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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마도 1권 (20화)
너무나도 순식간에 진행되는 상황에 교일지는 할 말을 잃고 그 모습을 쳐다볼 뿐이었다.
“가지고 있는 물건 다 넣어.”
구양운의 말에 정신을 차린 교일지가 날카롭게 말했다.
“덕분에 죽을 때까지 귀살각의 추격을 받게 되었군요. 고마워요, 오라버니.”
“살려 줬으면? 귀살각이 너를 살려 줬을 거라 생각하나? 아직도 겁을 먹고 있다면 할 말이 없군.”
날카로운 교일지에 말해 구양운 또한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다.
구양운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계획과 너무 틀어져 버린 상황에 교일지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순간 망설였다.
“살고 싶으면 내 말 들어.”
구양운은 차갑게 말을 내뱉고 다시 정려군에게 시선을 두었다. 정려군은 여전히 앉아서 그 둘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정려군에게 구양운이 나지막이 말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당신은 이제 내가 어디로 가는지 대충 눈치를 챘을 것 같은데? 어찌 됐든 안타깝게도 우리는 조금 더 동행을 해야겠군.”
구양운의 말에 정려군은 웃을 뿐이었다.
구양운이 천으로 시작되는 곳으로 간다고 말했을 때는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동행을 하면서 가는 방향을 미루어 봤을 때 단 한 곳밖에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천마총.
그 이름이 너무도 무거운…… 이미 잊힐 만큼 오래된 마교의 금역(禁域)이었다.
교일지는 구양운의 말에 다시 한 번 화들짝 놀랐다.
둘이 동행하는 내내 붙어 다녔던 십영이었다. 하지만 정려군은 그런 내색을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둘은 그런 중요한 대화를 하기보다는 쓸데없는 농담만 나눴을 뿐이다.
새삼 쌍봉이라는 정려군이 새롭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어쩔 수 없죠.”
정려군은 오히려 편안하게 웃으며 구양운에게 대답했다.
“이미 우리 셋의 냄새를 맡았으나 쉽지 않을 거다. 시간이 없어.”
정려군은 구양운에게 터벅터벅 걸어와서 가지고 있는 소지품을 다 내려놓았다.
구양운 또한 자신의 소지품들을 전부 털어서 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교일지에게 시선이 향했다.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
구양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교일지를 향하자 살기 어린 목소리가 아니었음에도 교일지는 움찔했다.
구양운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더 이상 같이 가지 않겠다.”
구양운이 처음으로 내뱉은 경고였다.
처음에는 사공악의 눈이기 때문에 잡고 싶었고, 다음에는 사공악의 눈이라서 떨어뜨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암영대 단주의 딸 교일지이기 때문에 함께 길을 걸었던 것이다.
물론 구양운이 교일지를 따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교일지의 귀에는 구양운의 말이 가볍지 않았다.
결코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구양운이라는 사내는.
구양운의 단호한 눈빛을 바라보던 교일지도 망설임 끝에 가지고 있던 모든 물건을 내려놓았다.
흑무미리구 할 것 없이 살수로서 가지고 있던 모든 물건을 풀어 놓자 그것만으로 이미 한 짐이었다.
구양운은 빠르게 그 짐들을 한데로 묶으며 생각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자신의 예상보다 몇 배로 빠르게 시간을 계산했다. 하지만 그것을 실망시키지 않을 자들이 바로 귀살각이다.
짐을 한 손에 움켜진 구양운의 시선이 바깥으로 향하며 날카롭게 빛났다.
* * *
같은 시각.
귀살각의 여덟 명은 한 자리에서 모여 있었다.
그곳은 구양운이 머물고 있는 객잔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막내가 늦는군.”
도일맹의 하얀 눈동자가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큰형 별일이야 있겠어? 막내가 이번 임무를 제일 지겨워했으니까 기분 전환이라도 하나 보지.”
“그런데 둘째 형은 언제 오는 거야?”
귀살각의 막내 초련운은 지각이 잦은 편이었기 때문에 모두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앞서서 이곳에 있어야 할 둘째 형에 대해 말이 오갈 때였다.
그때 마침 한 사내가 이곳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를 보자 모두 반색했다.
하지만 그 사내는 모두를 보자마자 무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희들 큰형님이 시킨 일은 다 끝냈나?”
