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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동네에는 1권 (9화)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그녀를 밀쳐 내기엔…… 도저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딸랑.
“어서 오세요.”
‘반드시 오늘 한 번에 성공해야만 한다. 이미 식당에 들어섰어.’
사실 이러한 계획은 천천히 여러 가지 안 좋은 면을 보여 주면서 서서히 멀어지게 하는 게 가장 좋았지만 나에겐 시간도, 돈도 없었다. 아니, 시간보다는 돈이 없는 게 맞았다.
‘크윽. 가볍게 자장 셋트만 해도 만 원대!’
“너, 뭐 먹을래?”
“응? 난 자장면.”
‘휴, 다행이다.’
솔직히 말하면 짬뽕을 시킬까 봐 조금 두려웠었다.
“여, 여기요! 아주머니!”
“네.”
“여기 자장 셋트로 하나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순식간에 빠져나간 지출에 머릿속으로 수많은 계산이 오고 갔다.
‘알바비가 70만 원, 이번 달 월급은……. 50마리는 못 채웠지만 49마리니까 어느 정도 기본급은 나올 테니까…….’
여자를 만나면서 속으로 이런 생각을 열심히 하고 있는 날 찌질하다 욕해도 좋다. 구차하다 욕해도 좋았다.
하지만 현실을 따지지 않는 것은 곧 이상일 뿐, 카드값은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사이 우리 앞에 대령된 물수건과 접시에 곱게 담긴 단무지.
‘조, 좋아! 작전 개시다.’
나는 우선 앞에 놓인 물수건을 집어 들었다.
그러면서 슬쩍 앞에 앉은 그녀를 보니 뭐가 그리도 좋은지 내 얼굴을 보면서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
‘크흑, 미안해!’
이제 곧 얼굴을 찡그릴 그녀에게도, 지금 여기서 식사를 하고 있는 손님들에게도, 그리고 지금 손에 들린 물수건에게도!
미안한 마음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지만, 다시 한 번 심적 갈등을 표현하고자 하는 입을 굳게 다물고 뻔뻔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험, 여기 왜 이렇게 덥지?”
슥슥.
물수건으로 가볍게 손을 닦아 가며 천천히 그 높이를 올렸다.
손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팔목으로, 그리고 팔뚝으로, 그리고…….
‘응?’
예상했던 시원한 감촉이 느껴지지 않아 굳게 정면만을 응시하던 시선을 돌려 손의 위치를 확인했다.
‘이런 미친! 팔뚝이 두꺼워서 옷 사이로 손이 못 들어가잖아!’
사실 옷만 해도 꽉 끼는 탓에 매일 입으면서도 곤욕인데 이 부분을 생각지 못한 건 나의 명백한 실수였다.
‘젠장, 그럼 방향 선회다.’
나는 재빨리 손을 당겨 위치를 목으로 조준하고 문질렀다.
슥슥슥.
“어허, 시원하다.”
하지만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으니…….
“오빠, 많이 더워? 에어컨 틀어 달라고 할까?”
그러면서 자리에서 직접 일어나 에어컨을 향해 간다.
“어이구, 손님 많이 더우신가 보네. 에어컨을 좀 더 세게 틀어 드릴게요.”
크흑, 뭐야, 이 사람들. 너무 착해!
더러운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질 만도 한데 목표로 한 사람은 오히려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질 않나, 거기에 식당 주인도 합세해 에어컨 방향을 조절하네 마네 실랑이를 벌인다.
“크흑.”
‘내가 이 착한 사람을 데리고 뭐하는 거지?’
순간, 찾아온 심한 자괴감에 정신이 혼란스러웠지만 이미 기호지세, 쉽게 멈출 수는 없었다.
“오빠, 아직도 더워?”
그사이 에어컨 조절을 끝냈는지 자리에 돌아온 그녀는 이번엔 내 앞자리가 아니라 내 옆자리에 앉아 자신이 쓰던 물수건을 들어 올렸다.
슥슥슥.
‘흐헉! 제, 제발 그러지 마! 다들 쳐다보잖아!’
본인이 직접 물수건을 들어 내 얼굴이며 목을 닦아 내기 시작하는데 그와 동시에 감각으로 느껴지는 엄청난 시선들이 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어머, 많이 더운가? 얼굴이 빨개.”
“아, 아니야. 괜찮아. 정말 괜찮아.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아.”
“그래? 더우면 말해. 다 해 줄 테니까.”
