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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마도 1권 (21화)
목욕을 하는 통이라고 하나 성인 남녀 세 명이 들어가 있으니 비좁기 그지없었다.
“이제 갔을까요?”
교일지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불과 귀살각의 등장을 눈치챈 시간은 얼마 되지 않으나 구양운의 처리는 빨랐다. 이렇게 쉽게 귀살각을 따돌릴 줄은 교일지로서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정려군의 시선 역시 구양운을 향해 있었다.
위험한 자들에게 쫓기고 있거늘 구양운의 표정은 오히려 생기가 넘쳤다.
정려군은 이 사내의 머릿속이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방심하지 마. 이제부터가 시작이니…….”
구양운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귀살각은 그들의 각주 도일맹을 중심으로 추격을 한다. 맹인 도일맹이 후각은 그의 추격 방법 중 단연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수단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다.
도일맹의 후각이 없었다면 귀살각은 이 객잔부터 수색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밖에는 표현이 안 됐다.
구양운의 입가가 세로로 비틀리며 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는 초련운의 어리석음으로 잘 넘어갔으나 귀살각의 추격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구양운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여유로운 미소가 맴돌았다.
八.천마총(天魔塚) 입성(入城)
“슬슬 나가지.”
구양운이 말했다.
그리고 셋이서 눈이 마주치자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목욕통 안에서 몸을 빼내었다.
바깥으로 나온 셋은 전부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바닥이 그들의 옷자락에서 떨어진 물로 축축했다.
“이제 어떻게 하죠?”
교일지가 구양운에게 물었다.
교일지의 목소리에 구양운의 시선이 무심코 두 여인에게로 향했다. 천하절색의 미인 두 명이 젖어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구양운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기다려 봐.”
구양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인영이 이곳을 향해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두 여인은 깜짝 놀란 반면 구양운은 담담했다.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 것은 바로 처음에 정려군과 구양운에게 자리를 안내해 준 금화객잔의 점소이였다.
애초부터 이 근처에서 구양운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구양운이 점소이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시킨 것은?”
“네, 이미 다 끝냈습죠. 우선 준비한 물건입니다요.”
“다른 것도 모두 준비된 건가?”
“기별을 했으니 공자님이 말씀해 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요.”
구양운이 흔쾌한 점소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고했다.”
“그럼 소인은 이만…….”
점소이는 구양운에게 비단 보따리를 건네주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사라졌다.
구양운은 그것을 들고 정려군과 교일지 앞에 섰다.
“이걸로 갈아입고 출발하지.”
구양운의 말에 두 여인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렇게 젖은 차림으로 돌아다닌다면 사람들의 시선만 더 끌 뿐이었다.
구양운은 안에서 자신의 옷만 꺼낸 뒤 정려군과 교일지에게 건네주었다.
구양운을 바라보는 정려군의 시선이 묘했다.
구양운이 이렇게까지 준비를 해 두었다는 것은 이미 몇 수 앞까지 내다보았다는 소리다.
무림의 쌍봉이라고 칭송받는 정려군은 암수(暗數)에 능통하다. 그러기에 이렇게 속임수로 상대를 따돌리는 구양운을 유의 깊게 보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생각과 반대로 정려군은 내색하지 않은 채 뾰로통하게 말했다.
“훔쳐보지 마세요.”
구양운의 손에서 보따리를 건네받은 정려군은 몸을 획하니 돌렸다.
정려군이 몸을 움직이니 교일지도 뒤를 따라 걸었다.
“별 걱정을 다 하는군.”
구양운이 뒤에서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두 여인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구양운도 대충 자신의 몸을 가릴 만한 곳을 찾았다.
마침 눈에 띤 것이 제법 커다란 나무였다.
객잔 뒤 조경(造景)으로 꾸며진 나무 뒤에 몸을 숨긴 구양운은 손에 가지고 있던 의복으로 갈아입었다.
