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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전 1권(17화)
第七章 수호신승의 보구(4)
연화봉의 언덕길을 유유히 내려왔다. 날아갈 듯 발걸음이 가볍고 콧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신난다! 미령이를 되돌릴 방법을 방장 스님이 알아냈다!
나는 폴짝폴짝 뛰며 산을 내려갔다. 정말 누가 보면 미친놈인 줄 알 것이지만 보는 눈이 없으니 상관없겠지.
물론 미령이를 되돌릴 방법에 대해 들은 것은 아니지만, 방장 스님께서 알고 있다고 집법당주님은 말씀하셨다.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감히 무례하게 내 여동생의 몸으로 생활하는 고서와는 이제 안녕. 사랑스러운 내 여동생을 내 여동생의 몸으로 만날 거란 기대감에 나는 크게 들떴다.
“그렇게 좋은가?”
“당연하지!”
나는 대답하며 옆을 바라보고는 딱 멈추었다.
내 옆에는 낡은 방립과 장포를 입은 대나무같이 호리호리한 사내. 고서 ‘하현’의 주인 금대호가 볼썽사납게 폴짝폴짝 뛰며 내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우와아앗!”
화들짝 놀라 몇 걸음 물러났다. 간 떨어지겠네. 이 사람 직업이 살수라더니 전혀 기척 같은 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날 따라하며 말했다.
“이건 무슨 춤인가? 꽤 재밌긴 하다만 보기 안 좋아.”
나는 서둘러 거리를 벌리고 자세를 잡았다. 주먹을 불끈 쥐고 언제라도 출수할 수 있게 가슴 앞으로 손을 모았으나, 조금 전 집법당주님과 대련할 때 너무 힘을 써서인지 볼썽사납게 팔이 부르르 떨렸다.
“이번엔 무슨 용건입니까.”
잔뜩 경계심을 끌어올리며 말하자 그는 뛰는 걸 멈추고는 쓰고 있는 방립을 슬쩍 들추었다. 날렵하게 째진 눈매가 보였다.
“알고 있겠지만 내 동료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거든. 왜 오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미령이…… 아니, 고서는 줄 수 없습니다.”
딱 잘라 말하자 금대호는 역시 알고 있었냐며 말했다.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네. 이건 규칙이야. 새로운 고서가 발견되면 회수한다. 그게 고서를 지닌 모든 자들의 의무거든. 그래서 제안을 하나 하려고 왔네.”
“거절합니다. 고서는 절대 못 줍니다.”
내 여동생이 걸려 있는 문제다. 아직 듣진 못했으나 방장 스님께서 미령이를 되돌릴 방법을 찾았다 했다. 이 시점에서 고서를 빼앗겨 버릴 순 없어.
주먹을 불끈 쥐고 사납게 노려보자 금대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런이런…… 그런 자세로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 하는가. 만약 내가 기분이 몹시도 불쾌해져서…….”
스윽―
그의 몸이 조금 흔들린 듯하더니 돌연 내 앞에 나타났다. 난 갑자기 눈앞에 가득 찬 사람의 어깨에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귓가로 죽음을 예견하는 것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자네를 죽인다면?”
죽는다. 그런 예감이 들어 나도 모르게 주먹을 휘둘렀다.
“저, 저리 가!”
주먹은 애꿎은 허공만 갈랐다. 금대호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이 정도로 가 주면 되겠는가?”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금대호는 내가 있던 곳에서 열 걸음이나 떨어져 있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는 것이다. 그는 다리를 꼰 자세로 편안하게 무릎 위에 양손을 포개 올렸다. 그의 방립이 봄바람에 살짝 들어 올려졌다가 다시 눈 위에까지 내려앉는다.
“예의란 지켜야 하는 거야. 내가 이렇게 자네 말을 듣고 가 줬으니까 자네도 내 말은 들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침이 꿀꺽 넘어갔다. 등줄기로 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거짓말이 아니라 저자가 마음을 조금만 비뚤게 먹어도, 난 그 즉시 죽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부는 말했다.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그가 소림에서 사고를 치지는 않는다고. 그 말에 대한 믿음이 무너져 갔다. 저자는 당장에 그 어떤 사고라도 칠 준비를 끝마친 사람 같았다. 나는 침을 삼키며 자세를 바로했다.
