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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동네에는 1권 (10화)


비록 서로가 서로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다지만 이게 사랑으로 발전하려면 아직 많은 단계가 남아 있었다.
지금의 감정이 사랑으로 표현될 만큼 발전하기 전에, 그전에 끊을 수 있을 때 빨리 끊어 내야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으리라.
위험을 안고 사는 남자와 그 곁을 지키는 여자란 건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며 멋있는 것.
지금 내가 처한 곳은 현실이다.
‘그래, 최대한 무시를 하자.’
무시.
사실 이게 가장 확실하고 좋은 방법이었다.
세상사 인간관계에 있어 ‘무시’만큼 가장 확실한 단절 기술은 존재하지 않았다.
상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상대의 몸짓에 반응하지 않으면 상대는 스스로 지쳐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그녀와 같은 예쁜 여자가 나 같은 남자에게 무시를 당하고 그로 인해 눈길을 받는다면 결코 참지 못하리라.
그러는 사이 집에는 다 와서 오자마자 가방만을 내려놓고 다시 집을 나섰다.
‘어느새 여섯 시가 다 되어 가는군. 첫날부터 지각을 할 순 없지.’
현재 시각은 다섯 시 반, 예정대로라면 집에 도착하고 한두 시간가량 여유가 있었을 테지만 오늘은 학교에서 나온 시간도 그렇고, 중국집에 들른 것도 그렇고, 중간에 일이 있던 만큼 더 늦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모르니 다음부터는 유념해야겠어, 밥 한 끼 먹고 온 것뿐인데 평소보다 시간 차이가 많이 나니까.’
뭐, 사실 삼십 분가량 시간이 남은 만큼 코앞에 편의점까지 가는 데 문제는 없었지만 사람 일이란 언제나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잘 기억해 둘 필요성이 있었다.
혹시 아는가?
밥을 두 끼 먹게 될 일이 생길지.
딸랑.
손님의 출입을 알리는 경쾌한 방울 소리가 울리고 편의점 내부로 들어선 나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점장님을 볼 수 있었다.
“오오, 왔는가! 일찍 왔구만그래!”
“첫날부터 늦을 수는 없죠. 일도 배워야 하는 입장이니 일찍 오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그으래? 이거 좋은 마인드를 가진 친구구만. 이봐, 진성아! 얘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알바야. 경력이 있다고 하니 처음부터 하나하나 알려 줄 필요는 없지만 대략적인 건 설명을 해 줘야 할 거야.”
그렇게 말을 하며 점장이 얼굴을 돌린 곳에는 무언가 굉장히 초췌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또래의 남자가 서 있었다.
‘거, 되게 부담스러운 시선이군.’
“저기, 안녕하세요?”
나를 계속 빤히 쳐다보는 탓에 부담스러운지라 일단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진성이라 불린 그는 시선을 옮겨 내 몸을 이모저모 살펴보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행히 일하다 지쳐 쓰러질 일은 없겠군…….”
“네?”
“아닙니다, 아무것도. 제 이름은 김진성이고 보시다시피 알바생입니다.”
“아, 네. 전 신태일입니다.”
못 들은 척하긴 했지만 나는 분명 똑똑히 들었다.
‘일을 하다 지쳐서 쓰러진다고? 겨우 요만한 편의점에서?’
사실 말로 표현하기 좀 그렇지만 이 편의점의 규모는 절대 크지 않았다.
속된 말로 코딱지만 하다고나 할까?
계산대는 딱 두 명이 들어가 설 수 있는 정도의 공간에 그것도 최대한 활용한 상태라 그 좁은 곳에 계산용 포스 기계가 두 개나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진열품은…… 분명 작은 규모긴 하지만 오는 손님도 많고 다양한 탓인지 많은 종류의 물품이 조금씩 진열되어 작은 매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여성용품부터 남성용품까지 성별에 따른 품목부터, 편의점의 기본이 되는 즉석 식품까지 그야말로 한 치의 오차 없이 또 빈틈없이 꽉꽉 진열되어 있었다.
‘예전에 이런 모습을 어디선가 본 거 같은데?’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기분에 잠시 생각해 봤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하긴, 이걸 어디서 봤든 무슨 상관이겠어.’
그러는 사이 내가 편의점 내부를 쭉 훑어보는 것을 봤는지 김진성 씨가 말을 건넸다.
“혹시 저녁때 여기에 물건을 사러 오신 적 있으신가요?”
“네? 아니요. 요 앞에 살긴 하지만 특별히 군것질 같은 걸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원래 저녁때는 따로 하는 일이 있었거든요.”
“그래요? 그럼 밤에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모르시겠군요.”
과연 무슨 일이라고 부를 만한 일이 터진다는 말인가?
내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말을 이었다.
“이곳은…… 이제 곧 악의 소굴이 됩니다.”
“네?”
우리가 상대하던 악당들의 본거지가 바로 여기였다는 말인가?
“그들은 우리를 쥐어짜고 맹렬히 공격할 것이며 끝없이 일을 하도록 할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생각으로 지원하셨는지는 모르지만,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그러죠.”
뭐랄까, 굉장히 추상적인 느낌이지만 편의점에 대입해 보니 어떤 모습일지 어느 정도 상상이 갔다.
이를 상상하며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그는 만족했다는 듯 웃으며 나에게 이것저것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을 가르쳐 줬다.
물론 나 역시 군대에 가기 전 편의점에서 대타로나마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어서 일에 대해 배우는 게 어렵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이 못내 찜찜했다.
그리고 약 삼십 분 뒤.
나는 그 악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 * *