구양운이 늘 즐겨 입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검은색의 경장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정려군과 교일지와 헤어졌던 자리로 걸음을 옮기자 마침 두 여인도 반대편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항상 별 감흥이 없던 구양운도 이번만은 동공이 커졌다.
붉은색 혼례복을 입고 사뿐사뿐 걸어오는 정려군의 모습은 가히 놀라웠다.
정려군의 천하절색의 외모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더기를 걸치고 술만 찾는 정려군과 지금 한껏 아름답게 치장한 그녀는 새삼 달랐다.
어느 누구라도 이 자리에서 그녀를 본다면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위장(僞裝)인 건가요?”
정려군도 이런 옷이 어색한지 얼굴이 다홍빛으로 물들었다. 붉은 비단과 화려한 장신구들은 당장이라도 혼례를 치를 신부 같았다.
구양운은 정려군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혼례 행렬은 누구라도 함부로 방해하기 힘들지.”
또한 혼례를 치를 때 여인들은 진하게 화장을 하기 때문에 분 냄새가 강했다. 도일맹의 후각을 피하기 위해 생각한 대안으로 이것이 혼례단으로 위장한 이유 중 하나였다.
“어찌 됐든 준비는 다 된 것 같군. 이제 가지.”
구양운은 객잔의 뒷문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그 뒤를 정려군과 교일지가 쫓았다.
객잔 뒷문에는 붉은색의 사두마차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축하하는 글자들이 마차의 사방에 붙어 있고 붉은색의 장신구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혼례식은 가마를 타기도 했으나 거리에 따라 마차를 이용하기도 했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가야 하는 구양운은 마차를 선택한 것이다.
구양운 일행이 마차 안에 몸을 싣자 점소이가 고용해 준 마부는 빠르게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 * *
구양운 일행을 놓친 귀살각 아홉 명은 금화객잔을 향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자신들을 유인한 말 세 필을 살펴보고 근처까지 뒤져 보았지만 집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막내 초련운의 시체도 회수할 겸 처음부터 다시 추적하자는 생각에 금화객잔을 향해 그들은 달리고 있었다.
추격망을 꽤 멀리까지 넓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다.
달그락달그락.
그렇게 금화객잔을 향해 열심히 발놀림을 하는 도중이었다. 도일맹의 귓가에 마차 바퀴가 빠르게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앞의 저것은 무엇이냐?”
앞을 보지 못하는 도일맹이 아우들에게 물었다.
율금무가 마차에 시선을 주고는 별 감흥 없는 목소리로 도일맹에게 대답했다.
“혼례단입니다, 큰형님.”
도일맹은 그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람결에 타고 오는 냄새를 맡았지만 여인들의 분 냄새만이 지독할 뿐이었다.
어차피 혼례란 그런 것이니까라고 치부해 버리며 도일맹은 다시 금화객잔을 향해 쏜살같이 나아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귀살각은 목적지인 금화객잔에 도착했다.
귀살각 모두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초련운의 시체를 다시 마주하니 모두의 기분이 금세 울적해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서로 대화조차 나누지 않고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도일맹 역시 막내 초련운을 잃었다는 것은 수습하기가 힘든 고통이었다.
하지만 도일맹은 명명백백한 귀살각의 수장이었다.
언제까지 앉아서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앞으로 남은 일은 원수를 갚고 임무를 끝마치는 것이다.
도일맹은 킁킁 거리며 구양운의 종적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구양운의 냄새는 거짓말처럼 뚝 끊겨버렸다. 시간이 지난 걸 감안하더라도 이건 뒤처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고 밖에 표현이 되지 않았다.
확실히 귀살각에게 두 번째로 추격을 당하는 것이라서 그런지 구양운은 아직까지 요리조리 잘 피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십 년 전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도망치긴 힘들 것이다.’
도일맹은 자신했다.