“좋습니다. 들어 보도록 하죠.”
“그래, 잘 생각했네. 나도 좀 고민했거든.”
무엇에 대한 고민일지는 상상하기도 싫었다.
이윽고 그는 꽤 긴 얘기를 시작했다.
“우리의 목적은 새로운 고서를 회수해 가는 걸세. 하지만 수호신승. 그래, 자네의 사부와의 마찰은 내키지 않아. 싸운다 해도 우리가 이기지 못한다는 판단이거든. 물론 지지도 않겠지만, 그 와중에 우리의 고서나 자네 사부의 고서가 소멸될 수도 있어. 알다시피 고서는 정말 긴 시간이 걸쳐져서야 생성돼. 그것도 혼이 어리지 않는 물건들이 허다하지. 괜히 고서가 될까 봐 오래된 장물을 사는 이들도 한둘이 아니지만, 모두 허탕이야. 즉, 다시 말해 고서의 가치는 굉장히 크다는 걸세. 그래서 강경책은 피하고 싶은 마음이야. 특히나 이번에 발견된 고서는 더욱 그 가치가 남달라. 거기다 묘한 상황까지 끼어 있지. 고서의 혼이 자네 여동생의 몸에 들어갔으니까. 그래서 현재 고서는 책이었던 몸과 혼이 들어간 자네의 여동생으로 나눠져 있네. 이래서 곤란해졌어.”
나는 그 말을 곰곰이 되뇌어 보았으나 도무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뭘 말하고 싶은 겁니까?”
“우리도 실적이란 게 중요하단 말이네. 상부에서 내려진 명령은 정도껏 따라야 우리의 고서가 안전하거든.”
하지만 그 명령을 따르지 못할시, 지니고 있는 고서는 안전하지 못한다― 는 말이었다.
조금 이상했다. 그, 아니 고서의 주인들에겐 윗선이 있다는 말인가? 빼앗기기라도 한다는 걸까? 무엇보다 고서를 관리한다니, 대체 어떤 조직인지 궁금했으나 물을 기회가 없었다.
그가 결론을 말해 온 것이다.
“제안을 하나 하지. 고서의 몸과 혼. 둘 중 하나를 준다면 마찰은 없을 것이네.”
열 흘 뒤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금대호는 사라졌다.
***
복잡한 심정을 달래려 한달음에 방장 스님을 찾아뵈었으나 오늘은 몹시도 바쁘셔서 만날 수 없다는 대답만을 들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멍하니 방에 앉아 천장 구석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금대호에게 들은 말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금대호와 가타부타 이들은 고서를 회수하기 위해 소림에 온다. 하지만 내 사부인 수호신승과 마찰을 일으키기는 싫다. 만약 고서의 회수를 못한다면 자신들의 고서를 ‘조직’의 상부에게 빼앗기게 된다. 때문에 정도껏 상부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나눠진 고서 중 하나를 회수해 가고 싶다는 말이었다.
타당한 말이라 의심이 들진 않았다.
그런데 만약 내가 거절한다면 어떻게 될까.
걷잡을 수 없는 혈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40년 전에 벌어졌던 혈검의 난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나, 그 하나로 엄청난 인명피해가 일어났다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그런 고서를 지닌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온다면.
사부가 아무리 강하다 하여도, 그 혼자 여럿을 상대하며 다른 이의 목숨마저 지켜 낼 수는 없겠지.
하지만 고서가 나뉘어졌다면 미령이 역시 나뉘어진 것이었다.
방장 스님께서 방법을 찾아내신 마당에 미령이의 몸과 혼, 둘 중 하나를 줘야 한다는 건 정말 가혹한 일이었다.
당연히 난 세상에서 내 여동생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림을 등한시할 수도 없다. 양심이 있다는 건 참으로 괴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맙소사. 제자마저 고서가 되어 버리고 말았어.”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부가 울상을 지으며 쓸데없는 말을 내뱉었기에 무시하고 다시 천장 구석만 바라보았다.
“게으르기 짝이 없던 제자였지만 삶의 낙이었거늘…… 이렇게 된 거, 좋아. 팔자. 팔아서 벌금 내고 소림을 뜨는 거야!”
