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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동네에는 1권 (17화)


“등록? 아, 그것도 있었지. 하지만…….”
“절대로 싫습니다!”
나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반론을 펼치기 전에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등록을 한다는 것은 상대를 나의 품에 두겠다는 의지의 표현,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라도 그런 상황은 달갑지 않아.’
이런 나의 선택을 나중에는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절대 아니었다.
박은빛, 그녀가 나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고 나 역시 일부나마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그녀를 책임질 만한 힘은 존재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인 것은 물론이고 당장 올해 말에 있을 파견에 있어 살아남는 것도 문제가 있으니 말이다.
“아니, 잠……!”
“저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녀를 여유롭게 사랑할 만한 능력도 부족할 뿐더러 저희는 분명히 말하는데, 아직 연인 사이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 둘의 감정은 서로에게 조금의 호감을 갖는 정도고 이 정도는 그냥 이성친구간에도 충분이 있을 법한 정도이며…….”
나불나불.
나는 전화기 너머의 그녀에게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 박은빛, 그녀와 내가 연인이 될 수 없는 여러 이유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물론 나 역시 이선영 본부장의 생각을 이해하고는 있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내가 박은빛을 예비 배우자로 등록을 함으로서 얻는 혜택과 ‘일반적으로’ 히어로들이 성인이 된 이후 가장 많이 성장하는 시기인 연애 초기의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보통 성장은 히어로가 사랑을 처음 시작할 무렵 시작되며 연애 초기에 급작스럽게 능력이 상승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물론 결코 선천적 능력자들의 성장을 따라잡지 못하지만 선천 능력자는 물론 후천적 능력자들 역시 힘이 최고로 강력해지고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시기였다.
뭐, 대게 그런 것이니만큼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열에 한둘을 제외하면 모두가 이런 효과를 경험하게 되며 이 업계의 연구자들은 그 이유로 사랑을 통해 겪는 정신적 성장으로 인한 파워 업 효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가설일 뿐 확실시 된 내용은 아니었다.
그냥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런 말이 신빙성이 있다고 보여질 뿐.
어쨌거나 나로서는 박은빛을 그런 용도로 사용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야, 이 XX야. 내 말 똑바로 안 들어? XX를 뽑아서 XX에 처넣어 버리기 전에 입 다물어, XX야!”
“…….”
“후우, 이제야 말 좀 하겠군. 먼저 말해 주지. 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네 의견을 따를 거야. 내가 너에게 조언을 해 줄 수는 있지만 그런 것을 결정하는 일까지 내 맘대로 하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이야…….”
“……?”
후으읍!
말이 줄어듬에 따라 전화기에 조금 더 가까이 귀를 대고 있던 나는 곧 들려온 깊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 금! 내! 가! 하! 고! 싶! 던! 말! 은! 네! 놈! 이! C! 급! 이! 라! 는! 거! 다!”
쩌렁쩌렁!
‘크윽, 어떻게 전화기를 타고 온 소리가 이렇게 클 수 있는 거지?’
그나저나 C급?
“제가, C급이라고요?”
“그래, C급이다.”
“아니, 그런데 갑자기 왜? 저는 따로 신청을 하지도 않았고…….”
“뭘 신청이야, 신청은. 그냥 까라면 까는 거지, 그리고 넌 원래부터 승급 명단에 있었어. 오늘 아침에 측정한 내용도 있고. 해서 같이 보고했더니 널 바로 승급시키라고 하더라고. 갑작스럽긴 했지만 납득 못할 만한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아, 그리고 오늘 새벽에 A+라고 측정된 건 그냥 오류였다더라고. 내가 돌아오니까 내용이 C로 바뀌어 있지 뭐야?”
“그…… 런가요?”
“왜? 아쉬워? A급이란 게 사실 그렇게 좋은 것만도 아니야. A급 히어로들은 말야…….”
내 떨떠름한 대답은 분명 갑작스런 C급으로 승급에 대한 불만과 방금 전 있었던 청각 테러에 대한 내 개인적인 소견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그걸 들은 그녀는 A급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곡해한 것인지 금세 말을 바꿔 A급의 안 좋은 점에 대해 나열하려고 하고 있었다.
“아뇨, 아닙니다. 설명 안 해 주셔도 충분히 알고 있어요. 그보다 저 슬슬 알바를 갈 시간이라…….”
“그래, 편의점 알바였지? 열심히 하라고, 너와 은빛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분위기를 읽고 재빨리 대처한 탓에 A급이 왜 안 좋은가에 대한 설교는 생략할 수 있었지만 다른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래, 내 잘못도 있으니까.’
