정려군은 끝내 몰랐을 것이다. 그 사실이 기분 좋지는 않지만 당장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자신이 눈치채지 못하는 적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구양운과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거란 것이다.
하지만 구양운이 이렇게 행동으로 표현을 한 것을 보고 정려군은 이내 두 가지를 추측해 냈다.
하나는 괴한이 우리를 자세히 볼 수 없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우리의 목소리는 들을 수 있다는 것.
구양운도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 이런 방법으로 정려군에게 말한 것이라 짐작했다.
“호호, 오늘따라 흥이 돋네요.”
정려군은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의심을 받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내가 따르지.”
구양운도 그 말을 맞받아치며 비워진 정려군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쪼르륵.
술이 잔을 채우는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크게 들려왔다.
정려군이 구양운을 보며 전음으로 말했다.
“어디에 있나요?”
구양운은 자신의 술잔을 비우며 정려군에 질문의 답을 똑같이 전음으로 전했다.
“지붕. 하지만 소리밖에 듣지 못해.”
허술했던 객잔의 일 층과 지금 있는 이 방의 구조는 완전히 달랐다.
값비싼 객잔의 특실인 만큼 천장과 바닥의 높이가 높아서 안을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화려한 방이라 곳곳에 장신구들 때문에 아무리 안력을 돋운다고 해도 그 시야는 좁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구양운 자신이 살수였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해치울까요?”
정려군의 말에 구양운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이미 객잔의 일 층에서 이 층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기척은 감지해 놓은 상태였다.
“그래야지.”
구양운과 정려군은 긴밀히 밀어를 나누다가 정려군이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런데 소협 요즘 들어 저한테 말을 편하게 하시는 거 알아요?”
정려군의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귀살각이 등장하고 난 후로 반 존칭을 쓰던 구양운의 말투가 바뀌었다.
의식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말을 낮춘 것이다.
“싫소?”
“싫다고 하면요?”
“그럼 당신도 편하게 말해. 어차피 나이도 내가 더 많아 보이는데.”
구양운은 잠시 올렸던 말투를 다시 낮췄다.
정려군이 호방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려고 말한 거예요. 소협이 먼저 말을 낮춘 게 아니라 제가 허락한 거예요.”
구양운은 약간 의아한 눈빛으로 정려군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정려군의 말에 따르면 이렇게 자신이 말을 낮추는 걸 허락한다는 뜻인데 구양운이 먼저 말하는 것과 정려군이 허락하는 것이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여자는 가끔 참 모를 생명체였다.
정려군의 섬섬옥수(纖纖玉手)가 다시 다탁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술잔을 채웠다.
“언제 칠 거예요?”
구양운은 술잔을 다시 들이키며 천천히 글자를 적어 나갔다.
지금.
구양운은 슬쩍 주변을 훑어봤다.
구양운의 근처에는 항상 십영이 있다.
자신이 눈치챈 괴한의 기척을 십영이 모르고 있을 리 만무했다.
알면서도 십영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구양운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구양운은 마음을 정했다.
귀살각의 십인 중에 떨어진 한 명쯤이야 간단히 해치울 수 있다. 더군다나 도일맹이 없는 귀살각은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이 없었다.
“교일지 언제까지 놀고 있을 생각이냐?”
구양운의 입에서 나지막이 뒷말이 이어져 나왔다.
“죽여라.”
구양운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십영이었다.
십영은 구양운의 말이 들리는 순간 허리춤에 요대(腰帶)처럼 차고 있던 연검(軟劍)을 뽑았다.
연검은 매우 가볍고 얇은 검이다. 그리고 손잡이 부분부터 칼의 끝부분까지 휘어지기 때문에 기가 막힐 정도로 휨이 아주 큰 무기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잘 휘어지는 칼의 특성상 다루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연검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자는 드물었다.
하지만 십영에게만큼은 안성맞춤이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당황한 건 초련운이었다.
초련운은 비록 귀살각의 막내라고는 하나 단신의 힘만으로도 이미 일류 살수의 반열에 들어선 자였다.
하지만 그가 감지해 내지 못한 기척이라니.
초련운은 황급히 몸을 움직여 십영의 검을 막아 냈다.
십영의 연검은 마치 뱀처럼 초련운의 무기를 빙글빙글 타고 올라갔다.
초련운은 순식간에 자신의 무기를 거둬드림과 동시에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연검을 막아 냈다.
그러자 그 탄력으로 가느다란 연검이 반대쪽으로 휘어졌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휘어진 연검은 그 상태 그대로 초련운을 공격해 들어갔다.
초련운은 문득 눈앞의 여인에게 두려움이 느껴졌다.
같은 부류.
동류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여인은 초식의 배합이 가히 천재적이었다.
문득 헤어지기 전 도일맹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잊지 마라, 근처에 절대로 다가서지마.”
초련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초련운은 도일맹의 말을 듣지 않은 걸 후회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없었다.
‘도망친다.’
초련운은 십영이 처음 등장할 때부터 이미 마음먹은 상태였다.
