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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동네에는 1권 (8화)


20대 중반의 나이, 한창 혈기왕성하고 뜨거운 연애를 해도 모자랄 시기였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가졌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와 같은 미녀가 나에게 먼저 대시해 온다면 절을 하고 기도를 해도 모자랄 정도였지만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그런 걸 용납하지 않는다.
꽈악.
천장을 향해 손을 뻗어 허공을 잔뜩 움켜쥐었다.
그러자 강철 같은 팔에서 굵은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오고 뇌의 신호에 따라 근육은 철갑처럼 변해 날아오는 총알도 튕겨 낼 만큼 단단한 새로운 물질로 변화한다.
‘히어로라…….’
이 세상 모든 어린이들의 동경의 대상이자 아직 꿈을 가진 이들의 말로는 표현하지 않는 가슴속의 로망과 같은 직업이다.
하지만 히어로라는 것은 결코 편하지 않다.
언제나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입장에, 그 싸움이 결코 승리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알고 있으며, 그 싸움이란 게 이 세상 모두에게 언제나 이득일 수만은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뿐이라면 히어로 본인이 몸을 단련하고 기술을 연마하고 신념을 더욱 굳건히 한다면 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뛰어넘는 히어로만의 문제는 바로 인간관계에 있다.
히어로는 그들과 같은 히어로밖에 사귈 수가 없다.
물론 그들 역시 일반인과 섞여 살아가는 사람이니만큼 아예 관계가 없을 수는 없다. 거기다 일상생활 속에 반드시 필요한 정도의 인연은 히어로 스스로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위장막 역할도 하기에 어떤 히어로에게나 일반인과의 일정 수준의 친교는 필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히어로라 불리는 이들의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는 없었다.
히어로는 언제나 숨겨야 할 게 많은 입장이므로 같은 직종의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자신의 속내를 터놓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라. 어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앞에 가서 어떤 적이 싸우기 힘드네, 싸우다가 상처가 났는데 보험 처리가 힘드네, 악당을 때려잡는데 박봉에 주변에선 알아주지도 않는다 하는 그런 고민을 어찌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
취중진담으로 술에 취해 쏟아 놓거든 듣는 입장에선 술주정 한 번 특이하다 싶을 뿐일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겐 친구가 없다.
그들의 일은 언제나 고독하기 마련이다.
동료를 두는 경우도 있지만 의외로 그들은 혼자 싸우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동료가 있다 한들 그들 모두가 진정한 친구일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애당초 평소에도 모든 것을 숨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같은 직종에 종사한다고 아무한테나 자신의 속내를 터놓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특히나 힘의 우위와 상하 관계가 등급으로 표시되는 이런 세계에선.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특징은 연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은 결코 민간인을 사귈 수 없다.
우리의 적은 끝이 없고, 그런고로 싸움 역시 끝이 없다.
그렇기에 언제나 목숨의 위협이 존재하고 다칠 위험이 존재한다.
이 세상 어떤 이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다치는 것을 좋아하고 목숨을 잃기를 바라겠는가.
이것은 사실 민간인들보다 히어로들이 더욱 심하다.
기본적으로 히어로란 존재는 본질적으로 악한 사람이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이 다칠까 봐 밤마다 괴물들을 무찌르러 목숨 걸고 뛰어다니겠는가?
물론 그들이 평생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게 아니다.
그들의 마음은 기본적으로 착함에 베이스를 두고 성장한다. 그렇기에 악한 짓을 저지르면 스스로 반성 할 줄 알고 스스로의 잘못이 무엇인지 이해하려 든다.
물론 그들 역시 사람이기에 이해한 걸 실행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까지는 오래 걸리지만, 이건 분명 일반적으로 본인의 실수를 남에게 떠넘기거나 합리화하려 하는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다.
보통 아주 가끔 존재하는 노선을 바꾼 히어로들은 대게 심한 마음고생을 한다. 그리고 그 마음고생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상처투성이로 남는다.
그 상처가 수렁이 되어 악함으로 각성을 하는가 하면, 본인의 정신을 갉아먹어 스스로 지니고 있던 본래의 능력마저 잃는 경우가 많았다.