우글우글.
바글바글.
“아저씨! 이거요!”
과자 봉지가 앞에 놓여지자 내 손은 전광석화처럼 바코드를 찍어 내고 받은 돈을 계산하여 잔돈을 거슬러 준다.
그와 동시에 다시 계산대 위에 올라오는 수북한 물건들.
분명 계산을 했는데 내가 쏘아 내는 스캐너의 레이저가 바코드를 읽어 내는 속도보다 계산대 위에 물건이 올라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그야말로 빛보다 빠른 수준.
지금 시간은 저녁 7시.
나는 손으로 바코드를 찍고 계산을 해 나가면서 차분하게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곁눈질로 스윽 매장을 훑어봤다.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교복을 입은 많은 학생들이었다.
이 주변은 주택가, 멀지 않은 곳에 초, 중, 고등학교가 모두 옹기종기 모여, 주변은 그런 학생들을 타겟으로 학원가가 밀집해 있었다.
보통 그런 학원의 하교 시간은 저녁 시간대, 약 다섯 시에서 늦은 저녁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고등학생의 경우 야간자율학습을 하지만, 최근 선택한 학생들 위주로 하는 것으로 많이 바뀜에 따라 고등학생들의 하교 시간은 약 다섯 시 이후에서 여섯 시.
그리고 그들이 걸어서든, 대중교통을 이용해서든 자신들의 집이 있는 이곳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삼십 분 전후로 여섯 시에서 여섯 시 반까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게 바로 지금 눈앞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교복들의 정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피곤에 찌든 얼굴로 음료수며 즉석 식품을 고르는 양복 입은 사나이들.
주택가이니만큼 회사를 다니는 회사원들 또한 셀 수없이 많아, 일반적인 회사의 퇴근 시간대인 여섯 시를 기준으로 집까지 오는 시간을 어림짐작하면 약 한 시간.
바로 지금 이 순간이었다.
물론 그들 중 가정이 있는 이들은 집에 돌아가면 맛있는 저녁 식사가 차려져 있겠지만.
지금 그들의 모습을 보건대 이 동네에는 그런 사람이 많지 않은 듯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이는 사람은 젊은 남녀들로, 아마도 대부분이 이 주변에 사는 자취생들일 것이라 추정된다.
각자 밥이나 요리를 해 먹기 불편한 그들로서는 편의점에서 파는 각종 즉석 식품은 마른 땅에 빗줄기와도 같은 것이리라.
그들도 밥을 먹어야만 했기에 편의점을 찾는 걸 테고 일찍 나오면 편히 살 수 있고 물품의 선택폭이 넓다는 것을 알지만 어디,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먼저 몸을 움직인다는 일이 쉬운 것이겠는가?
그들로서는 최선을 다해 가장 빨리 나온 시간이 지금일 것이다.
분명 이성적으로 이것보다 일찍 나가는 것이 무조건 유리하고, 몸도 편하다는 것을 알지만 결코 그렇게만은 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의 본능이었다.
‘아마 늦게 나오면 수량이 한정될 수밖에 없는 즉석 식품, 혹은 신선식품류는 꿈에서나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탓일 테지.’
학생을 보내면 대학생이, 대학생이 가면 직장인이, 그리고 난데없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동네에서 가끔 보던 아주머니와 장난감이 들어 있는 과자를 골라 들고 온 어린애들까지.
끝없는 계산의 행렬 속에 나는 문득 지금의 장면을 어디서 본 것인지 떠올랐다.