그것은 월등한 귀살각의 무위 때문에 더 그랬다. 마주치기만 한다면 구양운은 십중팔구가 아니라 십중십은 죽은 목숨이라고 봐도 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구양운의 행적이 묘연하다고 해도 시간의 차이일 뿐이다. 도일맹이 놓친 목표물은 없었고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하지만 구양운의 흔적이 쉽게 보이지 않자 도일맹은 잠시 마음을 접었다. 지금 동생들이 침울하게 있는 것이 마음에 걸러서였다.
“우선은 막내의 시체부터 처리하자꾸나.”
“아닙니다. 어차피 해가 지고도 한참이 지난 시간이라 사람을 부르기도 힘들 겁니다, 큰형님.”
“지금이 몇 시쯤이냐?”
“사경(四更:오전 1∼3시) 가까이 되었을 겁니다.”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도일맹은 정확한 시간을 알지 못했다.
아우들의 대답에 도일맹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구양운을 쫓아야 하기 때문에 귀살각은 초련운의 시체를 마교까지 직접 운반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부려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은 시간……
‘시간이 너무 늦었다?’
도일맹은 갑자기 번개가 머리를 훑고 지나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둘째야, 아까 혼례단이 우리를 지나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큰형님.”
“뉘 집의 혼례가 이렇게 밤에 이루어진단 말이냐?”
도일맹의 말에 귀살각의 모두는 아차 싶었다. 혼례단이라는 생각 때문에 너무 쉽게 넘어간 것이다.
도일맹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또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구양운은 자신의 냄새를 완벽하게 감춘 것이다.
“쫓아가자!”
도일맹의 외침이 들렸다.
그 순간 귀살각의 아홉 그림자는 순식간에 금화객잔을 벗어나 다시 추격을 개시했다.
* * *
구양운의 시선은 마차의 창밖을 향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자신의 생각대로 순조롭게 귀살각을 피하고 있다.
하지만 구양운은 알고 있었다.
그들을 한 번이라도 마주하는 순간 끝난다는 것이다.
교주의 명만 받드는 귀살각의 무력은 강하다. 더군다나 도일맹과 율금무를 동시에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지금 마주친다면 필패다.
‘하지만 그곳까지만 도착하면 안전하다.’
냄새를 없애는 방법이 언제까지 도일맹에게 먹힐지는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또한 시간이 촉박해서 늦은 시간임에도 혼례단으로 위장을 했다. 막내 초련운을 잃은 슬픔으로 정신이 분산된 것을 틈 타 노린 수였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버티진 못할 터. 그렇기에 구양운은 바깥을 바라보며 그곳에 조금 더 빨리 도착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모두 말없이 자신들만의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교일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제 천마총까지 얼마 남지 않았군요.”
십영은 자신들의 행선지가 정려군에게 노출되는 걸 싫어했다. 하지만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십영 혼자서 입을 다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당당히 말을 꺼낸 것이다.
정려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윽한 눈빛으로 교일지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때 구양운이 교일지에 말에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목적지를 향해 마차는 네가 몰도록 해.”
“마부가 있는데 왜 제가 해야 하죠?”
언젠가부터 자신을 부리는 듯한 구양운의 말투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교일지가 말을 꺼낸 것이다.
그 질문에 구양운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래 봬도 혼례단인데 신부가 몰 수는 없는 노릇이고.”
구양운이 시선이 힐끔 정려군을 향했다. 곱게 혼례복을 입고 마차를 모는 건 교일지가 봐도 무리였다.
“내 얼굴은 귀살각이 알고 있지. 그러면 남은 건 너밖에 없잖아.”
“그러니까 왜 제가…….”
“최대한 빨리 가야 돼. 지금 이 자리가 나는 가시방석 같은데 너는 그렇지 않나?”
교일지는 입을 다물었다.
귀살각이 필사적으로 추격하고 있을 거란 걸 아는데 편하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지금 상황은 바람 앞에 촛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구양운은 자신의 뜻에 말없이 수긍하는 교일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솔직히 마부를 이쯤에서 보내야 하는 이유는 더 많았다.
지금 자신들이 가는 길은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다. 애꿎은 마부까지 매장당할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