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참마도 1권 (24화)
명백한 사실은 이 천마총을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생존자가 구양운이라는 것이다.
교일지는 새삼스럽게 과거 암영대원들에게 감탄했다.
구양운은 속으로 정확한 시간을 재고 있었다.
불규칙해 보이나 이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었기에 분명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물론 이 길을 처음 마주했을 때 잃어 버린 동료의 수만 해도 여럿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불기둥이 규칙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과 함께 피할 수 있는 시간 또한 잴 수 있었던 것이다.
구양운은 온 힘을 다해 집중했다.
앞을 보고 걸음을 걷게 된다면 커다란 불기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집중만 흐려질 뿐이다.
구양운을 향해 사방에서 잡아먹을 듯이 불기둥이 다가왔다. 하지만 구양운은 침착하게 그 사이를 유유히 걸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빠르지는 않았으나 두 사람은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교일지에겐 구양운이 움직이는 길만이 유일한 생로였다.
뒤로 바짝 따라붙어야만 했기 때문에 구양운의 따라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크르릉.
갑자기 동굴 안은 짐승이 우는 듯한 소리가 울려왔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한다면 이 소리는 무엇인가 발동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
교일지의 신형을 두고 좌우로 불기둥이 치솟았다. 까딱해서 한걸음이라도 잘못 내디뎠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그때였다.
“아앗!”
너무 근접한 곳에서 솟아오른 불기둥의 영향으로 파편이 교일지의 눈 안을 파고들어 왔다.
반사적으로 교일지의 두 눈이 감겼다.
한 발자국도 틀려서는 안 되는 이곳에서 교일지는 한순간이나마 정신이 흐트러진 것이다.
그때 하필이면 구양운의 걸음이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눈이 잠시 보이지 않았으나 교일지는 알 수 있었다. 바로 앞에서 느껴지던 구양운의 기척이 멀어졌다는 사실을.
‘아, 끝이다.’
교일지는 짧은 순간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불기둥이 당장이라도 교일지를 덮칠 거란 생각이 엄습했다.
다급한 마음에 교일지는 따끔거리는 눈을 억지로 떴다.
하지만 교일지의 눈에 보이는 건 무서운 불기둥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커다란 손이었다.
화악.
구양운의 손이 교일지를 잡아끌었다.
그 손의 악력에 따라 교일지의 몸의 중심이 앞으로 향했다.
얼떨결에 구양운의 품 안에 안기게 된 꼴이었다. 하지만 이 모습이 우스꽝스럽다기보다는 살았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긴장감이 풀리는 순간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저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구양운에게로 다가가면서 발목이 어딘가에 부딪친 모양이었다.
축축한 느낌이 나는 것이 피가 배어 나오는 듯했다.
간발의 차이로 교일지가 서 있던 자리를 향해 불기둥이 치솟았다.
하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한 불기둥이 구양운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으윽.”
구양운의 짧은 신음 소리가 연달아 이어졌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놀란 교일지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오, 오라버니……”
“역시 거치적거리는군. 바짝 쫓아와라.”
구양운은 거친 숨을 내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구양운이 지금 얼마만큼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교일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두 눈을 가린 구양운이 볼 수 없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교일지는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더 이상 말을 하면 방해만 될 거라는 판단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묵묵히 길을 걸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오히려 너무 긴장한 상태였기 때문에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교일지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이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된다면 그것만으로 끔찍했다.
그리고 구양운이 자신을 구해줬을 때 느꼈던 고통은 점점 더 심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한 부상인지 갈수록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은 목숨이 경각에 놓인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 칭얼거릴 정도로 교일지는 어수룩하지 않았다.
그렇게 끝이 없을 것만 같던 불기둥이 어느 지점부터 솟아나지 않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곳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코앞이라 해서 긴장감을 풀 수는 없었다.
앞장서는 구양운도 역시 한 발자국도 조심스럽게 내딛고 있었다.
단 걸음에 저 앞까지 뛰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이내 지워 버렸다.
그렇게 몇 걸음을 더 내디디니 더 이상 솟구치는 불기둥은 없었다.
“휴우.”
그제야 교일지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바로 구양운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요?”
“그래, 걱정을 끼칠 정도는 아니군.”
구양운은 눈앞을 가렸던 허리띠를 풀었다.
구양운의 이마 위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교일지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구양운의 상처를 보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구양운의 어깨에는 화상 입은 상처가 아니라 얇은 갑옷이 비쳤다.
“갑(鉀)?”
교일지는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천마총으로 오는 내내 벌였던 구양운의 이해할 수 없었던 기행이었다.
오는 동안 대장간에 들러서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특이한 물건들을 주문했다.
그때 주문했던 물건 중에 갑옷이 있었다.
“내가 찾는 건 도검을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오. 불에 잘 타지 않는 그런 갑을 찾고 있소.”
구양운이 했던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바로 이 관문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리라.
교일지는 그만 허탈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정신이 나간 건가?”
갑자기 웃는 교일지의 보며 구양운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오라버니는 역시 무서운 사내예요.”
“칭찬으로 듣지.”
구양운도 그 말에 그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아무리 갑이 그를 감싸주었다고 해도 전혀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맨 살에 당했다면 거동조차 불편했을 텐데 다행히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더 따라올 수 있겠나?”
구양운의 목소리에 교일지가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이미 자신은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다. 오기만으로 더 길을 간다면 그것은 짐밖에 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교일지는 쉽게 단념했다.
교일지 스스로도 이제는 깨닫고 있었다. 애초에 이곳을 도착하고 난 다음에 따라올 수 없을 거라는 구양운의 말이 맞았다.
