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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동네에는 1권 (15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게 아니고는 말이 되지 않아.’
업무를 하면서 A급 히어로들의 기술을 몇 번 보긴 했지만 지금 그녀가 눈앞에서 본 기술은 결코 A급의 기술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를 납득시킬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오직 효율로 인해 A+등급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하아…….”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긴장이 풀리며 한숨이 나왔다.
그녀는 겨우 이런 일에 마음을 졸이고 ‘혹시나 규칙을 파괴하는’ 전례가 나올까 싶어 전전긍긍했던 자신이 한심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조신하게 앉아 순진무구한 눈망울로 자신을 쳐다보는 징그러운 덩치를 보면서 표정을 풀었다.
피식―
“야, 누가 보면 너 갈구는 줄 알겠다. 편하게 있어. 아니, 이제 강의실 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아, 그렇네요.”
그녀가 표정을 푸는 것을 보며 쓰잘데기 없는 일에 불려 왔다는 것에 짜증을 폭발시키진 않을까 마음을 졸이던 나는 히죽 웃어 보이며 드디어 이 답답한 곳을 벗어날 시간이 도래했음을 느꼈다.
하지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질문이 있었기에 말을 덧 붙였다.
“아, 그리고 어제 만난 그 괴물 말인데요…….”
나는 그녀에게 줄기로 이루어진 알의 형태와 그 속의 눈, 그리고 그게 소멸하고 사라진 나이트메어들에 관해 말했다.
그리고 내 말을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모르겠어, 내가 아는 바로 그런 녀석은 아직 발견된 적이 없어. 아마도 네가 어제 본 게 최초인 거 같아. 불에 그토록 극단적일 만큼 약한 녀석도 아직까지 발견된 바 없으니 말이야.”
“음. 그런가요?”
“뭐, 그런 부분이라면 내가 더 조사해 봐서 알려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일단 가 봐야 하지 않겠어? 나도 지금 A+로 갱신된 정보 수정하려면 골치 좀 썩을 거 같은데 피차 바쁜 처지에 시간 끌지 말자고.”
시간을 누가 끌었는데, 라고 쏘아 주고 싶었지만 실행할 용기는 없는 입장이라 그냥 씨익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딸각.
그녀가 또 다시 단추를 누르자 밴 내부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나는 그 신기한 모습을 보면서 밴의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럼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그래라.”
드르륵.
멈칫.
“…….”
“…….”
“훌쩍 훌쩍.”
“뭐냐. 쟨?”
“그, 그게. 저기 은빛아?”
“흐으으으. 훌쩍. 오빠아아. 으아앙. 훌쩍.”
“은…… 빛아?”
그렇게 내가 강의실로 돌아가게 된 건 밴의 창문에 얼굴을 부비며 울고 있던 은빛이를 수습한 다음이었다.

* * *

“휴…….”
그야말로 한숨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오빠, 왜 그렇게 한숨이야?”
“……어휴.”
“오늘 강의 때문에? 시험 대신 과제면 더 좋은 거 아닌가?”
한 학기 공부를 평가받는 데 있어서 시험이든 과제든 불편한 건 매한가지긴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한정된 시간 내에서 문제를 풀어야 하는 시험보다는 여유로운 시간을 두고 할 수 있는 과제가 편한 건 맞았다.
다만.
‘지금 내 한숨의 의미는 결코 과제 때문이 아니란 거지.’
오늘 아침 강의가 시작하기 전.
난데없이 나타난 이선영 본부장 손에 이끌려 올라탄 밴에서, 나는 내 기술을 평가받았다.
그 결과 나온 평가는 C, 지금 공식적으로 등록된 내 등급인 D급보다 높은 평가긴 하지만 이선영 본부장은 애당초 나의 A급에 관한 평가를 위해 온 것이었다.
결과대로라면 분명 실망스러운 일임에 틀림없지만 의외로 이선영 본부장은 오히려 안심한 듯 무언가 개운한 표정이었다.
물론 돌아갈 땐 조금 달랐지만 분명 가기 직전까지는 신나는 표정이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 나의 한숨은 그 신나는 표정의 주역이 된 내 옆에 계신 분 덕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쟤 누군데?”
“흐어어엉. 오빠아아, 흐흑. 흐어어엉.”
말로 형용하기 힘든 얼굴로 울고 있는 박은빛을 보는 이선영 본부장과 그런 그녀를 보면서, 그리고 나를 보면서 서럽게 울고 있는 박은빛을 보며 나는 두 여인네 사이에서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 그게…….”