“그게 그러니까. 어휴, 알겠습니다.”
“그래, 다음부터는 사람 말은 끝까지 듣도록 하고, 이만 끊으마.”
뚜뚜뚜.
순식간에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 버리는 이선영 본부장.
하지만 차라리 속편했다.
핸드폰 액정 위로 곧 통화 종료를 알리는 화면이 뜨면서 통화 시간이 나타났다.
“삼십 분? 벌써 알바 갈 시간이군.”
그리 길게 통화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다섯 시 반을 넘어 여섯 시까지 십 분 가량을 남겨 둔 것을 확인한 나는 늘어져 있던 몸을 추슬러 다시 나갈 채비를 했다.
나갈 채비라고 해 봤자 집 열쇠를 챙기고 핸드폰 배터리를 갈아 끼우는 정도밖엔 없었지만.
“자, 가 볼까.”
철컥.
문을 열고 밖에 나오자 긴 해 덕분에 아직도 밝은 하늘이 나를 반겼다.
‘지금 이 모습이 검게 물들면 내 안색도 검게 물들어 있겠지.’
앞으로 약 삼십 분 이내로 겪게 될 일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난 내 새로운 일터로 향했다.
돈은 소중한 법이니 말이다.

* * *

딸랑.
“저 왔습니다. 응……?”
“오, 태일 군. 오늘도 딱 적당한 때에 왔구만.”
나는 문을 들어서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는 편의점의 바뀐 것에 대해 의문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그런데 이분은?”
“아, 이쪽은 김상원 군이야. 둘이 인사하게.”
난데없이 인사를 시키는 것에 대해 의문이 들었지만 고용인의 입장으로서 어려운 것도 아닌 일을 거절할 능력은 없었다.
물론 인사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태일입니다.”
“아, 김상원입니다.”
“그래, 태일 군. 이 친구는 오늘부터 태일 군과 함께 저녁 파트 알바를 하게 되었고…….”
“네? 그럼 원래 하시던…….”
“아, 진성 군 말인가? 그만뒀네. 뭐 내가 말하긴 좀 그렇지만 이곳 알바치고는 굉장히 오래하긴 했지. 뭐, 그렇다고 일을 하기 싫어서라기보다도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겨서 그만둔다더군. 나도 오늘 갑자기 연락이 와서 당황했는데 때마침 상원 군이 왔지 뭐야. 잘된 일이지.”
“그런가요?”
“그래.”
그렇다고 하는데 내가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오늘부터는 숙달된 경험자 없이 ‘그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게 문제였을 뿐.
‘오늘부터는 더 힘들겠구만.’
비록 하루밖에는 안 한 일이지만 직감적으로 오늘의 일이 얼마나 고될지 느낄 수 있었다.
“아, 그리고 상원 군은 원래 편의점 아르바이트 경력이 좀 있어서 특별히 가르쳐 주고 해야 할 부분은 없을 거야 게다가 내가 우리 편의점에서 일하면서 필요한 것은 알려 준 상태거든.”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야 한시름 놨다고 할 수 있었다.
비록 이곳의 일을 겪어 봤을 리 없겠지만 경험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니, 단순히 일을 한 것만 따지면 나보다도 숙달자라고 할 수 있었다.
“슬슬 시간이 되는군. 그럼 오늘도 잘 부탁하네.”
나와 김상원이 유니폼을 갈아입고 이런저런 판매 준비를 하는 사이 시간은 흘러 어느새 여섯 시를 조금 넘게 되었다.
그리고 점장은 그 말을 끝으로 부리나케 자리를 떴고 어느새 편의점에는 나와 김상원 둘만 남게 되었다.
“…….”
“…….”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나는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십 분. 늦어도 십 분 내에 시작될 거야.’
어제의 경험으로 비춰 보건대 여섯 시 십오 분 내지는 이십 분이 되면 그들의 방문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기…….”
그리고 이때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네?”
“여기 일은 어떤가요? 많이 바쁜가요? 시급이 높아서 보고 바로 지원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시급이 이 정도 되면 상당하겠죠?”
“상당. 상당이라……. 아마 생각하는 것 이상을 보시게 될 겁니다.”
“네?”
나의 탄식에 가까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상의 대답을 해 주기에는 마음이 너무 초조했다.
‘오 분. 오 분 남았다!’
내가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으로 컴퓨터에 있는 시계만 바라보고 있자 상원이 말했다.