최대한 감췄다고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구양운의 시선은 교일지의 다친 발목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 여기서 기다려.”
구양운은 불기둥이 스치고 지나간 덕분에 엉망이 되어 버린 상의를 벗었다. 소매가 없는 갑만을 입고 있자 구양운의 건장한 몸이 드러났다.
구양운은 벗은 상의를 이용해 교일지의 발목을 최대한 단단하게 감싸줬다.
이곳에서 부목을 할 만한 나무를 구할 순 없었지만 이러면 더 나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할 일을 마쳤다고 생각한 구양운이 다시 일어나 막 앞을 향해 걸어가려고 할 때였다.
“……조심하세요.”
교일지의 주춤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에 구양운의 눈동자가 다시 교일지를 향했으나 그녀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구양운은 말없이 다시 묵묵히 앞을 향해 나아갔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한동안 구양운의 앞에는 한 줄기 빛조차 비추지 않는 온통 어둠이었다.
하지만 이내 커다란 벽이 구양운을 막아서고 있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져 있었다.
한 번 들어서면 다시는 나가지 못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가라.
하지만 그 글귀에 구양운은 비웃음을 띠울 뿐이었다.
이곳을 살아서 다시 돌아온 생존자가 바로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구양운은 품 안에 가지고 있었던 조(爪)를 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끼었다. 일부러 길이가 짧고 칼날의 휨이 크게 만든 무기였다.
안력을 돋으면 글귀가 새겨진 커다란 벽면 옆으로 지금까지보다 좁은 길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성인 남자가 양팔을 벌려서 간신히 벽면이 닿을 만한 좁은 길이다.
“내가 몸이 그대로이길 바라야겠군.”
구양운은 이미 한 번 겪어 봤기 때문에 이 길이 역시 알고 있었다.
처음에 이곳에 도착했을 때 무심코 앞을 향해 걸었다.
오직 한 갈래로만 이루어진 좁은 길.
누구라도 그 앞에 무엇인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
물론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방금 전 지나온 불기둥보다 더 지독한 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서 끝까지 도착한다고 해도 그 앞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길 자체가 함정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이런 곳을 만든 놈의 면상을 한 번 보고 싶군.’
이 길의 탈출구는 바로 하나다.
구양운의 시선이 동굴의 울퉁불퉁한 벽면을 타고 허공으로 향했다.
바로 이 위다.
구양운은 지체 없이 조를 동굴 벽면에 틀어박았다.
끼이이.
조와 마찰되는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지옥이라는 곳이 이런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천마총 안에서는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길이 위로 향한다는 것을 알아냈다고 해서 벽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마냥 쉬운 것은 아니었다.
특수하게 제작한 조가 벽에 박히는 것과 동시에 조 끝의 칼날의 휨으로 군데군데마다 설치된 기관 장치들을 누르고 있었다.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무작정 위로만 향한다면 동굴 벽 사방에서 도검이 날아와 그대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몸이 허공에 떠있는 상태라 도검이 발사된다면 피할 수조차 없음은 물론이었다.
구양운은 조를 틀어박으며 신중하게 벽을 올랐다.
무게의 중심이 양손으로 모이자 교일지를 구하기 위해 다쳤던 어깨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해져 갔지만 구양운은 이를 악 문 채 위로만 향했다.
힘든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은 통로 자체가 좁은 길이다. 그리고 띄엄띄엄 나 있는 기관 장치들로 인해 우습게도 신체 크기가 적당하지 않으면 올라갈 수 없었다.
간신히 여기까지 살아남은 암영대원들도 이곳을 오르다 죽어 나갔다.
“하아, 하아.”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이곳에서 쉴 수 있는 틈이란 게 있을 리 없었다.
꾸준히 올라가던 구양운이 다음 기관 장치를 누르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다친 어깨가 말을 듣지 않았다.
손을 조금 더 위로 뻗어야 했는데 더 이상 팔이 위로 올라가지 않는다.
무리를 준 어깨가 순간 마비된 것이다.
몸의 균형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기관 장치들이 짜임새가 있게 설치가 되어 있기에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었다.
구양운의 몸은 순식간에 균형을 잃었다.
간신히 한 손으로 떨어지지 않고 버티고 있던 구양운의 귓가에 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릉.
구양운의 시선이 자신을 지탱해 주고 있는 손으로 향했다. 기관 장치를 누르고 있어야 될 조가 구양운의 몸을 지탱하는 덕택에 금방이라도 빠질 것 같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구양운의 자세조차 금방이라도 떨어져 땅 아래로 곤두박질칠 정도로 위험했다.
그때였다.
스르릉.
매달리고 있는 벽면에서 수십 개의 검이 삐쭉 머리통을 드러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완전히 조가 빠지지 않았기 때문에 기관 장치도 온전히 발동되지 않았다. 그래서 검이 완전히 발사되지 않은 것이다.
검 날이 구양운의 목젖까지 다가왔다.
따끔하다고 느끼는 순간 피인지 땀인지 모르는 물줄기가 목덜미를 타고 흘러 내렸다.
‘빌어먹을.’
구양운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오래 버티지도 못할 뿐더러 조가 빠지는 순간 죽은 목숨이다.
망설일 시간조차 없었다.
순식간에 구양운은 버티고 있던 한 손으로 온 힘을 실었다. 순간이나마 자신의 몸을 공중에 띄울 수 있게 한 것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조가 기관 장치를 누르지 못하고 완전히 빠져 버렸다.
당장이라도 구양운을 찢어발길 듯 사방에서 검이 찔러 들어왔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구양운은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검을 발로 밟았다. 그리고 그 탄력으로 더 위로 몸을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