“호오. 그러니까 저게 니 이거냐?”
내가 뭐라고 설명도 하기 전에 모두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음흉하게 웃음 짓는 이선영 본부장을 보면서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저 까딱거리는 새끼손가락, 너무도 가냘프고 고운 손가락인지라 천사와의 약속 같은 걸 연상시킬 만큼 아름다웠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뒤로 비치는 얼굴로부터 나는 미소 짓는 악마를 볼 수 있었다.
“아뇨, 그러니까…….”
그런 우리 둘의 기묘한 대치를 바라보던 박은빛은 지금의 대화가 자신을 주제로 하고 있음을 깨닫고 벌겋게 부은 눈으로 우리 둘을 바라보다가 내 입에서 이선영 본부장의 제스처를 부정하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으아아아아아아앙.”
……우렁차게 울기 시작했다.
‘여대생이 쪽팔리지도 않냐?’
라고 쏘아 주고 싶었지만 지금 내가 위치한 곳은 수많은 학생이 들어오고 있는 학교 출입문.
지금의 상황은 어떻게 봐도 내가 불리한 위치였으며 애당초 두 미녀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자로 등극하는 중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새 싱글벙글해진 이선영 본부장은 나를 향해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아직은 아니고 이제 곧, 이라는 건가?”
“네?”
“‘네?’는 무슨. 그럼 너 하나만 바라보며 이렇게 서럽게 우는 여자애가 있는데 아니라고 할 거야?”
“네에?”
“이봐, 동생, 이름이 뭐야?”
나는 이어지는 그녀의 말들에 계속해서 한 글자로 반문하자 지금 멍청한 표정으로 하는 대답에는 관심 없다는 듯 곧장 목표를 변경했다.
“훌쩍, 박은빛이요. 크응!”
“그래그래, 은빛이구나. 어머, 이름 참 예쁘네.”
“크응!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훌쩍.”
‘뻔뻔하구만.’
뭔가 가슴에서 울컥 올라옴을 느꼈다.
“그래, 이 언니는 여기 있는 이 덩치랑 우리 은빛이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란다.”
“훌쩍, 그럼 무슨 관계이신데요?”
어느새 울음을 거의 그친 은빛의 질문에 이선영 본부장은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 한마디로 우리 사이를 정의했다.
“주종관계.”
“…….”
“호호홋! 아니야 장난이야. 뭐, 일부 주종관계 같은 게 존재하긴 하는데 정확히는 직장 상사란다.”
그녀의 단 한마디에 다시 한바탕 눈물을 쏟으려는 은빛 덕에 이선영 본부장도 조금 당황한 것인지 곧장 해명의 말을 꺼냈다.
“훌쩍, 상사요?”
“그래. 어머, 혹시 태일이가 말 아직 안 했어?”
“네, 그냥 알바한다고만…….”
“그으래?”
말을 늘이며 나를 쏘아보는 이선영 본부장의 시선에 나는 찔끔하여 시선을 피했지만, 생각하고 보니 왜 피했는지 모르겠다.
민간인은 알면 안 되는 거 맞잖아?
“뭐, 알바를 한다고 할 수도 있겠네. 정직원이긴 한데 별로 의욕은 없는 게. 딱! 알바생 수준이거든.”
“헤에, 그래요?”
“…….”
딱히 반박할 말도 없거니와 반박을 하기엔 지금 이 둘 사이에 서 있는 내가 짧은 이 순간 이미 많이 지친 상태였다.
“뭐 태일이가 별로 자기가 무슨 일하는지 알려 주고 싶지 않은가 본데, 내가 특별히 알려 줄게.”
“뭔데요?”
‘무슨 생각이지?’
난데없는 발언에 신경이 쓰였지만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표정 중 가장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덤덤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러는 사이 나를 곁눈질하며 내 표정을 살피던 이선영 본부장이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개 돌리는 것을 포착했다.
‘역시 내가 호들갑 떨길 원했구만.’
수년간 이 일을 해 오면서 실제로 이선영 본부장과 대면한 적은 이번을 포함해도 손에 꼽을 만큼 적지만 불과 두 번의 만남으로 그녀의 성격은 거진 다 파악한 것 같았다.
‘알고도 놀아날 수는 없지.’
“궁금하지? 우리가 하는 일은…….”
잠시 말을 끄는 그녀의 말이 일부러 자신에게 시선을 모으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관심이 안 갈 수 없었다.
그녀가 하는 말에 따라 나는 위장을 위해 정말로 관련 직종을 알아봐야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경비업체란다.”