군대에 있을 시절, 어느 날 PX병 후임이 울상을 하고 내무실에 들어오기에 물은 적이 있었다.
“무슨 일 있냐?”
“후, 그게 내일모레 피엑스 감사지 말입니다.”
“피엑스 감사? 뭐 돈 맞추고 그러는 거야? 빵꾸난 거라도 있어?”
“차라리 돈 문제였으면 그냥 돈으로 해결할 텐데…….”
그렇게 말을 줄인 후임병은 다음날 야간작업 신청서를 들고 당직사관을 찾았고 그날 새벽 경계 근무를 서러 나갈 적에도 PX 건물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튿날.
우리가 간 PX는 그간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그런 곳이 아니었다.
365일 먼지와 거미줄로 덮여 있던 그곳은 먼지 한 톨 존재하지 않았고, 물때로 새까만 모습만을 보여 주던 냉장고는 눈이 부셔서 차마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그 모든 진열장과 냉장고에 단 한 치에 오차도 없이 일렬로 줄 서서 앞면만을 바라보고 서 있는 물건들이라니.
마치 한창 물오른 일병들의 완벽한 제식 군기를 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끝은 바로 냉동고였다.
날을 막론하고 뒤죽박죽 섞여 있던 수많은 냉동식품과 아이스크림들은 자신들의 포장지가 얼음 덮인 비닐이라는 것조차 잊은채 한 치의 오차 없이 완벽하게 오와 열을 맞춰 줄지어 서 있었고 심지어 제품별로 가격표까지 붙어 있었다.
군 생활 내내 가격도 모르고 사 먹던 물건들의 가격을 확인하는 것은 정말 놀랍고도 신선한 충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뿌듯해하던 PX병 후임의 얼굴을 보며 함께 웃어 준 우리는.
정확히 한 시간 뒤, 다시 찾은 PX에서 초토화된 매장 한가운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때마침 도착한 감사관을 바라보는 그를 보면서 차마 PX에 들어설 수 없었다.

“…….”
물론 지금 내가 감사를 받아야 하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여기는 사회의 편의점인 만큼 깨끗하고 깔끔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곧 이 손님들이 가고 나면 내가 해야 할 일이란 것도 알 수 있었다.
실시간으로 비는 게 보이는 진열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 어디서 자꾸 꺼내 오는지 끝도 없이 나오는 물건들.
편의점 알바가 시급이 세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 * *

피크 타임이 끝나고 난 뒤.
나는 폐허가 된 편의점을 열심히 정리한 끝에 간신히 다음 알바생에게 무사히 일을 인계할 수 있었다.
지금 시간은 정확히 열두 시.
알바 첫날부터 예상을 뛰어넘는 상황에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지만 다른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사실 소홀해도 상관은 없지만. 차라리 빨리 해결해 놓는 게 낫겠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고 방학 숙제도 일기까지 미리 다 써 놓는 법이 속편한 법.
아직 6월이 시작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저번 달과 같은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 놓기로 했다.
‘적당히 변신할 곳을 찾아야 하는데.’
말단에 하는 일도 별로 없지만 명색이 히어로.
업무를 볼 때는 반드시 전투복을 착용하고 일을 했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전투복을 입으면 엄청 세지고 그런다고는 하지만…….’
사실 다 거짓말이다.
물론 A급 이상의 상급 히어로들은 각자의 전투복에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여러 장치, 혹은 증폭을 위한 기능이 첨가되어 있다지만 나를 비롯한 말단들에게 지급되는 전투복의 능력이라고는 바닥에 대고 못을 박아도 절대 뚫리지 않는 질긴 소재라는 것과 불에 잘 타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기능은 없었다.
게다가 말이 전투복이지 한 치의 틈도 없는 전신 타이즈라서 엄청 갑갑하고 통풍도 잘 안 된다.
그래서 사용 후에는 반드시 세탁을 해 줘야만 했다.
그런데다 건조는 어찌나 느린지…….
‘그나마 나는 불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들은 몰래 말리느라 고생한다던데.’
나는 전투복을 베란다에 널고 누가 볼까 전전긍긍하며 주변을 살피는 모습을 상상하며 몸서리쳤다.
사실 이웃이 보는 것보다 부모님이 만약 그걸 보신다면…….
정말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최첨단 기술이 도입되어 이렇게 눈에 ‘안 보이게’ 전투복을 항시 소지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서류 가방 같은 것에 전투복을 넣어 가지고 다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