‘니가 뭘 할 수 있는데! 제발 그런 말로 날 두근거리게 하지 말라고, 이 헌신적인 여자야!’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앞자리로 돌아가는 그녀를 보면서 다시금 내 행동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 하는 법.
나는 무를 써는 대신에 단무지를 단숨에 집어 입에 넣고…….
“쭙쭙쭙.”
빨아 먹기 시작했다.
‘후후, 그야말로 궁극의 더러움이지. 사탕도 아닌 단무지를 입에 물고 쭙줍 빨아 먹는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한 꼴이야. 안 그래?’
게다가 키 188㎝의 근육으로 가득 들어찬 곰 같은 남자가 그런 행동을 한다면 그야말로 호랑이에 날개를 단 격! 나는 단숨에 그녀의 얼굴을 찌푸릴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분명 그녀의 표정이 이전과는 달라졌다.
조금은 풀린 듯한 눈에 입은 멍한 듯 살짝 벌어져 있었고 시선은 나의 입의 고정시킨 채 그 움직임에 따라 뭔가 부족한 듯, 안타까운 듯 내 동작에 맞춰 입을 오물거리는……!
와그작, 와그작, 와그작!
곧장 입에 물려 있던 단무지를 거침없이 씹어 삼켰다.
“아!”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간 소리지만 분명 그녀의 안타까운 듯한 짧은 신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젠장, 이게 신음 소리를 낼 일이야? 안타까울 일이냐구!’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느낌은 나이트메어들과 싸우던 첫날, 실전의 긴장감에 몸을 떨던 그 순간과도 같았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념의 해일 속에서 겨우 정신을 다잡고 때마침 눈앞에 차려져 나오는 자장면과 탕수육, 그리고 탕수육 소스를 보았다.
‘좋아! 이거라면……!’
드디어 회심의 일격을 날릴 수 있는 순간이 왔다!
나는 눈앞에 탕수육이 나오기 무섭게 소스를 들어 탕수육 위에!
촤악!
부.어. 버. 렸. 다.
‘으하하하핫! 어떠냐! 나의 이 잔악무도한 더러움이! 나는 같이 먹는 상대의 취향 따위는 배려하지 않는, 그야말로 더럽고 치사한, 그런 나쁜 놈인 것이다!’
사실 평소라면 소스 그릇은 따로 두고 같이 먹는 사람을 위해 하나씩 찍어 먹었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이미 눈이 돌아간 상태였기에 정말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잔악무도한 짓을 태연하게 저지르고 말았다.
파르르르.
그 순간, 눈에 들어온 떨림.
‘뭐, 뭐야. 내가 너무 심했나?’
고개를 푹 숙이곤 젓가락조차 놓은 채 손은 아예 테이블 밑으로 넣고 몸을 떨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그리고 방금 내가 한 짓이 눈에 들어왔다.
‘헉! 지금 내가 무슨 짓을?!’
이렇게 순진무구하고 착한 여인을 앞에 두고 이토록 잔인하고도 탕수육이라는 튀김의 본연의 맛을 즐기는 이들에게 고통스러운 만행을 저질러 버리고 말다니!
그야말로 인간 실격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으로 인터넷에서 봤던 온갖 것, 잡담들이 떠올랐다.

―야! 어제 중국집에서 커플이 탕수육 먹다가 남자 친구가 소스 부어서 대판 싸움 ㅋㅋㅋ
―아나, 오늘 오랜만에 와이프랑 중식 시켜먹었는데 와이프가 탕수육 소스 부어 놓는 바람에 부부 싸움함. 이혼할 거임.
―어제 남자 친구랑 중국집에 갔는데, 남자 친구가 탕수육이 나오니까 소스를 부어 버리는 거예요. 하, 이 개념 없는 남자 친구 어떡하죠? 헤어져야 할까요?

내용들 전부 결과만 따지면 내가 원하는 상황과 들어맞게 끝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의 것은 내가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 상대를 전혀 배려하지 않다니!
얼마나 예의범절에 어긋난 짓이란 말인가. 이건 더럽고 안 더럽고를 떠나 한 사람이 탕수육을 찍어 먹을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인권을 유린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저, 저기!”
아무래도 사과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손을 뻗는 순간!
“아! 찾았다!”
“엥?”
그녀의 테이블 밑에서 솟아난 카메라를 보는 순간, 멈칫한 손이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갔다.
찰칵!
“와아, 이 탕수육, 진짜 맛있어 보여요! 그쵸? 어쩜 이렇게 소스도 예쁘게 골고루 뿌리는 걸까, 우리 오빠는?”
찰칵, 찰칵!