“경비업체요?”
‘경비업체?’
“그래, 생각을 해 봐. 저 커다란 덩치로 뭘 하겠어? 경비원 말고 그 이상 어울리는 게 어딨겠니? 한밤중에 저런 사람을 마주친다면 아마 해코지하려고 다가오던 사람들도 놀라 자빠질걸?”
“헤에…… 경비업체구나.”
“그래, 그래서 밤에 주로 일을 하지.”
그녀의 설득에 은빛은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나 역시, 비록 이유는 불만족스러웠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경비업체라, 확실히 괜찮은 변명거리군.’
비록 설명이 내 맘에는 안 들었지만 분명 이선영 본부장의 선택은 훌륭한 편이었다.
경비업체라면 내 덩치나 민간인을 압도하는 신체적 능력에 관해 어느 정도 변명이 가능했고 밤에 일을 한다고 설명한 덕에 앞으로 생활에 있어 알리바이를 꾸미는데 도움이 될 법도 했다.
‘야간 경비라. 괜찮아. 종종 써 먹어야겠어.’
새로 생긴 내 직업에 대해 나름 만족하고 있는 사이 두 여인네는 어느새 수다를 시작하여 나를 주제로 여러 이야기가 오고 가기 시작했다.
‘둘 다 실제로 날 본 건 몇 번 안 되면서 뭘 저렇게 세세하게 알고 있는 거야?’
멍하니 둘의 수다를 듣는 입장에서 십 분여가 넘도록 끝이 나지 않는 수다 덕분에 나는 곧 시작할 강의 시간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기…….”
“호호, 그래서 태일이가……!”
“어머? 진짜요? 호호호!”
어떻게 평소에 하는 거라곤 운동이랑 일밖엔 없는 나를 주제로 놓고 저렇게 오래 말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의문이 생겼지만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강의 가야 하는데요?”
“그러니까……. 어머?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된 건가?”
“앗! 정말이네, 난 교수님 일찍 오시는 편이라 벌써 오셨을 거 같은데!”
“그럼 빨리 가 봐야겠네?”
“네, 오늘 전공과목 교수님이라. 아, 언니 진짜 재밌었어요. 나중에 또 뵈어요.”
“그래, 나도 재밌었어. 나중에 태일이 통해서 연락 줄게 또 한 번 보자!”
“네!”
그 대답을 끝으로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져 버린 은빛을 보면서 나도 밴 안쪽에 굴러다니던 가방을 챙겼다.
‘그사이에 주변도 한산해졌군.’
시간이 시간인지라 일찍 등교한 이들은 대부분 강의실에 앉아 있을 시간이라 그런지, 지금 주변에 보이는 학생이라곤 늦을까 싶어 헐레벌떡 뛰어가는 탓에 우리의 존재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저도 가 보겠습니다.”
“그래, 그럼 난 네 정보 수정하면서 저 애도 등록해 놓을게. 박은빛이랬지?”
“등록?”
“그래, 등록.”
생소한 그 단어에 눈살을 찌푸린 나는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냅다 만류했다.
“아뇨! 절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뭐? 왜? 저 애 괜찮아 보이는데? 아니, 그보다도 너 저 애 또 울리려고 하는 거야? 물론 지금 당장은 현실적인 문제나 여러 가지로 힘들기야 하겠지만 사랑만 있다면…….”
“아뇨, 아닙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일단 등록은 보류해 두세요.”
“……그래. 너희, 아니, 이렇게 반대한다면 너만의 사정이 있는 거겠지. 본부장으로서 부하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보류해 둘게. 하지만 내 말은 장난이 아니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애 걱정만 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네가 더 걱정이니까. 기억해 둬, 히어로에게 있어서 연인이란 건, 생사를 가르는 중요한 부분일 수 있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피차 바쁜 몸이니 이만 가 보마.”
“……예.”
부릉.
그 말을 끝으로 차를 달려 사라지는 이선영 본부장을 보면서 나는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히어로에게 연인이란, 생사를 가르는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게 생이 될지 사가 될지는 닥쳐 봐야 아는 거니까요.”
그리 멀지 않은 강의실로 향하는 걸음이었지만 아주 잠깐 잊고 있던 문제가 다시 녹아들어 그 걸음을 더디게 하고 있었다.
‘연인이라.’

* * *

검은 밀실, 그곳에는 검은 남성의 실루엣을 비추는 모니터 한 대와 그 모니터 속 남성을 상대로 대화를 하는 또 다른 남성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