지금은 혼자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몸을 빼기엔 십영의 검이 너무나 날카로웠다.
채채챙.
순식간에 검이 몇 차례나 마찰했다.
십영의 독사 같은 연검을 막느라 쉴 틈이 없었지만, 초련운은 빠르게 주위를 훑어봤다.
다행히 구양운과 정려군은 방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그 사실이 초련운에게 일말의 희망을 갖게 했다.
방금 전 십영에게 말하는 구양운의 목소리는 초련운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죽여라.
그 말을 미루어 보아 자신을 결코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서 도망쳐야만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초련운은 자신의 발을 믿었다.
이 객잔만 빠져나간다면 결코 이들은 자신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초련운은 긴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다.
십영의 연검은 자신의 검에 부딪칠 때마다 힘에 밀려 사방으로 휘어지는데 그 방향 하나하나가 다 검로였다.
어느 방향으로 휘어져도 그 탄력 받은 힘은 다시 그대로 초련운을 압박해 왔다.
점점 십영의 공격을 막아 내기가 버거웠다.
초련운은 마지막으로 십영의 검을 막아 내면서 순식간에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암기를 날렸다.
거머리처럼 자신을 옥죄어 오는 십영을 잠시라도 떼어 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초련운은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몸을 날렸다.
초련운의 몸은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갔다.
도망칠 수 있는 거리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
‘이곳만 나가면…….’
그때였다.
그리고 초련운의 움직임을 느낀 구양운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쉬이익.
구양운이 검을 뽑아 수직으로 초련운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서걱.
구양운의 검이 초련운의 몸을 베었다. 정확히 초련운이 뛰어내리고 객잔 창문을 지나칠 때를 노린 한 수였다.
구양운의 검에 초련운뿐만 아니라 객잔 창문까지도 완전히 박살이 났다.
콰당탕.
구양운의 검에 꽂힌 상태로 초련운은 객잔 안으로 끌려왔다. 차마 고통에 일어서지 못한 채 땅바닥을 굴렀다.
“커억!”
구양운에게 입은 상처로 인해 초련운의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십영은 상황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천장에서 사뿐하게 떨어져 내려왔다.
십영의 진면목을 처음으로 본 정려군은 예상 밖의 모습에 놀랐다.
이미 동행하는 자가 한 명 더 있다는 것은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숨겨진 자가 여인이라는 것이 놀라웠고 생각보다 월등한 무공 실력에 정려군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정려군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십영을 주시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십영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초련운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놈 정체가 뭐죠?”
십영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십영의 정체가 교일지라고 밝히고 난 후로 구양운과 처음 나누는 대화였다.
구양운은 힐끔 교일지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귀살각.”
구양운의 낮은 목소리에 교일지는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이자가…… 귀살각이라고요?”
분명 누군가 있음을 감지하긴 했으나 그의 정체까지는 십영조차도 알아보지 못했다.
초련운의 너무나도 은밀한 움직임 덕분이었다.
아마 객잔 안까지 들어오지 않았다면 십영조차 깜빡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죽이자고 한 겁니까?”
이공자의 열 개의 그림자 중 하나인 십영이라 할지라도 순간 눈앞의 초련운의 숨통을 끊기가 망설여졌다.
귀살각에 대해 이런저런 소문은 세간에 많이 돌았다.
하지만 그 소문 중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친형제는 아니나 서로를 건드리는 이는 귀살각 모두의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결코 추격을 포기하지 않는다.
십영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구양운도 단번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구양운은 망설임이 없었다.
“두 번 말해야 알아듣나?”
구양운은 무심한 눈동자로 초련운을 쳐다보며 말했다.
구양운의 손에 들려진 검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톡톡톡.
핏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초련운은 양손으로 상처를 감싸 쥐곤 자신에게 점점 다가오는 구양운을 올려다보았다.
“사, 살려 줘…….”
초련운이 다친 몸을 벽으로 질질 끌면서 마지막까지 살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다.
초련운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그의 핏자국들이 방 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가까이 다가온 구양운을 바라보며 초련운은 다급하게 외쳤다.
“날 죽이면 혀, 형들이 너를 용서치!”
서걱.
베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구양운의 검은 망설임 없이 초련운의 목젖을 그어 버렸다.
초련운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다가 그렇게 숨을 거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십영은 머리가 복잡했다.
귀살각은 교주의 명만을 받든다. 그렇다는 말은 교주가 구양운이 무저갱을 나간 것을 파악하고 보냈다는 뜻이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육대방과 전서구를 통해 소식을 주고받았으나 그런 얘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을 육대방을 통해 이공자 사공악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십영이 막 품속에서 전서구에 묶어 보낼 종이를 찾으려 할 때였다.
그것을 눈치채고 구양운이 말했다.
“허튼짓 그만둬라. 귀살각이 이곳에 들이닥치는 건 일다경(一茶頃)밖에 남지 않았다.”
말을 하는 동안 구양운은 품안에서 물건을 싸서 들고 다닐 수 있도록 네모지게 만든 작은 천을 꺼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