“그렇게 시계 계속 보고 계셔도 시간은 빨리 안 가요.”
“네?”
“제가 여태껏 여러 알바를 하면서 느껴 본 건데 알바하는 시간만큼은 절대로 빨리 가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시계를 쳐다보고 있으면 더디게 가는 것 같고. 그냥 일에 몸을 맡기고 일만 하다가 정신을 차려 보면 알바가 끝나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
진리를 설파하는 것 마냥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러고 보니 구인 전단지를 오늘 보셨다고 했는데. 혹시 여기 온 지가…….”
“아, 오늘 아침, 이 아니라 오후에 왔죠.”
“그렇군요.”
나는 그 말을 끝으로 그의 모습을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찬찬히 확인했다.
180은 족히 되어 보이는 키, 약간 마른 것 같지만 탄탄해 보이는 팔로 말미암아 잘 관리된 것으로 보이는 몸, 갸름한 얼굴과 조금 더워 보이지만 그에 반해 잘 어울리는 파마 머리까지. 그야말로 조화롭게 어우러진 잘생긴 대학생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잘 기억해 두었다.
몇 시간 뒤 그의 모습과 비교를 하기 위해서.
그렇게 내가 본인을 빤히 관찰하고 있자 무안한 듯,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운동하시나 봐요? 몸이 굉장히 좋으신데. 혹시 운동선수?”
“네, 운동은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운동선수는 아니고, 취미 정도?”
“와, 취미로 운동을 하시는데 몸이 그렇게 좋으시다고요? 저도 나름 운동 좀 한다고 자부했는데 이거 한 수 배워야겠는걸요?”
호들갑을 떨며 상대를 칭찬하는 모습을 보니 사교성은 나쁘지 않은 사람 같아 초조함에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그 말에 응수했다.
“그럴 리가요. 지금 상원 씨 몸을 보니 그 몸도 엄청 단련한 거 같은데요? 근육이 균형 있게 만들어진 게 골고루 운동하는 편인 것 같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격투기 같은 것도 하셨죠?”
“그, 그걸 어떻게?”
내 말에 조금은 굳어진 표정으로 대답하는 상원을 보면서 뭔가 실례가 되는 말을 했나 싶었지만 그런 말은 한 기억이 없다는 생각에 말을 이었다.
“뭐, 사실 드러난 부위라곤 목이랑 팔이 다이긴 하지만 팔에 섬세한 근육 모양도 그렇고 체구에 비해 큰 옷을 입고 있는 것도 그렇고. 게다가 흔히 보기 힘든 승모근도 꽤나 발달해 있는 게 보통 운동을 하신 거 같지는 않아 보여서요. 그리고 손도 많이 관리하신 거 같긴 하지만 티가 나요. 보통 주먹 쥐고 무언가를 타격하는 훈련을 많이 하면 손의 모양이 좀 바뀌기 마련이거든요 물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경우는 아니지만 체격에 비해 손가락이 굵으시고 아, 지금처럼 주먹을 쥐셨을 때 모양이 타격계 무술을 배운 사람들한테서 많이 볼 수 있는 모양이거든요.”
“그, 그게 다 보이신다고요?”
내 말을 다 들은 상원은 그야말로 떨떠름한 표정인지라 아무래도 내가 너무 세세하게 말하는 것에 대해 기분이 상했을 수도 있겠다 싶어 몇 가지 설명을 추가할 수밖에 없었다.
“아, 네. 뭐 보이죠. 하하, 사실 저도 완벽하게 알고 그런 건 아니에요. 운동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말로 추측을 하는 거지. 사실 제가 말한 것 중에서 틀린 것도 있을 걸요? 그쵸? 다 맞았다면 오늘따라 잘 찍었네요.”
물론 틀린 내용이 있을 리가 없지만 내 말이 전부 맞다면 그건 지극히 우연일 뿐이라는 밑밥을 깔며 한발 빼는 것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손은 관리하신 게 티가 좀 나니까 좀 더 유심히 본 거뿐이니 오해 마세요. 하하하!”
“관리가…… 티가 난다고?”
“네?”
“아, 아니에요. 그, 그럼 혹시 태일 씨는…….”
딸랑.
상원이 무슨 말인가 하고자 입을 여는 순간 편의점 문이 열리며 맑은 종소리를 내었다.
물론 나한테는 그저 맑게만 들리지 않았지만.
“앗, 시작됐다. 그럼 이제 집중하시고 준비하세요. 지금부터는 정말 말할 시간도 없을 테니까.”
“아, 그……!”
내 충고를 받아들인 건지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