각설하고 어쨌든 히어로란 존재는 본질이 착한 이들이다.
남에게 상처 주는 것을 싫어하고 남이 아픈 것보다 자신이 아픈 것을 더 다행으로 여기는 이들.
자신이 싸우다 난 상처를 자신의 연인에게 보여 줄 수 있을 리 없고 자신이 만약 크게 다치거나 사망할 경우 연인이 슬퍼할 것을 더욱 걱정한다.
그런 그들에게 민간인 연인이란 건 그야말로 양날의 검.
이런 끝없는 진흙탕과 같은 싸움 속에서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자신을 강하게 해 주는 존재.
하지만 반대로 연인에게 상처 입히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본인의 가장 큰 약점이 될 수 있는 존재. 그래서 민간인 연인은 양날의 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사귀면서 ‘나는 히어로야. 그로 인해 너는 목숨의 위협을 받을 수 있어. 그리고 내가 다치는 건 걱정하지 마, 만날 목숨을 내놓고 싸우니 안 죽고 다치기만 하는 것도 다행이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한들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애당초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규율에 어긋한 행위를 한 것이므로 수많은 제제와 감시 속에 시달리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뭐, 지금에 와서는 나와 같은 히어로 정신에 위배되는 예외의 인물들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상황이 설명한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물론 정의감이라는 측면에서 나는 분명 히어로라는 존재와 거리가 멀다.
하지만 나 역시 히어로고 회사의 규율에 잡혀 있는 몸.
기본적으로 비밀 엄수와 같은 기본 규율을 어길 수도 없고 이 세상에 부모님 외에 나를 걱정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 역시 싫었다.
아마 나도 결혼이란 것을 하게 될 테지만 최소한 지금의 생각이 그때까지 유지된다면 내 옆에 서는 건 박은빛이라는 여인이 아닐 것이다.
“후우…….”
‘애인이라.’
움켜쥔 허공을 자유롭게 놔주었다.
힘을 푼 팔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을 느끼면서 다시 한 번 나의 처지를 고민해 봤다.
금전적인 문제, 학업적인 문제, 지금 내 직업과 관련한 문제, 그리고…….
“내년까지 살아 있을지도 잘 모를 일인데 말이야.”
물론 내 새해 첫날을 살아서 보낼 수 없다면 지금이라도 뜨거운 사랑을 한 번 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남겨진 사람을 만드는 건 누가 뭐래도 안 좋지, 안 좋아.”
결코 남겨진 사람에게 날 걱정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애당초 시작을 안 하면 될 일.
“……그래.”
결론은 났고 더 이상의 고민은 무의미해졌다.
후우……
그렇게 고민을 덜어내고 보니 머리는 가벼운데 가슴이 너무 무거웠다.
답답한 통증에 깊은 한숨을 내쉬어도 봤지만 애당초 겨우 한숨 따위로 가슴에 쌓인 게 흩어지지도 않거니와 나로서도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운동이나 더 할까.”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자마자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물구나무를 섰다.
아까 달리기를 통해 깨달은 바가 있다.
‘굳이 더 힘든 운동을 찾을 필요는 없어, 그냥 운동을 힘들 때까지 하는 거야!’
백 번이 안 힘들면 천 번을, 천 번이 안 힘들면 만 번을 하면 된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몸 굴리는 게 제격이지.’
군대에서 이등병들을 빡세게 굴리는 이유라고나 할까.
오늘은 근육통 속에 잠을 청할 생각이다.





4 배려 깊은 사나이



근육통에 몸부림치며 잠이 든 다음 날.
혹시라도 오늘 학교에서 박은빛, 그녀를 또 만나면 어떡하지?
그저 떠올린 것뿐이지만 오늘 강의에 필요한 책을 주워 담다가 멈칫 했다.
어제 이미 그녀에 대한 결정을 내린 상태지만 어디 인간관계에 있어 맺고 끊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던가.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녀를 겪어 본 바로는 단순히 그녀를 무시하고 지내는 정도로는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생각해 보건대 그녀는 그럴수록 더욱 자신을 어필하고자 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에게 직접 의사를 전달하는 건데…….
‘대체 뭐라고?’