그의 목소리는 살얼음판같이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말투였다.
그자는 바로 귀살각의 둘째 율금무(律琴戊)다.
귀살각의 둘째라는 명칭답게 그는 귀살각의 각주이자 큰형인 도일맹을 제외하고는 가장 무공 실력이 뛰어났다.
도일맹을 제외한 칠 인이 율금무의 질문에 모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미 끝냈으니까 여기 있는 거요, 둘째 형.”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늦었소, 형님”
여기까지 오면서 귀살각의 십 인은 구양운 일행을 쫓기 위해서 역할 분담을 하고 잠시 흩어졌었다.
그중에 가장 발이 빠른 귀살각의 막내 초련운이 가장 앞서서 구양운을 쫓았던 것이다.
동생들이 각자 반가운 말투로 가장 늦게 도착한 율금무를 반겼다.
하지만 율금무의 등장에도 다른 동생들과 반대로 도일맹의 표정만은 풀어지지 않았다.
가장 나이가 어리기 때문인지 막내 초련운이 가장 경솔한 행동을 많이 했다.
물론 초련운도 귀살각의 일인이었기 때문에 단신이라 해도 그에게 해를 끼칠 자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왜인지 늦어지는 시간만큼 도일맹은 걱정이 되었다.
‘구양운…….’
아마 이 걱정의 근원지는 이자 때문이다.
십 년 전 구양운을 잡아들인 적이 있다.
이상하게도 그때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참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구양운이라는 자를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느낄 수 있었다.
‘괜찮겠지?’
도일맹은 걱정되는 마음을 우선 접어 두었다.
초련운과 헤어지던 마지막까지도 구양운 근처에 절대로 다가가지 말라고 주의까지 주었다.
그 정도면 막내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라 도일맹은 그렇게 믿었다.
“큰형님.”
귀살각의 둘째 율금무가 다가왔다.
누구보다 감각이 좋은 도일맹이기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아도 알아챌 수 있었다.
살수들은 습관적으로 발소리를 죽여서 걷곤 했는데 도일맹의 귀에는 그 발자국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그리고 귀살각 인원 모두 자기만의 발자국 소리가 있다.
그것으로 도일맹은 쉽게 구분할 수가 있었다.
“막내 걱정하십니까?”
귀살각에서 가장 눈치가 빠른 율금무는 단번에 도일맹의 심정을 간파했다.
도일맹은 그저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늦으니 걱정이 되는구나. 그런데 별일이야 있겠는가 싶기도 하고.”
“걱정할 게 뭐 있습니까? 어차피 목표물도 코앞에 있는데 막내를 기다리기보단 우리가 먼저 움직이지요.”
“둘째 형님 말이 옳소. 기다리기도 지루했던 참인데 이제 슬슬 갑시다. 큰형님.”
도일맹도 아우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제 구양운 일행은 다 잡은 토끼나 다름없었다.
도일맹이 일어나려 하자 율금무가 부축했다.
도일맹은 오감이 아주 뛰어났기 때문에 그저 맹인으로만 보기가 어려웠으나 율금무는 항상 곁에서 그를 챙겼다.
“그래, 이제 가자꾸나.”
도일맹이 한마디 내뱉자 모두 몸을 움직였다.
귀살각의 아홉 명이 경공을 펼치자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들의 눈앞에는 금화객잔이라는 화려한 현판이 있었다.
“큰형님 이곳에 막내가 남긴 표식이 있네요.”
“그래…… 그런데 이상하게 피 냄새가 짙구나.”
도일맹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가장 최악의 상황이 떠오른 것이다.
“서두르자.”
도일맹은 선두로 뒤에 여덟 명이 뒤따랐다.
발을 한 번 도약하니 순식간에 이 층으로 솟아올랐다.
구양운의 냄새가 남아 있는 방의 창문을 열어 젖히는 순간 코를 자극하는 피 비린내가 물씬 풍겨 왔다.
“막내야!”
앞이 보이지 않는 도일맹이었기에 바로 뒤따르던 율금무가 큰소리로 외쳤다.
싸늘한 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는 초련운의 시체가 눈에 띠었다.
“이런 육시랄!”
아우들의 입에서 갖가지의 욕들이 난무하며 간간히 울먹이는 소리까지 들렸다.
도일맹의 공허한 눈동자가 허공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직접 보지 못했지만 상황이 머리에서 그려진다.