‘그럼 그렇지…….’
애당초 그녀의 평소 모습으로 보건대 이런 거에 신경 쓸 것이라고 생각한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에휴, 그래, 내 탓이다. 애당초 잘못 생각한 내 탓.’
연신 카메라를 찍어 대는 그녀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픽 웃어 보인 나는 손을 뻗어 탕수육 하나를 집었다.
“앗! 오빠, 아직 드시면 안 돼요! 어? 아니다. 그대로 있어 봐요. 제가 예쁘게 찍어 줄게요.”
“…….”
본의 아니게 허공에 젓가락을 쥐고 얼어 있게 된 나는 한참 뒤 그녀가 찍은 사진을 모두 확인하고 나서야 탕수육을 먹을 수 있었다.

* * *

터덜터덜.
힘없는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오는 길.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말렸다.’
오늘 일은 분명 전적으로 내 실수였다.
내가 의도한 바와 계속해서 빗나가는 것에 대해 나 자신의 자제력을 잃고 상대방의 페이스에 말려 버리다니, 뼈아픈 실책이었다.
덕분에 중국집에서 할 수 있는 최후이자 최악의 추태인 자장면을 활용한 기술도 선보이지 못하고 그냥 나와 버렸으니, 이게 내 얼굴이 팔리지 않은 것에 대해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준비한 것조차 실행해 보지 못하고 패퇴한 것에 대해 아쉬워야 하는 것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게다가…….
‘게다가 먼저 더치페이를 제안하는 여자라니…….’
더치페이!
한국에서 남녀 사이에 있어 언제나 당연한 듯 남자에게 부담되어 오던 식비였다.
게다가 주머니가 무거운 건지, 아니면 머리가 가벼운 건지, 오직 여자 편만 드는 남자들에 의해 더욱 고착되어 온 식비 문화는 나같이 주머니 가벼운 한국 남자들에게 있어 최근 대두되는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였다.
사실 남자 입장에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허세 좀 부려 보고 싶은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 남성이 함께 식사한 여자의 식비를 같이 지불하는 것에 대해서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것이 어느 순간 당연한 사회 문화로 고착화되면서 호의를 권리로서 아는 여자들이 등장함에 따라 최근 많은 문제와 얘기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같이 대두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더치페이라는 것인데, 이른바 나눠 내기라고 할 수 있었다.
함께 밥을 먹었으니 같이 돈을 나눠 내는 것이 맞다, 는 것인데 사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기준에서는 획기적인 부분이 있어 많은 남성들이 열광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당연한 일을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동을 하는 여자를 개념녀라고까지 부를까.
그리고 나는 오늘 그런 개념녀를 만났다.
‘그게 나를 의식한 행동인지 아니면 일상적인 행동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잘못된 것 없는, 아니, 오히려 나로서는 잘된 일이기에 기뻐해야 옳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마음이 별로 좋지 못했다.
뭐, 내가 밥 먹으러 가자고 해 놓고 돈을 나눠 낸 게 못내 자존심 상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녀에게 처음부터 호감을 가지고 있던 것 같다.
물론 맨 처음에야 좋지 못한 일로 얽혀 얼굴 붉히는 사이였으니, 그때를 제외하더라도 버스에서 다시 만나 나에게 먼저 사과를 건네는 용기 있는 모습에서 처음으로 그녀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녀와 같은 미인이 나를 신경 쓸 리 없다는 것에 대해 잠깐 떠오르고만 생각에, 그다음 상황이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짧게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다음 날 다시 그녀를 만나니 잊고 있던 호감이 다시 떠올랐다.
물론 그날도 처음 만날 당시에는 별로 좋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다시 언제나처럼 그녀를 잊으려는 찰나, 그녀와의 대화에서 나에 대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작은 흔적이 되었다.
또 그 작은 흔적은 곧 오늘의 또 다른 작은 사건으로 나타났다.
사실 그녀를 떼어 놓아야 한다는 이유로 말한 히어로의 인간관계는, 애당초 히어로가 상대에게 관심이 없으면 크게 문제될 것도, 성립될 일도 아니다.
나같이 무뚝뚝하게 생긴 녀석이 무시로 일관하는데 그 어떤 여자가 끝까지 호감을 지닐 수 있겠는가. 어찌 보면 오늘의 내 오버 액션들은 그녀에 대한 나의 호감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주는, 그런 류의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렇기에 그녀를 더욱 내 곁에 둘 수 없어.”
그녀를 내 곁에 둔다는 것은 나의 욕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