직접 가서 그녀에게 ‘당신이 싫어요, 마음에 안 들어요’라고 말한다면 그녀에게 상처를 남길 것이다.
뭐 그런 걸 신경 쓰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에게 있어 이것은 정말이지 큰 문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밀어내는 것보다 나한테서 알아서 떨어져 나가는 게 가장 좋긴 한데.’
하지만 어떤 수로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말이 있지만 언제 그 마음이 언제쯤 멀어질 줄 알고 피해 다니겠는가.
게다가 그녀는 지금 집의 위치까지 모두 알고 있는 상황.
학교에서 피해 다닌다고 만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외에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음. 일부러 더러운 모습 같은 걸 보이는 건 어떨까? 정떨어지게.’
TV 시트콤 같은 곳에서 보면 많이들 이런 방식을 고수하긴 하는데 사실 성공하는 건 별로 본 일이 없는 것 같다.
픽션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대게는 결국 본인 입으로 자백하고 찬물 맞고 끝나는 게 보통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 드라마와 현실은 다르니까! 최대한 진상을 피우면서 나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게 해야겠어!’
다 챙긴 가방을 등에 메고 말 그대로 두 주먹 불끈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획의 절대 성공을 확신하며 말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시간을 돌려 나에게 다시 한 번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절대 이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강의가 끝나고 나오는 길.
‘휴, 오늘은 안 마주치는 건가? 하긴, 오늘 공강일 수도 있는 거고, 개인 사정 때문에 학교를 못 나왔을 수도 있는 거지.’
학교에 오는 길부터 오늘 그녀를 만났을 때 할 행동에 대해 온갖 시뮬레이션을 그려 보고 필승을 다짐하며 그녀와 만나게 될 순간을 기다렸지만 막상 집에 갈 시간이 되고 보니 그녀를 안 만나고 집에 가도 되는 것이 정말 다행으로 느껴졌다.
그때.
“태일이 오빠아!”
흠칫!
그야말로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불러 보이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난 금방 알 수 있었다.
하긴 왜 모르겠는가. 방금 전까지도 그녀 생각뿐이었고 주말에도 만나 커피마시며 대화를 하던 여인인데.
그리고 내 주변에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여자가 어제 커피숍에서 나의 나이를 알게 된 한 명뿐인데 모를 리가 없었다.
‘정말 양반은 못 되겠군.’
“그, 그래.”
사실 무시하고 갈까 생각도 했지만 계획한 바도 있겠다, 언젠가 부딪힐 일이었으니 지금 당장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색한 미소로 대답하는 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뛰어오는 그녀를 보자니 문득 죄책감이 솟구쳐 올랐다.
‘젠장, 지금 내가 뭔 짓을 하려는 거지? 지금 내가 하려는 행동이 맞는 거야? 저 밝은 얼굴을 찌푸린 얼굴로 바꾸려는 게?’
하지만 그래도 우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누군가 심장에 깊은 상처보다는 옅은 흠집으로 남고 싶은 게 내 심정이었다.
‘그래, 넌 할 수 있어.’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으며 숨을 고르는 날 향해 어느새 다가온 그녀가 언제나처럼 팔을 덥석 끌어안았다.
팔뚝에 와 닿는 뭉클한 감각에 정신이 아득해져 왔지만 지금 나에게는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오, 오늘 같이 밥이라도 한 끼 할까?”
“어?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내 말이 무척이나 의외라는 듯 동그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모습에 그냥 내일 할까, 라는 생각이 떠오르며 다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더 굳혔다.
‘아냐, 누가 뭐래도 매는 먼저 맞는 게 좋은 법. 그리고 나한테서 멀어져야 나 말고 훨씬 좋은 남자를 만날 확률이 더 높아질 테니.’
“응? 오빠! 어디로 갈 건데? 응응? 아이 참. 무슨 생각해.”
“아, 이 앞에 중국집 새로 생겼더라고. 거기로 가자.”
사실 우리 둘 관계는 연인이라고 하기엔 서로 간에 별로 아는 것도 없고, 만난 지도 얼마 안 되었지만 그녀는 분명 나를 대함에 있어 연인처럼 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그게 싫을 리 없지만 그녀를 떨쳐 내야만 하는 나로서는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