아마도 초련운은 성급하게 구양운에게 다가갔으리라.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고 했거늘.’
도일맹은 잠시 서서 불에 덴 것만 같은 뜨거운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는 사이 율금무가 자신의 윗옷을 벗어 초련운의 얼굴에 덮어 주며 말했다.
“빨리 쫓아갑시다. 이것들을 갈기갈기 찢어서 막내에게 바치겠습니다.”
마지막 냉정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율금무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구양운!’
도일맹의 주먹이 꽉 쥐었다. 안 그래도 이미 십영의 냄새를 맡고 있던 참이었다.
“이것들을 편하게 죽여주지 않겠다! 가자!”
짐승의 표호와도 같은 목소리로 도일맹이 외쳤다.
그리고 도일맹이 빠른 속도로 창문을 뚫고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도일맹의 뒤를 이어 여덟 명의 신영이 그를 쫓았다.
모두 치가 떨리는 분노에 몸서리가 쳐졌다.
귀살각은 엄청난 속도로 구양운의 흔적을 쫓아갔다.
“말을 탄 모양이다. 생각보다 제법 멀리 도망쳤군.”
도일맹이 씹어뱉듯이 말을 내뱉었다. 애당초 이미 거리를 확보한 이상 구양운이 살아남기란 힘들었다.
아무리 강한 고수라 한들 귀살각 모두를 상대하기는 힘들다.
빠른 속도로 달리던 도일맹이 한 지점을 보고 외쳤다.
“저기다!”
저 앞에는 말 세 필이 달리고 있었다.
도일맹의 목소리를 들은 율금무가 가장 선두에서 쏘아져 내려갔다.
“죽여 버리겠다!”
순식간에 율금우의 검이 말을 타고 있던 자를 갈랐다. 율금무의 일격을 본 모두가 피풍의를 펄럭거리며 달리고 있던 자가 단숨에 두 동강이 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 율금무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검을 통해 느껴지는 손끝에서의 감각이 말해 주고 있었다.
이것은 사람을 벨 때 느끼는 감촉이 아니었다.
투욱.
율금무는 다시 정면을 쳐다보았다.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자 대신 나무 막대기가 반으로 두 동강이 나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무로 만들어진 막대를 사람 형태처럼 말안장에 고정시켜 놓고 그 위에 피풍의를 걸쳐 마치 사람이 탄 것처럼 위장해 놓은 것이다.
‘속았다!’
이것을 본 귀살각 모두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동일했다.
“이, 이……!”
율금무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었다. 구양운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율금무의 화가 폭발한 것이다.
화가 난 율금무의 검이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는 말을 향해 쏘아졌다.
쉬이익.
말의 목이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목이 떨어진 말은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죽은 말이 쓰러지자 이제껏 말이 지고 달렸던 보따리가 눈에 들어왔다.
풀어헤쳐진 보따리 사이에서 그 안에 담긴 물건이 보였다. 그 안에는 구양운 일행이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하다가 결국 율금무는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구양운 가만두지 않겠다!”
율금무의 성난 외침이 숲에 진동했다.
* * *
구양운 일행은 놀랍게도 초련운의 시체가 있는 금화객잔에 여전히 머물고 있었다.
이미 구양운의 냄새가 객잔 안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보다 유인하기가 더 쉬웠다. 뿐만 아니라 아우의 시신을 본 귀살각의 인물들은 이성을 잃고 말 것이라 짐작했다.
그리고 구양운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찰랑찰랑.
몸을 움직일 때마다 물소리가 따라 들려왔다.
구양운의 일행은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커다란 통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 물은 구양운이 특별하게 만든 것이었다.
귀살각에 도일맹은 냄새로 목표물을 쫓는다. 이와 비슷하게 간혹 동물에게 냄새를 맡게 해 사람을 쫓는 이들도 있다.
그런 동물들을 피하기 위해 구양운이 암영대에서 쓰던 향신료(香辛料)를 물에다가 첨가한 것이다.
짐승들이 이 향신료의 냄새를 맡으면 코가 마비되게 된다. 하지만 짐승들이라면 모를까 그런 수로 도일맹을 속이기에는 어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향신료를 물 안에다가 탄 것이다. 항시 사용할 수는 없는 수단이었지만 구양운이 그것을 적절하게 이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