슬퍼하는 것 치고 전환이 너무 빠르잖아. 고서라면 비싸겠지, 라는 사부에게 난 소리쳤다.
“송구하게도 아닙니다!”
“뭐야, 고서가 된 것이 아니었느냐?”
“될 리가 없죠.”
“곧 될 생각은 없고?”
“절대 없으니 사부의 고서를 팔아 버려요.”
“그거 좋은 생각이로구나. 하지만 먼저 달마역근경을 팔자.”
이제는 사문마저 배신하려 드는 사부를 보며 난 한숨을 내쉬었다.
황금 일만 냥이라는 어마어마한 벌금형과 더불어 소림에서의 종신형에 처한 사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벌써부터 내 방 안에는 안 쓰는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이다.
아마도 다 내다 팔려는 것이리라.
나는 물끄러미 잡동사니를 정리하고 있는 사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강호에 나가고 싶으세요?”
“이 사부의 소망은 죽기 전에 강호행을 하는 것이니라. 멋지겠지? 지금껏 세상이 몰랐던 절대고수의 깜짝 등장은 참으로 즐거울 게야.”
“세상을 깜짝 놀래킬 만한 절대고수가 황금 일만 냥을 갚지 못해, 세상에 나가지 못하는 쪽도 즐거울 것 같은데요.”
사부는 제자가 드디어 말로써 자신을 죽이려 한다며 슬퍼하는 척했기에 상대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복잡하단 말이다.
고개를 돌렸다. 구석에는 여전히 란이 앉아 있었다.
미령이의 몸에 들어간 고서, 란은 말이 별로 없었다. 움직임도 없었다. 걷는 것도 잘 못하고 맛없는 벽곡단만 먹고 있다.
란의 혼이 들어간 미령이의 몸.
미령이의 혼이 들어 있는 책.
둘 다 포기할 수 없다. 어떻게든 미령이를 되돌려야 하니까.
가만. 그런데 열흘이라는 시간이 있다면 그 안에 미령이를 되돌리고 고서니 뭐니 알 거 없으니 줘 버리면 그만 아닌가? 그런데 만약 그게 안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부.”
“뭐냐?”
사부는 내 방에 쌓아 둔 잡동사니들에 나름의 가격을 매기며 시큰둥하게 날 보았다. 흘낏 보니 내 노리개는 왜 껴 있는 것이며, 다 낡은 짚신엔 은 세 냥이라는 놀랍도록 과장된 가격이 붙어 있는 것이었다.
내 노리개는 옆전 세 냥짜리였으므로 다시 빼앗아온 뒤 사부에게 말했다.
“열흘 남았데요.”
사부가 무슨 소리냐고 했기에 나는 조금 전 금대호와 만났던 일을 설명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해결하기 어려운 일은 남의 지혜를 빌리면 된다. 사부는 나와는 달리 오래 살았으니 나보다는 지혜로울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음…… 어렵구나. 네 여동생을 원래대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자세히는 모르겠다만. 만약 그 방법이 열흘 안에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침이 꼴깍 넘어갔다. 긴장하는 나와는 달리 사부는 천장 구석을 응시하며 결의를 가득 담아 말했다.
“그놈들과 싸울 수밖에 없겠지.”
물론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 말이긴 하지만, 정말 그렇다고 사부를 싸우게 둔다는 것도 걱정스럽다.
“그냥 제가 란의 주인이 되는 건 어떨까요? 고서의 주인이 둘이라면 어떻게 상대가 될 지도 모를 텐데.”
“안 된다.”
“왜요?”
“그건…… 그런데 제자야. 내가 지닌 고서가 보고 싶지 않든?”
갑자기 고서가 보고 싶지 않냐는 소리에 난 눈을 가늘게 뜨고 사부를 바라보았다. 시작됐다. 사부는 대답하기 곤란한 일이 있으면 이렇게 대화의 주제를 돌리는 버릇이 있는 것이다. 평소에는 넘어가 줬으되, 지금은.
“지금 아니면 안 보여 줄 거다.”
“보여 주세요!”
이러면 넘어갈 수밖에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